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2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3 19:26:06
인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2
인천은 살아 있는 근대사 박물관이다
터진개문화마당황금가지.
개항장역사문화연구소. 대표 이 종복
1. 들머리 글
소래산을 꼭두머리로 해서 관모산, 상아산, 만월산(주안산), 철마산, 계양산 등으로 이어지는 산의 꼭지점들을 점점이 이어서 보면, 백두대간의 굳센 근육들이 인천이라는 도시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뻗어 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백두대간의 기운이 녹녹히 서린 땅에서는 사람이 살기에도 좋고 또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고 합니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 인천 지역에 살았던 선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일백여기 고인돌 문화의 주인공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증거가 됩니다. 오늘날과 같은 문자의 활용이 활성화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단지 추론할 따름이지만, 그 규모와 위세를 더듬어 보면,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강력한 지배 구조 아래 세워졌으리라는 추측들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들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부터, 우리는 선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통하여 많은 인천의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추홀 왕국을 세운 비류왕을 위시해서 인천(또는 인주) 이 씨의 시조인 이허겸, 그의 자손인 이자겸 그리고 고려 왕가의 5명의 왕(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의 어머니, 5명의 왕(문종, 순종, 선종, 예종, 인종)의 왕비들은 역사의 기록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인천의 인물들입니다. 이 외에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인천 사람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지면의 제한을 핑계 삼아 조선 시대까지의 인물들은 여기에서 일단락을 맺어봅니다.
근대시기로 넘어가 보면, 어두웠던 시대였던 만큼 더욱 더 많은 빼어난 인물들이 시대의 등불로써 우뚝 서 있었음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인천 한세기’의 저자 신태범 박사의 아버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 ‘광제호’의 함장 신순성. 장면, 장발, 장극 삼 형제 박사를 배출했으며 개항 당시에 인천 해관에서 통역 업무와 당시에 척박했던 영어교육의 현장에서 열정을 쏟아 부었던 장기빈. 오늘날까지 3대를 잇는 한의원(대제한의원)을 펼치게 했고, 초창기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의 조합을 결성했으며 또한 인천 권번(券番)의 기생들에게 학문과 기예를 가르친 김태진 원장의 할아버지 취은 김병훈. 약소국가의 힘의 배양은 교육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주창하며 사립 ‘제녕학교’를 세운 서상빈. 점자책 ‘훈맹정음’을 새로이 제창, 앞 못 보고 살아가던 시각 장애인들에게 빛이 되어주어 일명, 시각 장애인들의 세종대왕으로 받들어지는 송암 박두성. 인천 우체국의 초대 국장으로 취임했으며 당시의 청소년을 중심으로 ‘소년 척후단’을 결성하여 민족의식을 드높인 월남 이상재와 단장으로 취임한 곽상훈 등은 암울했던 근대시대에 인천의 등불로써 귀감이 되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분들 이 외에도 여성 야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박창례, 이옥녀. 인천 최초로 선박회사 ‘이운사’를 세운 민영준, 우경선. 민비 시해범을 살해하고 인천 감옥소(인천 감리서 내)에 수감됐던 김창수(백범 김구의 본명)를 도왔으며, 민족 자본의 형성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천 객주회’. 관립 인천항 외국인 학교 교장 강화석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치 훌륭한 업적을 쌓은 많은 분들이 인천을 빛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천은 백두대간의 힘 찬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곳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2. 인천의 지리적 환경
땅의 모양새로 보면, 인천은 한 덩어리지만 소담스럽게 이어진 산맥을 중점으로 두 개의 큰 축. 부평과 인천이라는 지역이 사이좋게 나뉘어져 있음을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산맥의 지세는 바다를 향해 활시위를 잡아당긴 모양을 그려낸 듯, 커다란 포물선 바깥은 오밀조밀한 주택들이 들어차 있으며, 비교적 도로의 정비가 잘 돼 보이는 곳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천이고요. 드넓게 일궈낸 대지를 계양산의 억센 팔뚝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은 듯이 보이는 땅. 초고층 아파트 군락과 대비되어 보이는 낮은 집들, 그리고 정갈한 논들이 바둑판처럼 성글어 있는 곳이 인천 속의 또 다른 인천인 부평입니다.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눠져 있는 대칭축에서 지세의 정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또 다시 남쪽 방향으로 상서롭지 않게 서려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곳이 바로 문학산 일대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세분화해서 땅 모양을 설명하면 문학산을 중심으로 연경산, 노적산 그리고 청량산 인근으로 이어지는 산세와, ‘먼우금’ 또는 ‘원우이’로 불려지는 연수동 일대로 다시 나눠볼 수 있는데, 이 일대를 이름 하여 인천 안에서도 옛 인천으로 불리어져 ‘원인천(原仁川)’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인천의 땅 모양새를 세심히 살펴보면, 크고 작은 세 덩어리로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세 지역은 서로 다른 생소한 정서를 자아내어 자못 이질감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으로 보여져 외형상의 불안전구조의 모습을 띈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광역의 인천을 의도적으로 편 가르거나 기형적인 구조를 지닌 공간이라고 평가하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교훈과 사실감 넘치듯 흥미진진하게 살아온 선인들의 삶의 현장들, 그 역사의 향기가 절절이 흐르는 인천 땅을 꼼꼼히 되짚어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과연 인천의 어떠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3. 인천의 인문학적 환경-1
