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역사와 문화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3 19:31:24
인천의 역사와 문화
인천광역시립박물관
학예담당 김 상 열
Ⅰ. 인천광역시의 구성
우리나라의 중부에 자리잡고 있는 인천광역시의 위도는 북위 36°55′10″∼37°58′55″간에 걸쳐 있어 1°3′45″의 위도폭을 가진다. 지구상에서 위도 1°간 실제거리가 111km이기 때문에 인천의 남북간 거리는 대략 117.6km이다. 이렇게 인천은 북반구 중위도대에 위치하여 4계절이 비교적 뚜렷한 냉·온대기후의 특성을 보인다. 경도적 위치는 동경 124°36′41″∼126°47′43″로서 2°11′02″의 경도폭을 가지는데, 이는 동서간 192.23km 거리이다. 따라서 인천광역시의 극서는 옹진군 백령면 남포리 서단에 우치하고, 극동이 계양구 하야동 부평평야상의 한 지점으로서 인천·부천·서울 등 3개시가 경계를 이룬다. 극남은 옹진군 덕적면 목덕도 남단에 위치하고, 극북은 옹진군 백령면 연화리 북단의 한 지점이다.
이처럼 인천이 단일도시로서 이렇게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은 광역시로 개칭되면서 옹진군내의 여러 도서를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원래 인천광역시는 역사적으로 크게 4개의 지역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행정단위이다.
인천의 지명변천표
시대 지역 |
삼국시대 | 통일신라 (경덕왕) |
고 려 시 대 | 조 선 시 대 | 근 대 이 후 | |
인 천 (仁 川) |
백 제:미추홀 (彌鄒忽) 고구려:매소홀 (買召忽) |
소성현 (邵城縣) |
현 종:소성현 *수주에 소속 숙 종:경원군(慶源郡) 인 종:인주(仁州) 공양왕:경원부(慶源府) |
태조:인주 태종:인천군(仁川郡) 세조:인천도호부 숙종:인천현→도호부 |
1895년:인천부 1945년:제물포시(濟物浦市) →인천부 1949년:인천시 1981년:인천직할시(直轄市) 1995년:인천광역시(廣域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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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평 (富 平) |
고구려:주부토 (主夫吐) |
장제군 (長堤郡) |
성 종:수주(樹州) 의 종:안남도호부 (安南都護府) 고 종:계양(桂陽)도호부 충렬왕:길주목(吉州牧) 충선왕:부평부(富平府) |
태종:부평도호부 세종:부평현→도호부 숙종:부평현→도호부 |
1895년:부평군 1945년:제물포시→인천부 1967년:인천시 북구 1995년:부평구․계양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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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화 (江 華) |
백제:갑비고차 (甲比古次) 고구려:혈구 (穴口) |
해구군 (海口郡) |
태 조:강화현(江華縣) 고 종:강도(江都) *천도(遷都)시대 우 왕:강화부(江華府) |
태 종:강화도호부 광해군:강화부(府尹) 인 조:강화부(留守) |
1895년:강화군 1896년:강화군 1906년:강화군 1995년:인천광역시 편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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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속현 | 진강 | 백제:신지(信知) 고구려:수지현 (首知縣) |
수진현 (首鎭縣․ 守鎭縣) |
진강현 (鎭江縣) |
성종(成宗) 이전에 강화로 편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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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음 | 백제:휴음(休陰) 고구려:동음나현 (冬音奈縣) |
강음현 (江陰縣) 호음(冱陰) |
하음현 (河陰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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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동 (喬 桐) |
고구려:고목근 (高木根) |
교동현 (喬桐縣) |
명 종:교동현(喬桐縣) | 태조:교동현 인조:교동부(喬桐府) |
1895년:인천부 1914년:강화군에 편입 |
현재 인천광역시의 영역은 우선 가깝게는 조선시대 인천도호부․부평도호부․강화유수부의 대부분과 일부 김포군의 일부, 그리고 멀리는 충청도 남양군에서 황해도 장연군 지역에 소속되었던 많은 섬들까지 포용하고 있어 지리적으로는 크게 原仁川(중구, 동구, 남구, 남동구, 연수구 일대)․富平(부평구, 계양구, 서구)․甕津(옹진군 전역)․江華(강화군 전역) 등 4개 지구로 대별할 수 있겠다. 인천의 역사적 발전과정은 각 왕조마다 이 지역을 부르는 지명의 변천과정을 통해서 가장 뚜렷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인천 각 지역의 지명변천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인천의 연혁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원인천지역의 지명 변천
1. 彌鄒國에서 邵城縣으로
문헌에 나타난 삼국시대의 인천 명칭은 고구려의 買召忽이다. ꡔ삼국사기ꡕ에 ‘邵城縣은 본시 고구려 買召忽縣인데, 경덕왕이 (邵城으로) 개명, 지금의 仁州(또는 慶原, 買召라고도 하고, 彌鄒라고도 한다)다’라고 기록한 이후 모든 지지와 읍지에는 삼국시대 인천의 지명을 ‘고구려의 매소홀(현)(本高句麗買召忽(縣))’으로 표기하였으며, 아울러 ‘또는 미추홀이라고도 했다(一云 彌鄒忽)’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미추홀에 대해서는 같은 책 百濟本紀에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나라를 十濟라 했다. 이 때가 前漢 成帝 鴻賈 3년(기원전 18년)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상에서 인천이 백제의 지배하에서는 ‘미추홀’로, 고구려의 지배하에서는 ‘매소홀’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지배하의 인천의 명칭은 미추홀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지리서에는 백제 지배하의 인천의 지명은 彌鄒國, 彌鄒忽國, 彌鄒忽, 彌趨忽, 買召忽 등으로도 부르고 있다. ꡔ三國史記ꡕ를 비롯하여 ꡔ高麗史ꡕ, ꡔ世宗實錄ꡕ,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ꡔ增補文獻備考ꡕ 등의 地誌에는 모두 彌鄒忽로 표기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ꡔ仁川府邑誌ꡕ에 인용된 「洪元用記」와 ꡔ輿地圖書ꡕ에는 彌鄒國, 강희맹의 「인천부승호벽상기」에는 彌鄒忽國, ꡔ大東地志ꡕ에는 買召忽과 彌鄒忽國을 병기하고 있다. 