인천의 땅과 사람들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3 19:36:07
인천의 땅과 사람들
김 창 수(문학평론가․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Ⅰ. 왜 도시의 역사, 인천의 역사를 말하는가?
모든 생명체는 정위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위치한 공간에 대한 정보에 대한 감각이다. 이러한 감각에 혼란이 생기면 생명체는 치명적으로 위험에 빠진다.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연어떼의 모천회귀가 그 대표적 사례이고 식물들마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는 과정에서 개체가 자리잡은 공간에 대한 정보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안다. 인간 역시 뛰어난 정위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현대사회 급속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공간감각의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인구의 끊임없는 이동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화의 진전으로 가속화하고 있다. 한편 사이버 공간의 확장으로 인해 인간의 공간의식에는 비물질적인 차원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공간 감각의 혼란을 초래하는 시-공간 압축현상 대한 반작용으로 최근 ‘장소’(place)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주말이 되면 많은 ‘시민’들은 낯익은 ‘장소’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러나 시민들이 찾아가는 대부분의 ‘장소’들은 가공된 곳이거나 한갓 이미지에 불과하다. 문화자본들은 ‘장소’를 상품화하고 ‘노스탤지어’를 코드화한 상품 판매에 급급할 뿐 땅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이비 역사나 이미지의 역사만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인들이 살아가는 장소는 영구한 변화의 도가니가 되어 가뜩이나 불안한 시민들의 무의식을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가 터잡고 살아가고 있는 땅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개인의 경우 미지의 공간에 내던져 있는 듯한 소외감을 완화시킬 수 있으며, 지역사회는 생활 공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역동적인 도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찾을 수 있다.
Ⅱ. 미추홀 혹은 ‘土濕水鹹의 海濱’
개항이전 시기의 인천은 소래산과 문학산사이의 관교동 일대를 중심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와 구릉지대를 가리킨다. 인천의 옛 지명은 매소홀(買召忽) 혹은 미추홀(彌趨忽)이다. ‘미추홀’은 고구려어 계통으로 짐작된다. 이를 물을 뜻하는 ‘미(혹은 )’와 사잇소리 ‘ㅅ’, 그리고 고을이나 성을 의미하는 ‘홀’로 이루어진 음차표기라고 보면, 인천은 ‘물의 도시’이거나 ‘해상 왕국’으로 풀이된다.1) 이 지방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문학산, 계양산 등에서 발견된 각종 석기류들로 보아 신석기 시대 (新石器時代) 부터였을 것이다. 또 학익동, 주안동, 문학동 등지에 분포된 지석묘(支石墓)는 청동기시대 (靑銅器時代)에는 부족세력이 터잡고 살았음을 알려 준다. 문헌상 인천사의 시작은 기원전 1세기 경으로 백제사의 기원과 일치한다. 백제사는 부여족의 한 갈래인 온조 집단이 한강유역에 이주하여 정착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온조 집단이 처음 정착했던 위례성 지역은 오늘날 서울시 일원이다. 백제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한강유역의 다른 정치세력을 통합해갔는데 온조왕 13년에 이르러 “서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쪽은 바로 미추홀을 중심으로 한 비류 세력의 영토를 지칭하는 것이다. 미추홀은 오늘날의 경기만 일대로 옛 인천 땅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2)
“ 沸流와 溫祚는 太子(고구려 琉璃)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烏干 馬黎 등 열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라오는 이가 많았다. 드디어 漢山에 이르러 負兒嶽에 올라 가히 살만한 곳을 바라 보았다. 沸流가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자 十臣이 간하기를 ‘생각하건대 이 河南의 땅은 北쪽은 한강이 둘러쳐 있고 東쪽은 높은 산에 의거하였으며, 南쪽은 沃澤을 바라보고, 서쪽은 大海가 막고 있어 그 天險의 地利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 곳에 도읍을 이루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沸流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彌鄒忽에 가서 살았다. 溫祚는 도읍을 河南 慰禮城에 정하고 十臣으로 輔翼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十濟라 하니 이때가 前漢 成帝의 鴻嘉 3년이었다. 沸流는 彌鄒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安居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慰禮를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지라 참회하여 죽으니 그 臣民이 모두 慰禮에 歸附하였다. 올 때에 백성이 즐겨 좇았으므로 후에 국호를 百濟라고 고쳤다. 그 世系가 高句麗와 한가지로 夫餘에서 나왔기 때문에 夫餘로서 성씨를 삼았다.3)
ꡔ삼국사기ꡕ의 기록은 망명당시 미약하던 온조의 내륙농경집단이 점차 성장하여, 해상교역세력이었던 비류 집단을 흡수 통합한 사실이 형제 설화로 윤색되어 신화로 정착된 것이다.4) 십제와 백제라는 명칭은 집단의 규모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비류 집단을 통합한 이후에 백제로 개칭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비류 집단의 규모가 훨씬 강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다‘는 언급은 침강해안인 서해안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결코 비류집단이 패배하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소금과 해산물의 생산활동과, 해상 교역활동을 하기에 유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온조 세력의 1차적 공략목표가 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내륙 농경집단에 불과했던 온조세력은 해상교역집단이었던 미추홀을 통합하면서 서해안 항로를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소금을 한강 중부 내륙지방으로 공급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비약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5) 서기 372년경 지금의 연수구 옥련동 해안일대에 국제항인 능허대(凌虛臺)를 개항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동아시아 국제 교역을 펼치면서 경제적 외교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비류세력을 통합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추홀은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삼국시대에 이르러 한반도내의 정치세력간의 군사적 각축장이 된다. 