오늘 우리가 만나는 근대 시기의 개항장 일대는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절체절명의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낸 곳입니다. 앞서 거론했던 바와 같이 인천 안에서도 세 지역의 역사 및 문화 대별론은 어느 정도 공론화 된 이야기로서, 개항장 일대를 제외하고는 인천의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의 왕성한 연구가 펼쳐졌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항장 지역. 엄밀하게 말하면 근대 시기의 개항장 지역은, 인천이라는 이름이 근대 역사의 무대를 통하여 학자들 간에 재조명될 무렵 이전에는 연구 실적이 미미했거나 외국과 일본인들의 자료를 정리하는 데에 불과한 수준이었습니다. 100여 년 전에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을 통하여 인천의 모습을 묘사했던 영국의 여류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표현한 대로 그야말로 “낡고 한적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정주 인구조차 많지 않았고 지방으로써의 용도보다는 변방의 개념으로써, 거의 전략적이고 전시의 방어 개념으로써 조성되었던 이유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8세기 조선 정부가 발행한 ‘해동지도’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인천은 진지(鎭地)의 개념으로써 제물진(濟物鎭)이라 불렸고, 삼남 지방의 세곡을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써 제물포(濟物浦) 또는 제물량(濟物梁)으로 불려지기도 했던 곳입니다. 이러한 용도에 비추어 보아 인천은 세곡의 운송과 군사적 목적을 지닌, 다분히 정부용으로 맞춰진 채 외부와는 비교적 부자유스러운 관계성을 지녔던 공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인천의 인문학적 환경-2
어쨌든 과거의 개항장 지역은 의도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오늘날의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18~ 19세기 무렵. 조선의 개항에 대한 국제적 압력과 서양 열강들의 잇따른 무력시위가 이어지던 시기에 러시아,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 제국주의와 일본 군국주의는 자국의 경제, 정치, 군사적 팽창주의 정책에 따라 약소국들을 유린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저들의 희생양 중의 일부로써 조선은 “동방의 금 쪽들이 흘러넘치는 처녀지”같은 곳으로 보여 지기도 했었습니다. 어쨌거나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의 체결 과정 속에서 인천은 저들의 손아귀에 쉽사리 쥐어졌고, 열강들의 영사관 및 무역회사의 발 빠른 설치에 따라 그 외형이 순식간에 변하게 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일본, 중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들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인천 안에는 각 나라의 ‘지계’가 설정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이들은 완전한 ‘치외법권’적 자치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경제적으로도 대외 무역의 비주류로 전락한 조선정부는 열강들에게 몸을 의탁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하부 노동구조(헐값의 노동)와 약소국의 악순환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의 산물들은 헐값에 팔아넘기다시피 하여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갔으며, 이와 맞물려 정치적 갈등의 첨예로 치닫게 되어 결국에는 나라마저 빼앗기고 마는 형국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천 특히, 개항장 지역은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도시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흔적들은 개항장 지역 어느 곳에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는 근대 건축물들. 근대 개항 초기부터 지어졌거나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 건축물들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치욕적인 역사의 단면일 수도 있으나, 역으로 보면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한 시류를 풍미했던 인천의 역사와 한국 근대사의 형성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자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어찌 되었든 우리의 현실이고 또한 미래 역사를 짊어지고 가야할 오늘의 과제임에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5. 현대사의 통로, 인천
당시에 만들어진 건축물 가운데에는 아직까지 현존하거나,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은데, 쓰임새에 따라 몇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보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열강들의 행적, 나아가 인천이 어떻게 변모되어 갔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일본영사관을 필두로 해서 청국 영사관, 러시아 영사관, 독일 영사관, 영국 영사관 등의 관청.