이는 ꡔ삼국사기ꡕ 백제본기에 나타난 ‘미추홀’과 ꡔ삼국사기ꡕ 잡지에 소성현을 설명하는 ‘미추홀’을 구별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전자는 비류가 도읍한 곳을 가리키는 것이고 후자는 백제의 지배하의 지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전자는 국호로서의 미추홀이고 후자는 백제 지방체제 하의 지명인 것이다. 미추홀은 비류가 도읍을 정한 곳이다. 그러나 비류가 세운 국가 또는 정치집단의 명칭이 무엇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ꡔ삼국사기ꡕ 본기와 잡지의 기록을 연결하여 미추홀이라 하기도 하고, 다른 문헌에는 ‘彌鄒忽國’, ‘彌鄒國’, ‘沸流國’(ꡔ增補文獻備考ꡕ 권14, 輿地考 歷代國界) 등으로 표기된 것에서 지금도 화자에 따라 혼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ꡔ삼국사기ꡕ 백제본기의 ‘미추홀’은 비류가 세운 ‘彌鄒忽國’, ‘彌鄒國’, ‘沸流國’ 등으로 표기된 국명이고, 잡지에 나타난 ‘미추홀’은 온조가 비류의 ‘미추국’을 병합하고 국호를 百濟로 바꾼 후에 붙여진 지명인 것이다.
백제의 지배에 있던 인천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단행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키고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간 한강유역을 점령하게 되자, 고구려의 영토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인천은 미추홀에서 매소홀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러나 지명이 미추홀에서 매소홀로 변하게 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음운학적인 입장에서 두 견해가 있다. 첫째는 ① ‘買’는 음이 ‘ㅣ’로 ‘彌’와 같이 ‘므(水)’의 音借이고, ② ‘召’는 음이 ‘소’로 ‘鄒’와 같이 促音借이며, ③‘忽’은 현재음이 ‘홀’이나 옛음이 ‘곧․골’로서 ‘골(城)’을 음차한 것이라 하여 매소홀은 ‘믓골’, 즉 ‘水城’이라 한 것이다. 둘째는 ① 미추홀의 한자어 대역인 ‘邵城’의 ‘邵’를 확대한 의미 ‘매(野)’의 音借로 보고, ② ‘忽’은 城의 訓借인 ‘골’로 보며, ③ ‘召’와 ‘鄒’는 사잇소리 ‘ㅅ’으로 보아 ‘맷골’, 즉, ‘거친들의 고장’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지명의 변화가 이전의 지명과 전혀 연관이 되지 않는 예가 있기 때문에 고대국가 당시 사용되었던 지명의 변화를 음운학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 두 견해는 무리가 따른다.
인천이 매소홀로 불렸던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문주왕 2년(476)에 다시 한북지역을 회복한 기록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천은 다시 백제의 지배에 놓이면서 미추홀로 환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553년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이후 인천은 신라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인천은 지명이 邵城縣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ꡔ삼국사기ꡕ에 율진군에 대한 설명에 잘 나타나 있다.
栗津郡은 본시 고구려의 栗木郡으로 景德王이 (栗津으로) 改名하였다. 지금의 菓州(지금의 시흥군 일대)니 領縣이 셋이다. 穀壤縣은 본시 고구려의 仍伐奴縣으로, 경덕왕이 (穀壤으로) 개명하였으니 지금의 黔州다. 孔巖縣은 본시 고구려의 齊次巴衣縣인데, 경덕왕이 (孔巖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한다. 邵城縣은 본시 고구려 買召忽縣인데, 경덕왕이 (邵城으로) 개명, 지금의 仁州(慶原買召라고도 하고 彌鄒라고도 한다)이다(ꡔ三國史記ꡕ 권35, 雜誌 4, 地理 2).
신라는 景德王代에 이르러 신라의 제도와 관직 등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漢化定策을 단행하였는데, 경덕왕 16년(757)에는 중국식 郡縣制를 도입하여 순우리말로 되어 있던 지명을 모두 한자어로 바꾸어 9州 5小京 117郡 293縣으로 정비하였는데, 이때 인천이 栗津郡에 소속된 소성현으로 개칭된 것이다. 領縣이라 함은 州나 郡의 관할 하에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데, 군은 대체로 3~4개의 영현을 관할하므로 현보다 3~4배 크기였다고 할 수 있으나, 영현을 거느리지 않은 군도 있으므로 군이 현보다 반드시 크다 할 수는 없다. 또한 현은 주의 영현과 군의 영현이 있었는데, 그 크기는 비슷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매소홀현으로 불리던 인천이 경덕왕 때 소성현으로 개칭된 것을 「洪元用記」와 1891년 간행의 ꡔ인천부읍지(장서각 B15BB 17)ꡕ에는 降稱되었다고 표현한 것에서 소성현은 그리 큰 현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이 고대의 인천은 백제의 지배하에서는 彌鄒忽, 고구려의 지배하에서는 買召忽, 통일신라에 이르러 邵城縣로 불리었다. 이러한 고대 지명의 중심지는 문학산 부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백제를 건국한 온조세력에 비견되는 비류세력이 세운 미추국의 범위는 온조가 남하 당시 마한왕으로부터 동북지방 1백리의 땅을 받은 것에서 비추어 方百里의 규모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조사에서 백제토기 산포지가 문학경기장 남쪽 구릉의 동사면과 영종도 운서동에서 발견되었다. 아마도 영종도에서 문학산에 이르는, 넓게는 소래산에 이르는 지역이 미추국의 범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방백리 규모의 미추국의 중심지는 조선시대 관아가 있었던 문학산 북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仁州와 慶源郡
소성현이라 불리던 인천은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그대로 승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명의 개칭 없이 현종 9년에 樹州의 任內에 소속시켰다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수주는 현재의 부평으로 고려초에 있는 수주에 속한 영현이었다. 그러나 인주이씨가 고려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하면서 고려시대에는 인천의 읍호가 세 번 변하게 된다.