본래 백제의 영토였던 인천은 4세기 말부터는 고구려에 의해 점령된다. 광개토왕 6년(396)년에 일시 점령되었다가, 장수왕 63년 (475년)에는 본격적인 고구려의 영토가 된다. 이때 고구려에 의해 미추홀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이 설치되고 부평지역은 주부토군(主夫吐郡)이, 강화도에는 혈구군(穴口郡)이 설치되었다. 고구려의 국세가 쇠퇴하고 백제가 국력을 회복한 백제 성왕 무렵에 이르면 인천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 된다. 551년 나제 연합군은 한강유역의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고토를 수복하였으나 2년 뒤 신라의 기습공격으로 이 지역을 상실하게 되는 데 인천지역도 운명을 같이 하였을 것이다. 이후 신라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는 642년경부터 인천지역은 완전히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에 의해 반도내의 삼국통합이 이루어진 후 경덕왕 16년(757년) 인천은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된다. 고려 숙종 때에 이르러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 개칭되었는데 이는 인천의 호족인 이자연의 맏딸이 문종비로 책봉되어 순종, 선종, 숙종, 훗날 대각국사 의천이 된 후(煦)를 비롯한 10남 2녀를 낳아 왕실을 번창하게 하였으므로, 그 고향인 인천이 '경사의 근원이 된 고을'(강희맹,[인천부승호벽상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후 인천은 인종때에 이르러 인주(仁州)로 개명하는데 이는 '인종이 탄생한 고을'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 지명이 지금의 '인천'이라는 지명의 뿌리가 된다. 인천지역은 고려왕실을 번창시킨 중요한 땅으로 여겨져 여러 차례 정치적으로 격상되면서 성장하였으며 그 중심은 당시의 지방 호족이었던 경원 이씨 가문이었다. 고려말에(공양왕 2년,1390) 인천은 다시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는데 그 사유는 인천지역이 이른바 7대어향(황실의 고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인천은 태조 원년인 1392년에 인주로 강등되었다가, 태종 13년인 1413년에 인천으로 개칭되는데, 당시 인천의 등급은 郡에 해당하였으므로 仁州라는 지명이 최고 지방행정단위인 주와 혼동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신 '川'을 사용하였다. 세종대에 이르러 인천도호부로 승격이 되는데, 이는 인천이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진외가(陳外家) 고을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인천은 한때 역승(逆僧) 여환(呂環)의 출생지라 하여 숙종 때에는 최하급지방단위인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나 곧 도호부로 복구되어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다.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인천은 그 영향력과 세력의 판도는 늘 중요한 지방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어떤 세력이나 왕조도 경시할 수 없는 지리적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반도의 내륙으로 진출할 있는 관문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고 물자운송과 해상활동을 할 수 있는 해상경제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Ⅲ. 개항 무렵의 인천
1. ‘해문요충’ (海門要衝)과 ‘물화적재지(物化載積地)
제물포의 개항은 한국사에서 봉건군주국인 조선이 자본주의 세계 체제로 편입되고, 아서구(亞西歐)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되는 전사에 해당한다. 제물포 개항을 둘러싸고 약 2년간 진행된 개항 협상이 첨예한 대결의 양상을 띤 것은 그러한 역사적 변곡점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측의 입장에서 제물포 개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성사시켜야 할 과업이었다. 당시 일본의 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인천을 개항장으로 선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서해안 일대의 조사와 개항협상을 주도하였다. 그는 서해안에 대한 3차에 걸친 정밀하게 탐사한 결과 제물포를 최적의 개항장으로 판단했다. 제물포는 “월미도 부근은 여러 섬으로 둘러싸여 풍랑으로부터 안전한 자연항이며, 제물포와 월미도 사이에 두 길 깊이의 수로(갯골)이 형성되어 있어 간조시에도 작은 배들은 왕래할 수 있으며, 부두와 축항시설의 설치가 용이한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항구로서의 기능을 앞세우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서울과 가깝다는 것, 인천이 지닌 정치적 군사적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고려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이 당시 일본은 제물포가 “물자를 싣고 내리기에 최적의 장소(物貨陸運載積)”이며 서울의 경제에 이득이 대단히 클 것이라는 경제 논리로 협상에 임했다. 이에 대해 조선측에서 제물포는 ‘해문요충(海門要衝 바다의 전략적 요충)’이자 ‘보장중지(保障重地 국가의 안전을 보장에 중요한 땅)’이므로 개항장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맞섰다. 실제로 다소면 해안일대는 군사시설물로 둘러 쌓여 있었는데, 월미도의 행궁을 비롯한 터진개, 제물포, 성창포, 괭이부리, 호구포 등지에 설치된 포대 진지가 그것이다.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을 취해오던 당시의 조선정부는 개항자체를 부정하고 있었으나 부득이 개항한다 하더라도 서울의 지척에 위치한 서쪽 관문인 제물포를 개항장으로 선정되는 것은 막아야 하며, 개항을 막지 못한다면 일정기간 개항을 보류해보려고 했다. 이 시기에 제물포 일대에 설치된 해안 포대진지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도진 포대진지를 새로이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제물포 일대가 ‘보장중지’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 협상은 회담시작 20개월만인 1881년 2월 28일 (고종 18년)에 완전 타결되어 1883년 1월 1일을 기하여 제물포를 개항한다는 일본측의 주장에 동의하고 만다. 개항회담 타결 후 이를 반대하는 유림들의 격렬한 궐기가 이어졌지만 개항의 일정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제물포를 조선지배의 전진기지로, 나아가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삼으려는 일본의 집요한 요구와 협박을 당시의 한국 정부는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해문요충’이자 ‘보장중지’였던 인천은 일본의 협박에 의해 ‘물화적재’의 땅으로 바뀌어 제국주의의 공간으로 재영토화되는 길을 걷게 된다.