둘째. 일본 18은행, 58은행, 조선은행(제1은행) 등의 금융기관.
셋째. 내리교회, 성공회, 답동성당, 동본원사, 묘각사(서본원사), 인천신사 등의 교회 시설.
네 째. 심상 욱 소학교(신흥 초등학교), 창영 초등학교, 영화 초등학교, 박문 초등학교, 여 선교사 기숙사 등의 교육시설.
다섯 째. 세창 양행(독일계), 홈링거 양행(영국계), 담손이 양행(미국계 타운젠드), 미두 취인점, 해관(이후 세관으로 바뀜), 일선 상선 주식회사, 일본 우선 주식회사, 중국인 점포 주택, 대불호텔(중화루), 해리스 호텔, 애관극장(협률사), 표관, 가부기좌, 인천좌 등의 상업시설.
여섯 째. 외국인 묘지, 기상대, 제물포 구락부, 인천 우체국, 웃터골 운동장(제물포 고교), 공회당, 만국공원 등의 공공시설.
일곱 째. 홍예문, 월미도 축방(연륙교), 축항(도크) 등의 축조물.
여덟 째. 일본제분(이후 대한제분으로 바뀜), 일본철강(동국제강과 INI스틸 일대), 스탠더드 석유주식회사(월미도 군부대) 등의 산업기반 시설.
아홉 째. 세창양행 사택, 쉬르바움 주택, 모오스 저택, 헨켈 저택, 데쉴러 주택(大是羅), 제임스 존스톤 별장(일명 인천각), 닥터 호레이스 알렌 별장, 사토오(濟藤)별장, 여 씨(呂 氏) 주택, 오례당(吳禮堂) 저택 등 인천에 거주했던 외국인들의 독특한 서양식 주거시설.
열 번째. 약대인(藥大人) 병원(일명 성루가 병원), 일본 부립 인천병원, 해성병원(답동 천주교) 등의 병원 시설들이 개항장 일대에 포진해 있었으니, 가히 서양의 건축물들을 인천에 옮겨놓은 “동양의 베니스”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제반 건축물들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현재에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고, 일부는 훼손된 채 흔적만 남아 있거나 그 흔적을 유추해 낼 수 있는 터만 있을 뿐, 현존 상태는 매우 나쁜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다다르게 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동족 간에 치른 한국전쟁 특히 인천 상륙작전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음을 다 함께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인천의 근대 개항장 일대의 형성과정과 건축물에 대해서 설명 들음으로써, 1883년 개항당시부터 어떻게 변화해 갔으며 어떠한 상황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근대 문화의 태동과 서양문화의 접목 등을 아우르는 일대의 문화 대 충돌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부록 1. <참고자료> 2006년 2월 현재
인천 근대 건축물 조사표 (조사자: 이종복)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옛 인천 경찰서 |
주 소 | 인천 중구 중앙동 3가 5번지 |
용 도(현재) | 관청건물 (신축 이전) |
구 조 | 목조 |
규 모 | 지상 2층(170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84년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1884년 일본 영사관 내 인천 소방 상비대 설치 |
인천부사에 수록 | |
건축물 현재 명칭 | 인천 광역시 중구청 본관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부 청사(일본 영사관) |
주 소 | 인천 중구 관동 1가 9번지 |
용 도(현재) | 관청건물 |
구 조 | 목조(실내 대리석 화강암=계단 등) |
규 모 | 지상 2층(구조변경 현재 3층) |
설계 및 시공 년도 | 1882 |
준공 년도 | 1883년 10월 31일 |
외 관 | 좌우대칭 지붕, 일본식 기와 이음, 발코니 |
양 식 | 외양풍의 르네상스 |
연 혁 및 비 고 | 1883~ 1906년 인천주재 일본영사관 본관(양풍 목조 2층) |
1906~ 1910년 인천 이사청 | |
1910~ 1932년 인천부청 | |
1933년부터 현재의 모습(중구청 본관으로 사용) | |
*1933년 신축(표지석)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현재 마사회 건물 터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세창 양행(카알 월터 상사) |
주 소 | 인천 중구 중앙동 3가 4번지 |
용 도(현재) | 상업건축 (소실)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1층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84년 |
외 관 | |
양 식 | 한, 양 절충식 |
연 혁 | 뒤뜰 돌계단에 1884 HCEM이라고 조각된 석표 |
군부에 징발. 미용실, 병원 등으로 사용 됨 | |
*한국전쟁 때 폭격 당함. | |
*1차 세계대전 여파 적산 처리됨 |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머카서 동상 |
건축물 과거 명칭 | 세창 양행 사택 |