仁州는 원래 고구려의 買召忽縣(彌趨忽이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이 邵城으로 고쳐서 율진군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현종 9년에 樹州 관하에 소속시켰으며 숙종 때에 어머니 仁睿太后 李氏의 內鄕이라는 이유로 慶源郡으로 승격시켰으며 인종 때에 어머니 順德王后 李氏의 내향이라는 이유로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知州事를 두었다. 공양왕 2년에 慶源府로 승격시켰다(ꡔ高麗史ꡕ 卷56 志 10 地理 1 仁州條).
첫번째 읍호의 승격은 肅宗朝의 일이다. 皇妣 仁睿太后 李氏의 內鄕을 이유로 慶源郡으로 승격하였다. 인예태후 이씨는 인천출신 호족 李子淵의 딸이다. 이자연은 인천을 근거로 한 해상세력의 호족이다. 인주이씨가 인천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은 아래와 같다.
公의 이름은 許謙이니 金氏에서 許氏가 되었고, 許氏로써 李氏의 후손이 되었다. 그 선조는 駕洛國 首露王의 왕자였는데, 수로왕이 王妃의 말에 감동되어 왕비의 성으로 하사했으니 김씨로서 허씨가 된 것이 이것이요. 그 후에 使命을 받들고 唐 玄宗朝에 入朝했는데, 황제가 그 어진 재주를 가상히 여겨 皇姓을 하사했으니, 許氏로서 李氏가 된 것은 이것이었다. 공이 世臣의 冑孫으로서 신라말엽에 탄생하여 고려조에 벼슬하였으며, 관작이 尙書左僕射 上柱國 開國侯에 이르고 邵城伯을 봉하여 食邑 千五百戶를 하사하였다. 자손이 인하여 邵城府의 동쪽 蘇來山 아래에 거주했으니, 邵城에서 이씨가 基地를 잡은 것은 이에서 시작되었으며, 드디어 전국에 번창하였다(仁州李氏大宗會, ꡔ邵城世德ꡕ).
李子淵은 仁州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신라의 대관으로서 唐나라에 사신 갔다가 천자에게 잘 보이어 이씨라는 성을 받았다. 그 후 그의 자손이 邵城縣 즉 인주로 이주하였다. 李許謙의 대에 와서 소성 백의 봉작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이 尙書右僕射 李翰이요 이한의 아들이 李子淵, 李子祥인바 이자상은 죽은 뒤에 尙書右僕射 벼슬을 추증 받았다(ꡔ高麗史ꡕ 권 烈傳 李子淵傳).
이에 의하면, 인주이씨는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호족세력임을 알 수 있다. 그 세력의 형성에는 가야계인 선대가 신라하대에 가야계의 몰락과 함께 인천지역으로 출거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전후하여 서해안을 중심으로 당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의 황제로부터 이씨를 사성받은 후 그 자손들이 인천에 정착하였다는 것은 호족으로서의 이씨가 당과 관련있는 해상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신라의 한강진출 이후 해상활동의 중심이 당항성으로 옮겨갔으나, 그 지리적 요건과 역사적 전통은 해상활동이 계속 이루어지게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인천으로 출거한 인주이씨가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주이씨가 고려왕실과 관계를 맺게되는 것은 안산김씨 가문과의 혼인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현종 2년(1011) 안산출신인 金殷傅가 거란의 침입을 피해 공주에 온 현종과 인연이 되어 그의 장녀가 왕비가 되었는데, 그 뒤 두 딸마저 현종에게 출가시키면서 그 덕으로 刑部侍郞의 지위에까지 오르면서, 외척으로서 권력을 잡아나갔다. 그런데 이 김은부의 아내 이씨(安孝國大夫人)가 이허겸의 딸이었다. 이씨가 낳은 세딸이 모두 현종비가 됨으로써 이허겸은 왕의 외조부가 되었고, 후에 덕종․정종․문종의 외증조부가 되었다. 이에 현종은 이허겸에게 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候를 내리고 1,500호의 식읍 주었다. 이와 같이 당시 외척이었던 김은부와 맺은 혼인관계로 인하여 인천을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을 통해 기반을 다진 인주이씨는 고려 왕실과의 외척으로써 귀족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의 인주이씨를 권문세가로 발전시킨 것은 이허겸의 손자인 李子淵에 의해서이다. 이자연은 李翰의 아들로,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의 처조카인 동시에 현종과는 동서지간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자연은 문종 6년(1052) 2월에 자신의 큰딸을 文宗의 왕비로 들인 후, 나머지 두딸도 차례로 文宗에게 츨가하였는데, 맏딸은 仁睿太后, 둘째 딸은 仁慶賢妃, 막내 딸은 仁節賢妃가 되었다. 문종비가 된 세딸은 인예태후가 문종과의 사이에서 10명의 왕자(順宗, 宣宗, 肅宗, 大覺國師 煦, 常安公 琇, 普應僧統 規, 金官侯 비, 卞韓侯 음, 樂浪侯 沈, 聰慧首座 璟)와 2명의 宮主(積慶, 保寧)를 낳은 것을 비롯하여 모두 13왕자 6공주를 낳았다. 이에 李資義의 謀亂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른 숙종은 자신의 어머니인 인예태후의 내향인 인천을 慶源郡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고려 숙종조에 인천은 경원군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이전의 지명인 ‘邵城’과는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다만, ‘慶源’을 해석하면 ‘慶事의 根源’이 되는데, 이는 아마도 왕이 되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고 그 왕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으므로, 왕의 모친의 고향인 소성현을 ‘慶源郡’으로 개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인천의 두번째 읍호의 승격은 仁宗朝에 있었다. 인종은 자신의 어머니 順德王后 이씨의 내향이므로 경원군을 仁州로 고치고, 知州事로 하였다. 