2. “쓸쓸한 한촌(滿目蕭條한 寒村)”
개항 무렵의 인천의 모습을 짐작 할 수 있는 객관적 사료들은 당시의 지도와 호구조사표, 그리고 회고담이다. 개항 무렵에 대한 회고는 주로 일본인과 서양인들에 의한 것이므로 당연히 그들의 눈에 비친 인천의 모습이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인천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한편 그들의 모습 또한 바라 볼 수 있다. 개항직전의 제물포의 모습에 대한 회고는 고따니 마찌로(小谷益次郞)가 책임 집필한 ꡔ인천부사ꡕ에 여러 개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쓸쓸한 한촌’이나 ‘완전히 황량한 어촌’이라는 표현으로 일관되어 있다.
당시(개항직전-필자주) 인천항은 완전히 황량한 하나의 寒村으로 겨우 현재의 영국영사관 문 아래 1丁 정도 되는 곳에 조선인 가옥이 10호뿐, 또 중국거류지 한강측 해안에 4, 5호 있을 뿐이고 물론 일본인들은 1명도 오지 않았다. 지금 본정의 뒤에 있는 대로 일대는 해안으로 해안거리가 된 부분은 물론 바다 속이었고, 창고와 나란히 있는 주변에는 포대진지가 있었고, 6, 7문의 대포가 붙어있었다. 6) - -히사미즈(久水三郞: 초대 영사)
마쓰시마(松島淸)를 비롯한 이들의 회고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황량한 한촌’이었던 제물포를 일본인들이 동양 굴지의 항구도시로 발전시켰다는 강한 자부심이다. 이러한 회고는 이후의 모든 기록에 인용되거나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한국인들도 이를 객관적 사료처럼 이용하고 있다. 제물포가 번화한 도시가 아니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사실이다. 제물포는 좁은 해안이었으므로 주민이 다수 거주하기 힘든 곳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기록만을 종합하더라도 제물포구에 15호, 북성포구에 4호, 월미도의 20여호가 도합 40여호 산재해 있었으므로 ‘무인의 산야’ 운운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지역을 조금만 넓힌다면 이 일대(제물포에서 우각현에 이르는 지역)에는 5-30여호로 이루어진 19개의 취락이 분포해 있었으므로 줄잡아 1,000여명에 달하는 주민이 대대로 농업이나 어업을 경영하며 살고 있었던 곳이다.7) 이들의 회고에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는 제물포구의 한적함이 인천부 전체가 그러한 것처럼 간주하거나 그렇게 여겨지도록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개항 이전의 제물포는 인천부 관할 10개면의 하나인 다소면에 위치한 4개의 포구, 즉 북성포, 제물포, 탁포(터진개), 성창포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이 식민주의자들의 의식 속에는 제물포의 해안 언덕이 원래의 인천인 것처럼 규정하고 옛 인천을 모두 ‘무인의 산야‘라고 말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다. 개항 과정에서 최소한 수 백 명이 원주민이 강제로 철거되었다는 사실이나, 옛 인천의 소외와 몰락을 은폐하면서, 자신들이 이른바 ’인천의 명예로운 파이오니어‘8)였다고 자처하려는 것이다. 즉 개항장 일대에 대한 식민정책이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인천의 역사가 아예 없거나, 초라한 모습으로 그려져야만 그들이 ’발견한‘ 땅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제가 조계지와 개항장부근만을 인천부로 설정한 데에는 행정상의 편의 뿐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갈등과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이다. 하나부사 일행이 임오년(1882년) 군인 봉기 때 인천 도호부가 위치한 관교동에서 관민의 피습을 당한 사건이나 1893년에 인천부의 관민들이 감리서를 습격한 이른바 ’인천민란‘을 상기할 때 이들이 옛 인천지역을 격리시킨 것은 현실적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될 것이다.9) 일제의 공간 정책에 의해 천년의 고도인 문학산지역을 비롯한 송림동, 논현동, 연수동 일대는 소외된 공간이 되고 말았다. 식민도시의 배후지역으로 변한 옛 인천의 땅들은 식민도시의 공간적 수요에 단계적으로 수용되어 해체되는 과정을 밟게되며 대부분 자신의 기억을 상실한 땅으로 되고 말았다.10)
3. “왜놈의 등쌀로 못살 곳”
제물포구를 중심으로 하여 급속히 변화한 인천은 개항(1883)이후 조계제도가 폐지되는 1913년에 이르기까지의 30년간은 완연한 식민도시였다. 우선 거주 인구의 절대수가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이었다. 인천인 가운데 한국인이 반수를 넘는 것은 1915년 무렵에 이르러서이다. 이 후 한국인의 숫자가 증가한 1914년의 도시 확장으로 인한 새로이 편입된 농촌지역의 인구수 증가에 힘입은 것이지 사실상 제물포 지역에서 일본인의 수적 우세는 1930년대까지 유지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천항이 국제적 항구 도시로 부상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상인11)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경우 대부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경작지를 잃은 경기도 일원의 소작농이나 유랑농민이었을 것이다.12) 토지로부터 분리된 이들은 도시에 몰려들어 노동자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삶을 영위하게 되었지만 제물포가 결코 ‘약속의 땅’이 될 수 없었다. 