주 소 | 인천 중구 송학동 1가 1번지 |
용 도(현재) | 주택 건축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포격에 의해 소실)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2층 (173.15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84년 |
외 관 | 붉은지붕, 외벽 회칠, 사각기둥, logia, 사각탑 |
양 식 | 이탈리안 빌라 식 |
연 혁 | 마이어 양행의 숙소겸 주택 |
중국인 목수에 의해 지어짐 | |
인천 최초의 양관 | |
1922년 인천부립 도서관, 1946년 4월 인천박물관 | |
*1957년 머카서 동상 건립 홍대교수 김경승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현재 공터로 남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대불 호텔 |
주 소 | 인천 중앙동 1가 18번지 |
용 도(현재) | 상업건축(1979년 건물 노후 철거, 빈 터로 남아 있음. 2003년 현재) |
구 조 | 벽돌조 연와 |
규 모 | 지상 3층 (223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1887년 |
준공 년도 | 1888년 |
외 관 | 1층 난간, 그리스 식 페디먼트, 일식 기와 이음 |
양 식 | 절충주의 |
연 혁 | 1883년 굴구태랑(掘久太朗)이 착수 1888년 낙성 |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 | |
건축자재 일본에서 도입 | |
중화루로 사용되다가 철거 |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조선신보 사옥 |
주 소 | 인천 중앙동 2가 8번지 |
용 도(현재) | 민간건축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2층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89년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1887년경 개간, 1909년 조선 신문이라 개수 |
1921년 조선 신문 폐간 | |
건축물 현재 명칭 | 2006년 보수작업 중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제 18 은행 |
주 소 | 인천 중앙동 2가 24-1 |
용 도(현재) | 상업건축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1층 78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0년 |
외 관 | 벽돌조, 외부 석조 마감, 일식 기와 이음 |
양 식 | 부분적 고전주의 장식수법, 절충주의 양식 |
연 혁 | 1890년 일본 나가사끼 국립18은행 인천지부 |
조선 중앙 무진회사, 상공은행 | |
1954년 한국 흥업은행, 상공은행과 신탁은행 병합 | |
room salon | |
건축물 현재 명칭 | 중구 요식업 조합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제 58은행 |
주 소 | 인천 중앙동 2가 19-1 |
용 도(현재) | 상업건축(현존)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2층, (57.35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2년 |
외 관 | 석조기단, 아치 철 장식, 도머 창, 맨사드 지붕 |
양 식 | 프랑스 식, 르네상스 식 |
연 혁 | 1892년 일본 오사카 국립58은행, 인천지부 |
안전은행( 130은행과 3은행 병합) | |
1943년 조흥은행 점포로 사용 됨 |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닥터 알랜 별장 |
주 소 | 남구 숭의동 107번지 |
용 도(현재) | 주택건축(1956년 11월15일 철거 후 인천 전도관(예루살렘교회)건립)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2층 51.17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3년 |
외 관 | 희 2층 양옥, 원형 돔, 기와지붕 |
양 식 | 식민지 풍(colonial type) |
연 혁 | 한 때 고종의 이궁 예정지 |
건축물 현재 명칭 | 동인천 동사무소 일대. 현재 그 흔적의 일부가 남음(돌계단)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전환국 |
주 소 | 인천 중구 전동 1번지(인천여고 - 동인천 동사무소(현)) |
용 도(현재) | 정부 건축(1926년 철거, 축대 및 돌계단 남아 있음) |
구 조 | 벽돌(연와) |
규 모 | 지상 1층 (120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1892년 5월 |
준공 년도 | 1892년 11월 |
외 관 | 철(凸)자형 배치 |
양 식 | |
연 혁 | 한국정부 최초의 양식 건축 |
1893년 전환국 건축공사 시작(공장 건물 3동) | |
중정과 중앙에 사무실 겸 화폐조사실, 검사실 | |
동측 기관실, 서측 조각과 창고 및 감사길 | |