순덕왕후는 李資謙의 딸이다. 이자겸은 이자연의 손자요 顥로의 아들이며, 그의 누이가 순종비 長慶宮主이다. 이자겸은 자신의 둘째딸을 睿宗妃로 들이게 되는데, 순덕왕후는 사저에서 仁宗을 낳고, 예종 9년에 왕비로 책봉되고 예종 1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文敬太后로 추존하였다. 이에 인종이 즉위하여 어머니 순덕왕후의 내향을 이유로 경원군을 인주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러나 「洪元用記」에는 읍호 승격의 원인을 시중 이자겸의 딸을 예종비로 받아들였는데, (예종비가) 인종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헌에는 인주로 가호된 이유를 순덕왕후의 내향이 인천임을 들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ꡔ고려사ꡕ에 순덕왕후가 인종을 사저에서 낳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순덕왕후가 인종을 인천에서 낳았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서 인종의 탄생지인 인천을 인주로 가호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므로 보다 상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知事’는 고려시대 지방의 수령을 지칭하는 것인데, 州의 수령을 知州事, 군의 수령을 知郡事라 하였다. 그러나 고려 지방제도에서 州․府․郡의 位格에는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인종조에 있었던 경원군에서 인주로 개명한 것은 읍호의 승격이 아니라 읍호의 개정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주에 지주사를 두었다는 것은 인주가 속현의 지위에서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의 지위로 승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인천은 이때부터 지방관이 직접 통치하는 지방행정이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종은 어떠한 연유에서 인주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仁宗’은 시호이므로 인주와는 연관지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문종비인 이자연의 딸들이 仁睿太后․仁慶賢妃․仁節賢妃로 모두 ‘仁’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인예태후에 대해서는 인종 18년 4월에 ‘聖善’이라는 시호가 추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종이 인예태후를 추증하면서 ‘仁’자를 차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자연에서 이자겸에 이르는 인주이씨의 권세는 이자겸의 난으로 몰락하고 만다.
그러나 공양왕대에 이르러 인천은 세번째로 慶元府로 승격하였다. 경원부로 승격한 해에 대해서는 ꡔ세종실록ꡕ 지리지에는 공양왕 3년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문헌에는 공양왕 2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ꡔ세종실록ꡕ의 기록이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원부로 승격한 이유를 대부분의 문헌에는 ‘七代御鄕’을 들고 있으며, 「洪元用記」와 ꡔ輿地圖書ꡕ에는 ‘七代之鄕’, ꡔ仁川府陞號壁上記」에는 ‘七代鄕’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같은 뜻으로 여겨진다. 어향이라 하는 것은 璿源大鄕․皇妣의 內外鄕․皇祖妣․皇曾祖妣․皇高祖妣의 內鄕과 王妣의 內․外鄕을 말하는 것인데, 王妣뿐만 아니라 中宮의 내․외향, 그리고 세손의 외향을 포함시킨 예도 있다.
그렇다면 인천은 어떠한 연유에서 공양왕의 어향이 되는지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공양왕은 神宗의 7세손이 되는데, 신종은 인종의 5자이므로 인종이 선대가 된다. 문종조에서 인종조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주이씨는 외척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인천은 順從․宣宗․憲宗․肅宗․仁宗 5대 왕의 外鄕이 되고, 文宗․順從․宣宗․睿宗․仁宗 5대 왕비의 내향이 되었다. 따라서 이 7대 동안 인천은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내향이 되고, 특히 순종․선종․인종은 3대는 왕의 외향인 동시에 왕비의 내향이 되는 것이다. ‘御’자는 엄밀히 왕에게만 사용되는 글자이므로 ‘御鄕’이라 함은 왕의 고향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뜻을 확대하여 7대에 걸쳐서 인천이 왕실과 관련 있다하여 ‘칠대어향’이라 불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경원부로의 승격은 인주이씨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양왕의 등극과 관련된 우연에 의한 것이다. 위화도회군 후 李成桂는 ‘廢假入眞(이 두 왕이 신돈의 자손이므로 가짜 신씨를 폐위하고 진짜인 왕씨를 세운다)’을 구실로 禑王과 昌王을 폐위시키고, 왕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종실이라 하여 定昌君 瑤를 영입하였는데 곧 恭讓王이다.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조상을 追崇하여 四親에게 作詩를 추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7대조인 신종의 선대 7대왕(문종~인종) 중 5대왕이 인천을 외향으로 하고 5대 왕비가 인천을 내향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조상을 현양하는 뜻에서 인주를 부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읍호를 환원시켰던 것이다.