이들은 부두의 수출입 물자 하역업, 축항 공사장, 정미소를 비롯한, 각종 공장이나 객주의 일용노동자로 일하는 도시 빈민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제물포는 전국적으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고, 최하층 빈빈의 주거의 지표인 토막(土幕)의 숫자도 가장 높은 곳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인천살이는 실향이라는 정서적 고통이 추가되어 인천은 외형적 성장과는 전혀 다른 도시였다. 근대 민요 아리랑에는 이미 ‘왜놈의 등살로 못 살 곳’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천 제밀이13) 흥/ 살기는 좋아도 흥
왜놈의 등살에/ 못 살겠고나 흥 14)
일본인의 횡포는 비단 인천 뿐 아니었을 터이다. 인천의 경우 주민구성에서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점, 1910년 이전에 이미 인천의 경제나 행정을 비롯한 모든 권리를 일본이 독점하고 있었던 사실로 인하여 그 횡포가 극심한 지역이었다.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미곡중개인이나 정미업자들도 일본인들의 횡포로 인해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Ⅳ. 일제 강점기의 인천 풍경
1. 유랑과 이별의 공간
한편 인천이라는 도시는 근대 민요나 문학 작품 속에서 ‘이별의 장소’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항구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적 교통의 발전은 상품과 노동 인구의 신속한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인천은 개항 이후 급속히 성장하면서 인구의 사회적 증가가 대단히 높았다. 인천의 주민들은 일본인과 중국인을 독일인과 영국인과 같은 외국인들, 조선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과 노동자들로 이루어졌다. 국제교역 도시인 동시에 유민(流民)의 도시였다. 특히 조선인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일제가 식민지 자본주의의 기초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토지로부터 강제 ‘격리’된 빈농 출신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인천이라는 근대적 도시 공간은 물론 임금 노동자로서의 삶 자체도 생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
기차떠난 서울역에 검은 연기만 남아 있고
배가떠난 인천부두에 양사도 물길만 남아 있고
임이 떠난 내가슴에 한숨 눈물만 남아 있네15)
인천은 고향을 떠난 유민들이 유입되는 도시인 동시에 일제의 압제를 피해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생활고로 인해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인천을 떠난 하와이 노동이민은 7천 여 명에 달하는데, 이중 상당수가 인천출신이었다.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 도착한 한국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에 저임금(1일 10시간 노동에 69센트)을 받으며 노예와 같은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노예무역과 같은 이민자 모집은 선교사나 외국 상인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알렌(Allen: 당시 주한 미국공사)과 데실러(Deshler: 미국인 광산업자) 그리고 선교사 존스(Jonse)는 대표적인 이민 모집자들이었다. 16) 이들의 감언이설은 고향을 떠나 도시에 몰려온 농촌 유민들을 다시는 돌아오기 어려운 이국으로 내몬 결과를 낳았다. 인천항을 떠난 하와이 이민들은 현지의 농장주들에게 채찍을 맞으며, 이름 대신 이민등록번호로 불리며 혹독한 노동을 하며 짐승 우리 같은 곳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다음 노래는 생활고로 인해 인천항의 노동이민선에 올라 이역으로 떠나야만 했던 이민들의 ‘망향가’이다.
흉흉한 저 파도 내 고향 말이/ 나의 돌아갈 길 망연하고나/
금수 강산 내 집 화려한 반도/ 오죽 너는 나의 고향이로다.
사랑스런 내 집 삼천리 강산/ 너의 깊은 애정 적지 안코나/
너를 일찍 떠난 이내 몸 언제 / 다시 한 번 찾아 회포를 풀까.(후렴)
인천의 정서는 한국의 근대시인들의 작품에 그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정지용은 그의 시 「슬픈 인상화」(1926)에서 인천항을 ‘침울하게 울려오는/ 축항의 기적 소리’와 ‘이국정조로 퍼덕이는/ 세관의 깃발’로 감각화하고, 상해로 떠나는 동료들을 전송하는 화자의 슬픈 목소리를 담은 바 있다. 박팔양은 인천항을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낳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곳이라고 보았다. 그는 “당신네들 고향이 어데시오? /우리는 경상도, 우리는 산동성” 이라는 구절을 통해 인천이 ‘코스모폴리탄’ 과 고향 잃은 사람들의 도시임을 형상화하였다.