1898년 서울 용산으로 이전, 1908년 인천 여학교로 사용 |
건축물 현재 명칭 | 인천 기독교 사회복지관 |
건축물 과거 명칭 | 여 선교사 합숙소 |
주 소 | 인천 동구 창영동 42번지 |
용 도(현재) | 민간건축 (창영교회 복지관 부설 유치원)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2층 지하 1층 (142.03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4년 |
외 관 | 검정 생철지붕, 붉은 벽돌 |
양 식 | 북유럽 양식 |
연 혁 | 1892년~ 1894년 존스 목사 숙사 3동 신축(남 선교사, 아펜셀러, 여..) |
1949년 인천 기독교 사회관, 미군CIC에 징발 | |
1956년 징발 해제 재 개관 | |
건축물 현재 명칭 | 답동 성당 교리실 및 사제관 터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성바오로 수녀원. 해성병원 |
주 소 | 인천 답동 3-1번지 |
용 도(현재) | 종교건축 (사제관) |
구 조 | 적벽돌 |
규 모 | 지상 3층(432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4년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1894년 설립 |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일부 파괴, 1952년 개축(흔적만 가늠) |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성 누가병원, 인천 일본 적십자 병원 |
주 소 | 인천시 중구 내동 3번지 |
용 도(현재) | 상업건축(1955년 철거 후 성공회 내리교회)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2층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5년 |
외 관 | 검은 생철지붕, 적벽돌, 팔각형 지붕, 2층 베란다 |
양 식 | |
연 혁 | 1890년 랜디스 개설 |
1902년 러시아 영사관으로 임시 이용 | |
1904년 이후 성공회 신학원으로 사용 | |
1955년까지 2년 간 황해 중학교로 사용되다가 성공회 교회 신축 |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당시 사용한 석판들이 일부 남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남공립 상업학교 |
주 소 | 인천시 중구 율목동 4-1번지 |
용 도(현재) | 학교건축(철거 됨)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2층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5년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1887년 인천영학사로 시작 |
1912년 인천공립상업전수학교로 개교 | |
인천남공립상업학교로 개칭. 1933년 폐교 | |
1933년 인천공립상업학교에 흡수. 중앙국교, 정보고등학교(현) | |
* 철거된 후 툇돌들은 학교 벤취로 사용되고 있음 |
건축물 현재 명칭 | 태영선박주식회사 . 현재 방치되고 있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일본 우선주식회사 |
주 소 | 인천시 중구 해안동 |
용 도(현재) | 상업건축(소실 됨. 외형만 남아 있음)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1층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5년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1893년 해안운송을 위해 이운사 설치 |
1895년 일본 우선 주식회사 위탁 | |
*일본인이 세운 최초의 건물. 건축재료가 일본서 반입 |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제일교회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헨켈 저택 |
주 소 | 인천시 중구 송학동 1가 2번지 |
용 도(현재) | 주택건축 (주택건축)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1층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5년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독일인 뤼흘스(luhrs)가 살림을 위해 지은 집 |
* 한국전쟁 때 소실 | |
건축물 현재 명칭 | 개인주택 |
건축물 과거 명칭 | 모오스 주택 |
주 소 | 인천시 송학동 2가 18번지 15호 |
용 도(현재) | 주택건축(주택)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2층(46.2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6년 |
외 관 | 벽돌조에 외벽 몰탈, 스레이트 지붕 |
양 식 | 양풍 가옥 |
연 혁 | 모오스(미국 철도 업자)주택 |
한국전쟁 때 벽과 굴뚝만 남은 것을 1954년에 재건 | |
인성여중 바로 윗집 |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주차장 |