이렇듯이 고려시대에는 인천의 읍호 변화가 잦았는데, 숙종조에는 인예태후 이씨의 내향으로 이유로 慶源郡으로 승격하였고, 인종조에는 순덕왕후의 내향임을 이유로 仁州로 가호되었으며, 공양왕 2년에는 칠대어향을 이유로 경원부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州․府․郡의 위격이 같았기 때문에 인천의 읍호 변화는 왕실과 관련된 지역에 대한 상징적인 차원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조의 지주사의 파견은 인천지역에 대한 지방행정의 효시가 되는 것임은 물론이고, 문학산 북록에 위치한 조선시대 인천관아의 개시가 이때에 이루어졌음을 추정케 하는 중요한 사실이 되는 것이다.
3. 仁川郡에서 仁川都護府로
인천은 조선의 개창과 더불어 경원부에서 다시 인주로 환원하였다. 이는 태조 원년의 일로 ꡔ세종실록ꡕ 지리지에 옛이름인 인주로 복구하였다고 기록된 이후 대부분의 문헌에 답습되고 있다. 심지어 「홍원용기」에는 공양왕 2년에 하사한 홍정을 거두어들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태조는 경원부를 인주로 환원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고려 숙종조 인천의 읍호인 慶源이었다. 그러나 慶源은 고려시대 인천만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 함경북도 북단에 위치하여 중국 동북지방의 松江省에 접하고, 서쪽은 종성군, 남쪽은 경흥군, 북쪽은 온성군에 접하고 있는 지역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후자의 경원에는 한때 이성계의 高祖인 安社(후에 穆祖로 추존)가 ‘慶源 龍堂’ 東林 古城에 머물렀고, 안사의 아들 行里(후에 翼祖로 추존) 또한 이 곳의 千戶를 지냈다. 후에 중국 元나라가 멸망하자 고려는 이곳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지금의 ‘경흥군’을 합쳐 ‘孔州’로 불렀다. 그러므로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목조와 익조의 활동지역이었던 이곳을 ‘경원’이라 하고 인천은 인주로 복구하였다고 생각된다.
태종대에 들어서면서 전면적인 관제와 지방제도의 개편이 단행되는데, 현재 이 지역을 부르고 있는 仁川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태종 13년(1413)에는 서북면에 평안도관찰사를 설치하고 전국을 留守府 1, 府尹 6, 大都護府 5, 牧 20, 都護府 74, 郡 73, 縣 154 등 333개의 행정구획으로 나누었으며, 태종 16년(1416)에 동북면에 함경도관찰사를 설치함으로써 八道制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8도에는 관찰사를 두고 그 밑에 각 읍에는 府尹․大都護府使․牧使․都護府使․郡守․縣令․縣監을 두었다. 태종대의 지방제도는 주․부․군․현의 부분적인 승격 또는 강등으로 인한 약간의 변경이 있는 외에는 이 원칙이 조선말기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태종 13년에는 각도 각 관호를 아래와 같이 정비하였다.
각도 각 고을의 이름을 고쳤다. 임금이 河崙에게 이르기를,
“全州를 이제 完山府라고 고치고서도 오히려 ‘전라도’라고 칭하고, 慶州를 이제 鷄林府라고 고치고서도 오히려 ‘경상도’라고 칭하니,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니, 하륜이 말하기를,
“유독 이 곳만이 아니라, 東北面․西北面도 이름을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옳도다.”
하였다. 드디어 완산을 다시 ‘전주’라고 칭하고, 계림을 다시 ‘경주’라고 칭하고, 서북면을 ‘平安道’로 하고, 동북면을 ‘永吉道’로 하였으니, 平壤․安州․永興․吉州가 界首官이기 때문이다. 또 각도의 單府 고을을 都護府로 고치고, 監務를 縣監으로 고치고, 무릇 郡․縣의 이름 가운데 州자를 띤 것은 모두 ‘山’자, ‘川’자로 고쳤으니, 寧州를 寧山으로 고치고, 衿州를 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ꡔ太宗實錄ꡕ 13년 10월 辛酉條).
이에 따라 정리된 군현명은 ‘川’자로 바뀐 예가 36곳, ‘山’자로 바뀐 예가 23곳 모두 59곳에 이른다. 이렇듯 ‘川’ 또는 ‘山’자로 바뀌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강원도의 壤州가 壤陽으로, 龜州가 龜城으로 바뀐 것처럼 ‘양’․‘성’으로 대치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군에 해당하는 인주가 仁川郡으로 개칭됨으로써 ‘仁川’이란 邑號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천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후 세조대에 이르러 도호부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호부로 승격된 연도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나타난다. 강희맹이 쓴 「인천부 승호벽상기」에 ‘지금 주상이 즉위한지 6년차 되던 겨울에 王妃의 親家와 外家의 고을 州나 府로 승격시키라고 명하였는데, 仁川은 왕비의 外家 고을로 郡에서 府로 승격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인용한 ꡔ東國與地勝覽ꡕ의 건치연혁에 ‘세조 6년에 昭憲王后의 외향으로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고 기록한 이후의 대부분의 문헌에서 이를 답습하였다. 그러나 ꡔ增補文獻備考ꡕ에는 ‘세조 5년에 도호부로 승격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ꡔ大東地志ꡕ에는 ‘세조 5년 소헌왕후 심씨(외조부 文必大)의 외향이므로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인천이 郡에서 都護府로 승격한 해에 대해서 세조 5년(1459)와 세조 6년(1460)이라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호부로의 승격 사유를 세종비인 소헌왕후의 외향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이다.