2. 관광도시 인천
개항 50년을 맞는 1920년대의 인천은 성장을 거듭하여 인구 4만의 항구도시로 무역액이 1억원을 상회하게 된다. 급성장하는 항구도시였던 인천은 한편 근대적 문물의 전시장처럼 여겨졌다. 축항시설과 경인철도, 인천우체국과 인천부청, 측후소 등의 각종 근대적 공공 건축물, 존스톤 별장(인천각)을 비롯한 응봉산 정상과 산록에 자리잡은 각국 영사관과 별장들, 조계지의 이국적 건축물들은 그 자체로 관광 대상이었으며, 용동 일대의 유흥가와 상가, 근대식 공원인 만국공원과 월미도 역시 방문객들의 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근대적 위락시설을 갖춘 월미도는 당시 ‘조선의 명소’로 알려져 있었다. 월미도는 만주철도주식회사가 경영하는 해수욕장, 월미도 유원회사가 경영하는 해수풀장, 조탕, 유흥 음식점인 용궁각, 임해 학교, 호텔과 여관등의 호화 시설이 갖추어진 관광지였다. 철도와 해상교통의 발전, 그리고 도시화라는 근대가 낳은 산물이다. 일제 강점기에 외지인들이 쓴 인천 방문기나 신문기사중 대부분이 월미도 관광 소감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월미도 관광지 개발이후 인천이라는 도시적 이미지에 근대 관광도시로서의 성격이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17) 그러나 이 풍치 좋고 호화로운 관광지가 궁핍한 한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비감스럽게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태준의 소설 「밤길」은 관광지 월미도가 갖는 명암의 극명한 대립을 보여준 작품이다. 관광지 월미도에 대한 당시의 수필이나 신문기사가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인 어조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월미도의 고급 유흥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관광객은 부유한 일본인들이나 중산층이었다. 관광도시의 북쪽에 한국인들의 거주지인 북촌의 을씨년스런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당시 한국인의 주거는 대부분 토막이거나 불량주택이었다. 인천은 불량주택의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1942년의 통계를 보면 4만가구 중 약 2천 가구(1만명)은 토막이나 불량주택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경인철도 북쪽에 주로 거주했던 도시 빈민들은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에도 급급했다. 당시의 인천 빈민들의 생활상은 뒷날 현덕의 소설 「남생이」에 핍진하게 묘사된 바 있다. 도아일보에 게재된 시 「나의 집! 나의 살이」에는 당시 토막에 거주하던 인천인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겨 있다.
나의 집! 나의 살이!/일어서면 키는 천장에 닿고 /누우면 발은 기슭 밖으로 나아가는/대청이라고 서편으로 놓인 쪽마루/누워도 앉아도 서도 눈위에 반짝이는 별/가려도 막아도 써도 터럭에 부딪히는 바람/모두 쳐야 사방 두 칸도 못되는 터전/세간이라고는 침대 겸한 맞춰 놓은 두 개의 벤치/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는 단 두 벌의 두루마기/ (하략) -인천방황생, 「나의 집! 나의 살이!」18)
이러한 빈민지구는 ‘북촌’이라고 불리는 화평리 일대에서 송림동에 이르는 구릉지대에 펼쳐져 있었다. 본래 인천인들은 각국 거류지의 동탁포(東坼浦), 답동, 용동, 화개동, 화도동(花島洞), 평동(화평동), 만석동 등지에 흩어져 살다가 일인 거류지의 膨脹으로 탁포, 답동 등의 삶터를 빼앗기고 응봉산 너머 축현리나 화평리 근처로 옮겨왔다. 이로부터 경성가도는 물론 신화수리(新花水里)의 일대는 수년만에 수백호나 증가되고 다시 각지 농촌으로부터 소작권을 빼앗기거나 각 도시로부터 일인(日人)에게는 상권을 피탈(被奪)당한 유민들이 생존권을 부지할 수 없어서 정착하기 시작한 곳이다. 이들이 지금의 송현리, 송림리 등의 산자락에 토막이나 움집을 짓고 거주하는 모습은 일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촌의 번성과 대비되면서, 보는 이들마다 울분을 머금게 하였던 곳이다. 인천시가지는 일제하에 있는 조선의 운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축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3. 쌀의 도시에서 武器의 도시로
1930년대 초반까지 인천은 ‘쌀의 도시'였다. 도시의 주요 공업시설은 정미공장이었고 미두의 수집에 종사하는 상인도 많았다. 항구는 조선 각지에서 수집된 쌀과 콩으로 가득했고 쌀가마니를 선적하는 부두 노동자들의 붐볐다. 미두장부근에는 미두 투기꾼들 서성대고 있었다. 이처럼 쌀은 곧 인천 경제였다. 당시의 모든 신문은 인천의 쌀 시세의 등락을 고정 기사로 다루고 있으며 신문기자들은 미곡시제 파악을 위해 인천에 상주하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인천은 본격적인 군국주의 일본의 병참기지로 탈바꿈하면서 상업과 무역도시에서 공업도시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물론 30년대 이전에도 정미소를 비롯한 각종 소비재 생산하는 공장들이 가동되었지만, 이 시기부터 각종 무기의 생산과 이에 필요한 대규모의 철강, 화학 공장이 1937년도부터 1940년에 이르는 기간 집중적으로 세워지게 된다. 전쟁수행에 필요한 무기류들은 주로 부평의 ‘인천육군병기공창’(조병창), ‘조선기계제작소’등을 비롯한 군수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이 무렵 인천인구는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여 30년대 초 6만여명에 머물러 있던 도시 인구가 43년에는 25만명에 달하게 된다. 이들 역시 경기도 일원과 전국 각도에서 유입된 이농들이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선이 급격히 확대되고 군수물자 생산에 차질이 발생하자, 일제는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인천의 부녀자와 학생들을 ‘정신대’ 혹은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총동원하여 군수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하도록 강요했다. 인천은 항구도시이자 상업 도시로 출발하여, 곡물수출과 가공이 우세한 ‘쌀의 도시’에서 30년대로 되면서 전쟁물자와 무기류를 생산하는 병참 기지, ‘무기의 도시’로 바뀐 셈이다. 19)
4. 아름다운 항구도시와 ‘모던’의 전시장
인천에 대한 30년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상업, 근대적 교통, 근대적 관광, 여가(공원, 조계지역 자체가 이국적 경관을 가진 관광의 대상, 해수욕장, 조탕, 용궁각, 까페와 유흥업소, 유곽, 외식문화)가 주로 언급되고 있다. 독특하게 경관을 가진 근대 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였던 김기림은 연작시 「제물포 풍경」과 같은 인천시편을 남겼다. 그의 시 「밤항구」에서 인천항은 ‘부끄럼 많은 보석장사 아가씨’라는 은유로 나타난다.