건축물 과거 명칭 | 라포드(라뽀르트)lapord저택 |
주 소 | 인천시 중구 송학동 |
용 도(현재) | 주택건축(소실)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1층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6~1897년 |
외 관 | 뾰족한 생철지붕 |
양 식 | |
연 혁 | 1901년 제 7대 세관장 E. LAPORD(프랑스)의 주택 |
해관장 댁이라고 불림. 해관(세관의 전신) | |
헨켈저택 맞은 편에 있었음 | |
건축물 현재 명칭 | 답동성당 |
건축물 과거 명칭 | 성 바오로 대성당 |
주 소 | 인천 중구 답동 3-1번지 |
용 도(현재) | 종교건축(종교건축)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2층, 지하 1층(351.85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1894년 |
준공 년도 | 1897년 |
외 관 | 상부 적벽돌, 하부 화강석 |
양 식 | 고딕식(1897년), 로마네스크 식(1937년 개축) |
연 혁 | 1893년 임시 건물 신축포교 |
1897년 프랑스 coste신부 옛 성당 설계 | |
1937년 chizallet신부 설계 |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영국 영사관 |
주 소 | 인천 중구 항동 1가 3번지 |
용 도(현재) | 관청건축(한국전쟁 때 파괴)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1층 (156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7년 |
외 관 | 생철지붕, 아케이드로 장식한 발코니 |
양 식 | 영국식 르네상스 |
연 혁 | 1884년 양풍 목조 개관 |
1897년 청사 개축 | |
1931년 인천부청에 인계 | |
1946년 시립 예술관 | |
*올림포스 호텔 |
건축물 현재 명칭 | 현재 여관 터 툇돌의 일부 남아 있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홈링거 양행 |
주 소 | 인천 중구 송학동 1가 9번지 |
용 도(현재) | 상업건축(1961년 화재로 소실)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2층. (167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1897년 |
준공 년도 | 1898년 |
외 관 | 외벽에 회칠. 전면 아치 반복, 박공지붕의 캐노피 |
양 식 | 영국식 르네상스 |
연 혁 | 영국계 상사 |
해방전 조선매일 신문사 사장의 주택겸 법률사무소 | |
1946년~1947년 미국대사관 공보원 인천 사무실 | |
1953년 해군 수로국으로 사용 | |
건축물 현재 명칭 | 일부 남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청국 영사관 |
주 소 | 인천 중구 선린동 8번지 |
용 도(현재) | 관청건물 (소실) |
구 조 | 벽돌 |
규 모 | 지상 2층 (6동 연 면적 236.5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898년 |
외 관 | 중국풍의 궁(弓)자형 아치 |
양 식 | |
연 혁 | 1884년 청국 이사청 설치 |
1934년 명칭 개편(인천 화교 소학교) | |
*현재 회의청은 문화재로 등록 | |
건축물 현재 명칭 | 인천시 중구청 별관 |
건축물 과거 명칭 | 일본 제일 은행 |
주 소 | 인천 중구 중앙동 1가 9-2번지 |
용 도(현재) | 상업건축(관공서) |
구 조 | 석조(화강암) |
규 모 | 지상 1층 (64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1897년 3월 |
준공 년도 | 1899년 7월 |
외 관 | 석조 파라핏, 일식 기와, 경사 지붕, 돔 |
양 식 | 후기 르네상스 양식 |
연 혁 | 설계자 신가효정(新家孝正) |
동경과 대판에서 자재 구입 | |
1883년 제일 은행 인천 출장소(인천 금융기관의 효시) | |
조달청 인천 출장소로 사용 | |
월미도 홍보관 |
건축물 현재 명칭 | 동명 국민(초등)학교 본관 |
건축물 과거 명칭 | 종두 검사소(전염병연구소) |
주 소 | 인천시 동구 송림동 114 |
용 도(현재) | 민간건축(학교건축) |
구 조 | 연와조 |
규 모 | 지상 1층(53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900년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종두약 제약소, 시험소 |
1930년 도원동 보각사 강당, 관서학원 시초 | |
1932년 교사 신축, | |
1946년 8월 30 동명국교 이전 |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서감리 저택 |
주 소 | 인천 중구 경동 63번지 8-5 |
용 도(현재) | 주택건축 (1968년 철거 신축)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2층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900~1903년 경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한국인 주택, 그 후 일본인 저택 |