「인천부 승호벽상기」에 ‘王妃內外鄕爲州若府 仁川以王妃外鄕陞郡爲府’이라고 하였는데 ꡔ세조실록ꡕ에는 ‘세조 5년 10월 庚戌日에 慈聖王妃의 내향인 原平府를 坡州牧으로 승격하였다’라는 기록과 ‘세조 5년 11월 癸未日에 慈聖王妃의 외향인 인천군을 都護府로 승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한 원인은 世祖妃인 자성왕비의 외향이기 때문인 것이다. 세조비인 慈聖王妃(후에 貞憙王后) 尹氏는 파평윤씨인 尹璠의 딸로, 윤번이 인천의 李文和의 딸과 결혼하였으므로, 자성왕비의 내향은 파주, 외향은 인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천의 도호부 승격은 자성왕비의 외향이 그 원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세종비인 소헌왕후와 관련한 읍호의 승격은 ‘세조 5년 6월 경상도 靑松郡을 도호부로 삼았으니, 소헌왕후의 내향인 까닭이다’라고 한 ꡔ세조실록ꡕ의 기록만 보일 뿐이다. 소헌왕후의 아버지는 청송심씨 心溫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 安天保의 딸이므로, 소헌왕후의 내향은 청송이고 외향은 순흥이 된다. 그런데 심온의 아버지는 心德부인데 인천의 門必大의 딸과 혼인하였으므로, 인천은 소헌왕후의 陳外家가 되는 것이다. 진외가는 외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ꡔ大東地志ꡕ에 소헌왕후의 외조부를 문필대라 하였는데, 문필대는 심온의 외조부가 되는 것이므로 이 또한 오기이다. 하여튼 인천의 도호부 승격은 인천이 소헌왕후의 외향이 아니라 자성왕비의 외향임에서 연유된 것으로, 그리고 승격된 해도 세조 5년(1459)으로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태종대에 인천이라는 명칭을 얻었고, 세조 5년에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인천은 도호부의 격을 유지하였다. 세조 5년의 읍호의 승격은 고려와는 달리 읍의 위격 또한 승격되는 것이다. 특히 왕비 내외향이라는 이유로 고을의 읍호가 승격되는 경우에는 타읍의 동경이 대상이 됨은 물론, 심지어 京衙門에서 승격된 고을의 문서수발 吏胥에 대한 대우까지도 융숭해졌다. 그래서 지역에 거주하는 士類들은 읍호 승격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읍호승강이 여러 지방통치제도와 함께 지방통치의 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인천의 읍호 승격이 왕실과 관련하여 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읍호의 승격은 왕실의 권위 신장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인천이 읍호 개정과 함께 실질적으로 위격이 승격되었음은 조선 세조 때에 와서라고 보여진다.
1875년 일본 운양호의 永宗防禦營 파괴에 따른 방어영의 인천도호부로의 移置와 영종방어영 복구, 1883년 仁川港의 개항과 그에 따른 監理署 설치, 1895년의 甲午改革으로 인한 잦은 행정구역의 변천은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록과 地誌類에는 불명확한 내용들이 선생안에는 생생하게 나타난다. 특히 1883년 인천항 개항이래 仁川監理를 1995년 갑오개혁전까지 인천도호부사가 겸임하도록 알려져 왔으나, 위에 따르면 1894년 9월부터는 監理룰 겸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ꡔ신증동국여지승람ꡕ에 의하면, 인천의 관할구역은 동으로 安山까지 41리와 衿川縣界까지 34리, 남으로 大海까지 7리, 서로는 濟物梁까지 17리, 북으로는 富平府界까지 24리, 그리고 서울까지는 77리라고 되어 있다. 이는 현재 부평구, 계양구, 서구를 제외한 인천광역시 본토의 대부분과 시흥시 소래면의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구역이며, 읍치는 문학산 북록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ꡔ仁川府邑誌ꡕ 方里條에 의하면(부표 참조) 조선후기 인천도호부는 10개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4. 仁川府에서 富川郡으로
고종 20년(1883)에 개항이 이루어지고, 삼국시대이래 문학산 일대에 위치해 있던 읍치가 현재의 중구 일대로 옮겨가면서 문학산 일대의 역사적 전통이 퇴락되기 시작한다. 인천이 개항되고 제물포에 監理署가 설치되면서 監理(監理仁川通商事務)가 부사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에는 甲午改革의 일환으로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府 331郡으로 통합하고 府에 觀察使를 두었다. 이 대 감리서가 폐지되고 인천은 23부의 하나가 되어 인천․부평․김포․양천․시흥․안산․과천․수원․남양․강화․통진․교동 등 12郡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건양 원년(1896)에 다시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전국을 13道 1牧 9府 329郡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인천은 9부의 하나가 되어 경기도에 속하면서 감리서가 부활되었다. 그 후 광무 10년(1906)에 다시 감리서가 폐지되면서 仁川府尹이 監理師舞를 수행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여 총독부가 설치되자 인천은 1910년 9월 30일 칙령 354호 「朝鮮總督府官制」와 357호 「朝鮮總督府地方官官制」의 공포에 따라 부가 설치되고 부행정이 실시되었다. 그 후 1914년 3월 1일 府令 111호 「道의 位置, 管轄區域 및 府郡 名稱, 位置 管轄區域」에 의하여 府․郡․面을 통합할 때, 인천은 부역이 대폭 축소되어 개항장으로 국한되고, 그 나머지 지역은 부평군과 합하여 신설된 富川郡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문학산 일대도 부천군에 속하게 된다.