부끄럼 많은 보석장사 아가씨
어둠속에 숨어서야
루비 싸파이어 에머랄드.......
그의 보석 바구니를 살그머니 뒤집니다. -「밤항구」20)
김기림이 인천항을 ‘보석장사 아가씨’라고 노래한 것은, 인천을 신비롭고 매력과 정취를 지닌 도시로 보았다는 것이며 그 매력은 밤에 더욱 빛난다고 여긴 것이다. 그가 찾고자 한 ‘루비’와 ‘싸파이어’는 인천만이 가진 독특한 풍경과 정서였을 것이다. ‘근대문명의 형태와 성격을 문명 안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모더니스트임을 감안한다면 인천이야말로 근대문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인천을 ‘보석장사’에 빗댄 것은 그만큼 이 도시가 그에게 소중한 탐구 대상이었음을 알려 주는 작품이다.
「인천의 모던 漫評」은 1930년대 인천의 도시 풍경을 ‘모던'의 관점에서 관찰한 유희적 성격의 수필이다. 당시의 인천인들은 ‘모던’을 ‘최신최첨단의 시설과 서비스’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계몽기에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개화’ ‘문화’ ‘서구’와 같은 말이 함축하고 있던 중요한 의미가 ‘모던’이라는 말에 전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암은 ‘모던‘이 규모가 ‘큰 것’보다는 ‘작고 아담한 것’이 모던에 가깝다고 보았다. 필자가 열거하는 인천의 모던 건축은 레스토랑 <동양헌> ,<인천각>, 만국공원 주변에 신축한 ‘문화주택’(서양식 건축물들)등이다. 그 외에 당시 새로운 시설과 서비스로 영업을 하고 있던 잡화점과 양복점, 가구점, 안경점, 주점, 병원, 약국, 여관, 문방구점, 이발관, 목욕탕 등을 들고 있다. ‘오례당’ 별장 같은 건축을 이미 ‘옛날의 모던’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재래식 가구를 새롭게 장식하여 만들고 있는 개량형 전통가구들도 ‘모던’한 것으로 본보고 있다. 그는 인천이라는 도시 전체를 ‘모던’한 공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5. 기계도시와 풍차도시
해방 후 인천은 분단과 한국전쟁의 참화를 가장 참혹하게 겪어야 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월미도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이 오하마 해변에 퍼부은 포탄수 만큼의 포격이 작은 섬에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로 이름났던 월미도는 “섬전체가 면도날로 깍아 낸 것”처럼 변했고, 뒤이은 시가지 전투로 인해 만국공원 정상의 세창양행 사옥이나 인천의 랜드 마크였던 죤스톤 별장같은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한국전쟁은 근대 문명의 국내발신지였던 인천을 철저히 파괴했다. 인천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전쟁보다 분단상태의 지속이었다. 북한지역과 중국 교역이 중단 됨으로써 인천항은 국제 교역항의 기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되자 도시 전체도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엇다. 바다길이 막히면서 국제항의 기능을 일거에 상실한 인천은 서울의 변두리로 전락하였으며, 70년대에 들어 부평공단이나 주안수출공단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공단도시로 변모한다. 조세희의 연작 소설 ꡔ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ꡕ의 주요한 배경은 인천을 모델로 한 ‘은강시’라는 도시이다. 소설 속의 은강시는 썩은 바다로 둘러싸인 황폐한 도시이며, ‘난장이(민중)’들의 피와 땀만을 요구하는 비정한 도시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도시를 ‘기계도시’라고 이름지었다. 이 소설은 동화적환상적 문체로 씌여졌지만, 배경이 되고 있는 은강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사실적이다. 한편 소설가 윤후명은 인천의 땅이 ‘풍차 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21) “주안지역을 중심으로 북서쪽의 본디 중심 지역. 북동쪽의 부평지역, 남서쪽의 송도지역, 남동쪽의 남동지역”이 마치 풍차의 날개처럼 펼쳐진 도시라는 것이다. 광역시가 되기 전인 1980년대 초의 인천의 도시 공간이 불연속적으로 분할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인천의 공간이 풍차의 날개처럼 나뉘어져 도시의 공간적 구심이 없다는 것과, 인천이 풍차처럼 끊임없이 바람(외풍, 외세)과 맞서 왔던 도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90년을 기점으로, 삭막한 ‘기계도시’, 구심을 찾지 못하고 돌고 있는 ‘풍차도시’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중국과의 경제교류가 시작되면서 폐쇄된 황해의 바닷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직 불안스럽긴 하나 북한과의 교류도 시작되고 있다. 인천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또 다른 사건은 인천국제공항의 개항이다. 1600여년 전 개항했던 국제 교역항 능허대(凌虛臺)의 의미는 ‘虛空의 克服’(beyond space)’이다. 국제항구 기능을 찾고 새로이 국제공항이 개항됨으로써 송도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능허대터는 마치 선인들이 남긴 예언인 듯하다.