내과 병원으로 이용 | |
1968년 철거로 백 외과 신축 | |
건축물 현재 명칭 | 표지석만 남아 있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동양 연초회사 |
주 소 | 인천시 중구 선린동 58번지 |
용 도(현재) | 상업건축(한국전쟁 당시 파괴)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1층 (305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901년 5월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1901년 합자회사 동양연초회사, 공장건립(사동 19번지) |
1901년 11월 선린동으로 이전 | |
4층 건물-chemulpo tabacco co 간판 | |
건축물 현재 명칭 | 중구 문화원 |
건축물 과거 명칭 | 제물포 구락부 |
주 소 | 인천 중구 송학동 1가 17번지 |
용 도(현재) | 민간건축(정부건축) |
구 조 | 연와벽돌조 |
규 모 | 지상2층 (117.2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901년 6월 22일 |
외 관 | 생철지붕, 외벽 몰탈, 아연지붕, 반 지하 |
양 식 | |
연 혁 | 1901년 외국인 전용 사교장 |
1913년 정방각(일본 재향군인회) | |
1934년 대일본 부인회 회관, 1945년 이후 미군 장교 구락부 | |
1953년 4월 이후 인천시립박물관 | |
인천시 문화원 |
건축물 현재 명칭 | 계단 벽면에 정초석만 남아 있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제물포 교회(내리교회) |
주 소 | 인천시 중구 내동 29번지 |
용 도(현재) | 종교건축(1955년 철거)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1층 (80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901년 12월 25일 |
외 관 | |
양 식 | 로마네스크 식 |
연 혁 | 1885년 미국 감리교회 아펜젤러가 창립 |
1890년 6년간 예배당 건립, 1901년 서양식 예배당 건립(80평) | |
1955년~1958년 대규모 교회당 건립(323평) 신관 | |
1964년 화재, 1966년 복구. | |
1983년~1985년 내부확장 개축 |
건축물 현재 명칭 | 없음 |
건축물 과거 명칭 | 이하영 별장 |
주 소 | 인천시 중구 답동 2-3 |
용 도(현재) | 주택건축 |
구 조 | |
규 모 | 지상 1층 (364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902년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구 한말 법무대신 저택 |
전 일본 수비대 자리 | |
현재 말일 성도 그리스도 교회 | |
건축물 현재 명칭 | 섭리 피정의 집 |
건축물 과거 명칭 | 쉬리바움(SCHRIBAUM) 주택 |
주 소 | 인천 중구 송월동 3가 9번지 |
용 도(현재) | 주택건축(수녀숙소) 2002년 12월 철거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1층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902년 |
외 관 | 전면 베란다, 목재 난간 |
양 식 | |
연 혁 | 1902년 인천각을 짓기 위한 준비차 건립 |
독일 영사관 업무 | |
건축물 현재 명칭 | 신흥 초등학교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공립 심상고등 소학교 |
주 소 | 인천 중구 답동 7번지 |
용 도(현재) | 학교 건축(1999년 철거 후 신축)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상 2층(861.5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1902년 9월 |
준공 년도 | 1903년 |
외 관 | |
양 식 | |
연 혁 | 1885년 개교(22학급) |
부산, 원산 외에 최고(最古)의 학교 | |
1902년~1903년 2층교사 신축, 1905년 2층교사 신축 | |
1914년 초기 교사를 제거, 연와 2층 10교실 159평 신축 | |
건축물 현재 명칭 | 공사중 2006 현재(방치) |
건축물 과거 명칭 | 인천 러시아 영사관 |
주 소 | 인천시 중구 선린동56-1 |
용 도(현재) | 관청건축(1974년 철거후 상가 신축) |
구 조 | 회색 벽돌(연와) |
규 모 | 지상 2층 (129평) |
설계 및 시공 년도 | |
준공 년도 | 1903년 |
외 관 | 일식 기와 이음, 2층 상부 그리스식 페디먼트 |
양 식 | 일식 그리스식 절충 |
연 혁 | 1902년 서울에서 인천 이전, 1904년 폐쇄 |
1912년 체신국 인천 출장소, 1915년 체신국 인천 해사 출장소 | |
해방후 미군 철도 수송부 사무소 | |
해군 경비대(부) 사용 | |
상가 철거후 오피스텔 신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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