1936년 9월 26일 府令 93호 「府郡의 名稱 位置 管轄區域中 改正」에 의하여 부천군 文鶴面(과거 인천관아가 있던 부내면)의 학익리, 옥련리, 관교리, 승기리의 일부와 다주면(과거 다소면과 주안면을 합쳐 1914년에 다주면으로 함)의 도화리, 용정리, 사충리, 자의리, 간석리의 일부를 인천부에 병합하므로써 다시 부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1940년에 다시 2차 부역 확장이 이루어짐에 따라 다시 부천군의 문학․남동․부내․서곶 등 4개 면이 편입됨으로써 종전의 인천부역 이외에 부평군의 대부분이 인천부역으로 편입되었다.
Ⅲ. 고려시대의 부평 이름
1. 樹州
고려사 태조 23년조에 ‘3월에 주․부․군․현의 이름을 개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고려시대 주․부․군․현의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태조 23년(940)부터이고 또한 통일신라 때 장제군으로 불리던 부평이 수주로 승격된 것도 이 시기였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수주로 개칭된 이유를 계양산 북쪽인 수소리에 주청사가 있었는데 이 곳이 밀림 속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고구려시대의 지명인 주부토의 주가 님의 음차이며 이것이 나무와 음이 가깝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 安南都護府와 桂陽都護府
수주는 다시 의종 4년(1150)에 안남도호부로 되어 금천․동성․통진․공암․김포․수안 등 6개의 현을 두게 되었다. 이때부터 부평은 안남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는 계양산을 일명 안남산으로 부른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부평이 안남도호부로 개칭된 것은 수도인 개경의 방어를 위한 요충지로서 중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안남도호부는 고종 2년(1215)에 계양도호부로 개칭되었고, 이때부터 이 지역은 계양으로 불리게 된다. 계양은 계양산에서 유래한 것으로, 계양산은 계수나무와 회양나무가 자생한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의 대문호였던 李奎報는 고종 6년(1219)에 계양부사가 되어 이 지역에 14개월간 머무르게 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자오당기․초정시․초정기․명월사시․망해지 등의 詩文이 전하고 있다. 그는 부평지역의 풍속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순박하고 일이 간단한 것은 비록 가상하나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쇠잔하여 차마 볼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로써 당시 부평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3. 吉州牧
계양도호부는 충렬왕 34년(1308)에 길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길주목이라는 지명은 충렬왕의 매사냥과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충렬왕은 태자로 있을 때 원나라에 두 차례 들어가 세조(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고 원종이 죽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유목민족인 몽고인들은 매사냥을 즐겨 하였는데, 고려의 매를 海東靑이라 하여 진귀하게 여겼고, 또한 매에 대한 징발도 심하였다. 충렬왕이 즉위하여 각지에 鷹坊을 설치하고 자신도 매사냥을 탐닉하였는데, 부평에 2차례 매사냥을 나왔다는 기록이 『증보문헌비고』에 전한다. 이 지역에는 ‘장명이고개’, 또는 ‘징맹이고개’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 역시 매를 징발한다는 ‘징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렇듯 길주목이라는 지명은 충렬왕의 매사냥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4. 富平이라는 지명의 등장
부평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것은 충선왕 2년(1310)의 일이다. 충선왕은 즉위와 함께 길주목으로 불리던 이 지역을 富平府로 개칭하였는데, 이로써 ‘부평’이라는 지명이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다. 이규보의 기문에서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쇠잔하다고 말한 이 지역은 이제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경지를 만들어 넓은 곡창지가 되었다. 농지가 넓어 수확이 많은 들이라는 뜻으로 부할 富자와 넓은 平자를 넣어 부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5. 조선시대의 부평
부평은 태종 13년(1413)에 지방제도의 개혁에 따라 부평도호부가 되었으며, 그 뒤 몇차례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부평도호부는 세종 20년(1438)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28년(1446)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는데 그것은 부평에서 온천의 소재지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은 등에 부종이 생겨 고통이 심하였는데, 병환의 치료를 위해 온양에 온천을 다녀와서 큰 효험을 보았다. 그러던 중 세종이 도성 가까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여 온천을 탐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온천의 소재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에 세종은 부평의 관민이 민폐가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온천의 소재지를 숨기고 고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부평부를 현으로 강등시켰는데 결국 온천 발견의 가망이 없는 것을 깨달은 세종이 다시 도호부로 환원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숙종 24년(1698)에는 章陵(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능)에 방화한 죄인 崔弼成의 출생지가 부평이었다고 하여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9년 후인 숙종 33년(1707)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하였다.
Ⅳ. 강화의 지명유래와 연혁
강화에는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동막리 등지에서 구석기 및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산과 봉천산․별립산 일대에 수많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청동기시대에는 초기국가 형태의 정치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후 주민의 거주가 활발히 이루어져 문헌상에 ‘갑비고차․신지․휴음․달을참’ 등의 여러 지명이 등장하고 있다.
1. 江華
강화는 본래 백제의 갑비고차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면서 穴口郡으로 개칭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경덕왕 16년(757)에 단행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海口郡이라 하였으며, 원성왕 6년(790)에는 혈구진을 두었다.