Ⅴ. 맺음말
개항장 제물포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도시였다. 인종전시장이자 외국선박의 정박처이며 외국상품의 진열장이었다. 언어의 혼합이 이루어지는 곳이고22) 풍속과 유행의 전파가 시작되는 곳이다. 제물포는 땅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치외법권지역이었으며 외세침투의 전진기지였다. 전통문화가 급속히 붕괴되는 공간이며 인구의 유동과 신흥도시 특유의 익명성으로 인해 범죄와 질병, 화재와 같은 불안요인도 함께 증가하는 공간이다. 이로 인하여 인천의 이미지 역시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된다. 식민주의자들은 인천을 ‘황무지’였다고 기술하였고, 선교사들은 의해 ‘돌짝밭’으로 비유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식민주의자나 서양인들에겐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대조 기표’이었지만 인천인들의 의식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근대 인천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수탈 정책의 희생자들인 전국 각지의 유이민이 유입되어 이루어진 도시였다. 초기의 인천인들은 대부분 낯선 질서에 편입되어 최하층민으로서 고통스런 삶을 영위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은 ‘왜놈의 등쌀로 못살 곳’으로 여겨졌으며 많은 한국인들에게 인천은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도시로 인식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인천은 이국적이고 근대적인 도시경관, 인공적으로 조성된 월미도 유원지로 인해 도시 전체가 관광명소가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근대도시로서의 성장과 함께 식민도시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어 도시빈민들의 궁핍상이 도시의 중요한 이미지로 나타나게 된다. 인천지방의 식민 역사는 사실상 1883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1945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62년이나 되는 기간에 걸쳐 있다. 이 기간 동안 인천인은 도시 공간의 배치를 비롯한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사실상 무권리 상태에 있었다. 인천인은 경기도 일원과 전국각지로부터 전입한 노동자와 상인들로 이루어 졌는데 이들은 대부분 부두와, 정미소, 군수공장 등의 노동자로서 최하층 계급으로 생활을 영위하며 살아 왔다. 인천의 외형적 발전이 인천인들의 삶의 향상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삶의 위협이 되었으므로 긍정적 장소의식(정주의식)을 갖기 어려웠다. 기록에 나타난 인천 의식만을 검토한다면, 한국인들이 인천을 대부분 부정적이거나 이중적으로 인식해왔음에 비해 인천을 자랑스러운 도시로 생각한 것은 오히려 일본인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적막한 어촌’을 동아시아 유수의 항구도시로 성장시킨 주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천의 도시적 기능과 성격, 그리고 행정구역의 개편도 급격히 변화해 왔다. 개항이후 1910년대까지는 항구도시로 기능하면서, 쌀을 비롯한 곡물의 가공과 중개업과 경공업 중심의 도시였다. 20년대를 전후해서는 상업도시로서의 기능이 추가되었고, 30년대부터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병참기지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항구도시에서 ‘쌀의 도시’로, 다시 ‘무기의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인천인들은 진정한 인천의 주인이 되기 어려웠으며 삶의 지속성을 갖기 어렸웠다. 이러한 변화는 인천인들의 심성에 심각한 혼란을 주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의식중의 하나는 ‘불모지 의식’이다. 최근에 빈번히 지적하고 있는 인천의 ‘문화 불모성’은 이미 80여 년 전부터 거듭 지적돼 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시의 지배자들이 느낀 생각이 아니었으므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의미 있는 노력이 기울여지지 못했으며, 해방 이후에 인천은 ‘수도권’이라는 공간 개념 설정은 인해 도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도시의 중심부재 현상과 ‘주인 없는 도시’ 현상이 그것이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 대안을 수립하는 일이 21세기 인천을 기획하는데 가장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인천인과 인천의 공간에 깊이 새겨져 있는 식민의 잔재,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시가지 곳곳에 남아 시민들의 무의식을 긴장시키는 군사 시설과 냉전 시대의 기념물들, 자의와 타의에 의해 규정된 서울의 변방의식 등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다양한 각도의 검토를 통해 청산되어야 할 것과 계승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인천은 도시 기능의 변화, 다양한 주민의 구성, 그리고 공간의 급격한 변동(확장)을 경험하면서 변화해온 도시이다. 인천의 다양성은 도시 이미지의 다양성으로 외화되어 있다. 단일 정체성에 대한 강박증을 버리고 다양성을 소중한 문화적 자산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급격한 근대사의 격랑을 헤쳐온 인천인들에게 전통적인 ‘향토애’가 발심하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격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산업화된 근대 도시의 일반적 현상이기도 특히 인천의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또 전출한다. 인천은 내륙 깊숙이 자리한 전통도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가운데 활력을 얻는 교통도시이기 때문이다. 인천의 도시적 인프라는 항구와 공항을 통한 사람과 물자들의 흐름을 더욱 원활하게 만들어야 하고 도시의 문화 역시 그에 걸맞게 역동적 아이디어에 의해 구상되어야 한다. 다양성과 잡종성 그리고 가변성이야말로 인천과 인천인의 체질임을 재확인하고 그것이 가진 개방성과 발랄함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극대화하면서 자연스레 삶터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물을 의미하는 고대어 ‘미’의 흔적은 ‘미역’(물+여뀌)과 같은 우리 고유어나 일본어 ‘みす’등에 남아 있다.
2) 이점과 관련하여 미추홀의 위치를 ‘문학산성’이라고 구체화하는 것은 성급한 단정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예: 인천 광역시 홈페이지) 역사학계에서 미추홀 위치를 둘러싸고 논의는 아직 진행중이지만 ꡔ輿地圖書ꡕ와 ꡔ東史綱目ꡕ등의 문헌기록에 의거한 文鶴山 說은 고고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정되고 있다. 산 정상에 도읍을 정한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백제의 성곽은 몽촌토성처럼 대부분 平地에 土城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문학산성은 山城인데다 石城으로 백제초기의 성으로 보기 어렵다. 미추홀의 중심지는 현재로서는 관교동과 소래산 사이의 평지나 얕은 구릉지대중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는 곳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3) ꡔ三國史記ꡕ 卷23. 百濟本紀 1. 溫祚王 元年條
4) 비류(沸流) 집단은 압록강의 지류인 비류강 일대에서 수상활동을 하면서 고구려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부족이었지만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한반도로 망명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비류강은 지금의 훈짱(渾江)이다.
5) 박찬규, 「백제의 성장과 서남해안 진출」,ꡔ인천공간읽기ꡕ,(인천문화정책연구소, 1999).p.6.
6) ꡔ仁川府史ꡕ,p.116-7.
7) 제물포에 15호, 북성포에 4호의 민가가, 월미도에 20여호의 어촌이 있었던 곳이었다. 화도진의 큰 취락, 배다리 부근에 3~4개의 촌락, 다소면 소재지인 율목리에도 큰 규모의 농경취락이 있었으므로 다소면의 우각현 서쪽 반도에 산재한 약 19개의 취락에 적어도 200호(약1,00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이지역 최대의 취락으로 여겨지는 송림리의 호수가 밝혀진다면 이 거주인구는 2,000인을 넘을 수도 있다. -최영준,ꡔ국토와 민족 생활사ꡕ(한길사,1997),p 410. 참조.
8) ꡔ인천부사ꡕ.p.116에서 편집자는 게이따(慶田利)를 ‘인천의 개척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불부르고 있다.
9) 임오년(1882) 군인 봉기 때 인천으로 도피한 하나 부사 일행은 관교동의 인천부청사에 머물고 있던 중 조선 군인들의 습격을 받아 6명이 죽고 상당수가 부상당한채 간신히 월미도를 통해 해상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인천에서의 사건을 이들은 양국 군대간의 교전행위로 간주하고 ꡔ仁川府史ꡕ에 그 경위를 자세히 싣고 있다. -ꡔ仁川府史ꡕ.pp.315-336. 참조
개항후인 1893년 인천부의 이교병민(吏校兵民) 수백명이 감리서를 습격한 ‘인천민란(仁川民亂)’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역시 옛 인천부를 중심으로 한 관리와 민중들이 개항장 일대와 일본인들에대한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高宗實錄」 참조
10) 땅의 역사는 지명속에 기억되어 있는데 인천의 많은 장소들은 그 본디 이름을 상실하고 있다. ‘동인천’, ‘하인천’, ‘상인천’ 등은 그 기준 위치가 어디인지 불분명한 지역 명칭이고, ‘제물포역’의 경우도 작명의 근거가 없다.
11) 개항초기에 활동한 상인들들 모두 외지인은 아니었다. 박원선은 그들 중 일부는 개항이전부터 성창포 일대(만석동)에서 집결하여 활동하던 객주들이었다고 한다.- 박원선,ꡔ객주ꡕ(연세대 출판부,1968). 참조
12) 개항후 인천의 주민들의 출신지 별 분포를 外洞 지역의 戶籍을 검토한 결과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21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울(21), 동래(7),의주(6), 부평(5), 인천(3), 홍천,수원, 강화 (각2), 성흥,시흥,철원,안산,평양,통진,해주,수성,전주,괴산,양주,진주,개성(각1)로 이루어져 있었다. 외동지역은 당시로선 일정규모 이상의 상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임을 참고로 한다면 초기 인천 형성사의 개략적인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성ꡔ한국근대상업도시연구ꡕ(국학자료원1998).pp.45-6.참조
13) 제물포는 당시에 ‘제밀이’ 혹은 ‘제미리’로 불렀다.
14) 成慶麟張師勛 共編,ꡔ朝鮮의 民謠ꡕ(國際音樂文化社,1949).p.95.
15) ꡔ朝鮮民謠集成ꡕ(1948)
16) 기독교 선교사들의 행위를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사무역 행위와 각종 중개역할은 당시 선교사들의 일반적 행태였음을 감안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17) 김윤경의 「인천원족기」(ꡔ청춘ꡕ, 1918. 9. 1), 신문기자들이 쓴 「월미도의 일야」(동아일보,1923.8.12), 「인천월미도 천막촌에서」(동아일보,1931.82), 「봄의 월미도」(동아 1935. 5.4)를 비롯한 엄흥섭의 ꡔ해방항시」(ꡔ월미ꡕ 창간호,1937.1)은 월미도의 풍광과 관광시설들을 다루고 있는 글이다.
18) ꡔ동아일보ꡕ 1921.4.21.
19) 인천시립박물관 마당에 전시된 동종과 불상 역시 인천이 무기의 도시였음을 상기시켜주는 유물이다. 이들 유물은 본래 부평의 조병창에서 총포류를 제작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전국의 사찰에서 징발한 것으로 해방이 되면서 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이다.
20) 김기림,ꡔ太陽의 風俗ꡕ(학예사,1939).p.74.
21)뿌리깊은 나무, ꡔ한국의 발견/한반도와 한국사람 ꡕ경기도편, 1983.p.234.
22) ‘담손이 상회(陀雲仙)'(←Townsend & Co), 함릉가 상회(← Home Ringer & Co), '약대인병원(藥大人病院)“(←성 누가 병원의 속칭, 약대인은 Landis:南得時 원장의 존칭)등에 나타난 외국인의 인명과 외국인 상사 명칭이 언어 혼합의 양상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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