강화의 옛이름은 ‘甲比古次’였다. ‘갑비’는 고유어 ‘갑’을, 고차는 ‘곶, 곶이’를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명칭은 현재 강화읍 소속의 갑곶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면 갑곶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갑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은 것을 ‘갑석(甲石)’, 두배를 ‘갑절’, 겹창을 ‘甲窓’이라 하는 것처럼 둘(2)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강 하류의 조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 강화의 동북단에서 둘로 갈라져 강화의 북단과 강화․김포 사이의 염하로 나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이해된다. ‘고차’는 ‘고즈, 고지’로 변하여 곶이 된다. 串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해온 한자음으로 강, 바다로 돌출한 지역이나, 내륙에서 벌판은 향해 길게 뻗어나간 지형에서 온 地名形態素이다. 즉 갑비고차란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가 되며, ‘두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후대에 불려지는 혈구, 해구, 강화라는 지명은 둘로 갈라진다는 뜻이 사라지고 물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태조 23년(940)에 지금의 이름인 강화현으로 개칭되었고,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수도를 강화로 천도하면서 군으로 승격시켜 읍호를 강도[일명 沁都]라 하였다. 그러나 원종 11년(1270)에 송도로 환도한 후 충렬왕 때에 인주에 병합되었다가 곧 회복되었고, 우왕 3년(1377)에 강화부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 행정구역 정리․개편 때 강화도호부가 되었고, 광해군 10년(1618)에는 강화부로 승격시켜 부윤을 두었다. 정묘호란 직후인 인조 5년(1627)에 강화가 남한산성과 함께 保障處로 설정됨에 따라 다시 유수부로 승격되어 문호개방에 이르기까지 수도 한성의 관문으로의 기능까지 겸하였다.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 때, 강화군으로 강등되어 인천부에 소속되었다가, 이듬해 부로 승격하였고, 광무 10년(1906)에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줄곧 경기도의 강화군으로 있다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2. 鎭江
진강현은 본래 백제의 신지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수지현(首知縣)이 되었다가, 경덕왕 16년(757)에 수진현(首鎭縣)이라 개칭하여 해구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수지는 머리를 상징하는 땅이름이다. 고려 초기에 진강현으로 고쳐 불렀는데, 당시 강화의 치소(治所)가 인산리 황골에 있었기 때문에 관아의 앞산이 있는 고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진강현으로 고친 후 15세기 중엽까지 강화의 속현으로 있다가, 강화도호부에 편입되었다.
3. 河陰
본래 백제의 휴음으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동음나현(일명, 아음)이 되었다가, 경덕왕 16년(757)에 강음현(일명, 호음)이라 개칭하여 해구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동음내’ 또는 ‘아음’은 신령 즉 삼신을 의미하고 번영과 증식을 상징하는 지명으로 신성시한 듯하다. 신라시대의 호음은 북방신인 태음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역시 증식과 번영을 안겨주는 삼신사상에 입각한 지명이며, 신앙의 근원지임을 입증하는 길한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하음현으로 고쳤다가 후에 잠시 개성군에 속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중엽까지 강화의 속현으로 있다가, 강화도호부에 편입되었다.
4. 喬桐
본래 백제의 달을참(일명 달을신)으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고목근현(일명 대운, 고림)이 되었다가, 경덕왕 16년(757)에 지금의 이름인 교동현으로 개칭하여 해구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교동의 땅이름을 보면 ‘구름을 떠받들거나(戴雲)’, ‘높은 나무(高林)’, ‘큰 나무뿌리(高木根)’ 등 한결같이 ‘크고 높다’는 뜻이 된다. 교동은 한민족의 정서가 깃들인 오동나무를 상징하는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줄곧 교동현으로 존속하다가 정묘호란을 치른 직후인 인조 7년(1629) 교동에 경기수영을 이설하면서 부로 승격하였다. 갑오개혁 때 고종 32년(1895)에 교동으로 강등하여 강화군에 소속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군으로 회복되었다. 1914년 총독부령 제111호로 대대적인 행정개편을 단행하면서 교동군을 폐하고 화개와 수정 두 면으로 나눠 강화군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두 면을 합쳐 강화군 교동면으로 하였다.
Ⅴ. 甕津郡의 연혁과 지명유래
옹진군은 본래 황해도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고조선시대부터 한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 지역은 진번군에 속해 있다가,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자 낙랑군에 속해 있다가, 대방군이 설치되면서 이에 속하게 된다.
우리측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로 “옹천은 이제 옹진현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면 옹진군은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군을 축출한 380년경에는 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성으로 추정되는 화산산성이 발굴됨으로써 입증되고 있다. 이 성은 옛 옹진읍에서 약 10㎞정도 떨어진 본영리(本營里)에서 발굴된 것으로 해안 방위뿐만 아니라 바다를 통한 해상 군사 활동에도 유리한 자연 군사적 조건을 갖춘 천연적인 요새지로 북․서․남 삼면이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모양이 독을 눕혀놓은 모양과 같아 옹천(독벼루)이라 이름했고 후에 나루가 있다 하여 독을 엎어놓은 것 같은 곳에 있는 나루라 하여 독쟁이나루(옹진)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통일신라 때에는 황해도지역의 한산주에 편입되고 백령도의 경우 경덕왕 때 폭야군의 현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현종 9년(1018) 지방관제 구조가 완성되자 옹진은 백령과 함께 해주에 속하게 되고, 아래로는 장연현과 영강현을 거느리고 고려말까지 행정구역상 변화가 없이 내려오게 된다. 조선조 태조 6년(1397)에 이르러 진을 두어 병마사로 판현을 겸하게 하였다가 세종 5년(1423) 첨절제사로 개칭하였는데 곧 현령으로 복구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지역 명칭 변천을 겪다가 고종 32년(1895) 지방행정 관제 개혁에 따라 부를 군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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