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1)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3 19:22:57
인천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강사 : 이 종 복
시인. 개항장 역사 문화 연구소장
들어가는 말.
인천의 역세권은 북(北)으로 김포와 서울에 맞닿아 있고, 동남(東南)으로는 안산, 시흥, 부천시 등과 인접해 있으며, 서(西)로는 서해를 모체로 영종도, 덕적도, 영흥도, 무의도, 대부도, 강화도 등의 섬들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전형적인 해양 인접 지역입니다.
고대 국가의 형성 시기부터 해외무역과 군사시설의 요충지였던 인천은, 고대 백제 시대에 중국과 통교하는 관문으로써 그 역할이 지대했던 곳(凌墟坮능허대)이기 때문에 고구려와 더불어 신라가 치열한 국지전을 벌이기도 했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선진 중국의 문물과 학문, 나아가 국내 산물들을 교역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탈피할 수 있었던 삼국의 입장에서 인천은 대륙으로 향하는 교두보로써 뿐만 아니라 세계 문화의 유입 창구로써도 그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역적 의미에서 인천 지역은 서울로 통하는 한강을 끼고 강화도와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침략과 수모(몽고의 침입과 삼전도 사건)를 겪게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삼남 지방에서 수확한 곡물들의 세수(稅收) 반입 중계지(만석동)로서 그 역할이 매우 컸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인천은 그다지 높지 않은 산세와 그 주변 환경은 소성(인천의 옛 이름)의 의미처럼 척박하다는 표현에 걸맞을 정도로 일천하게 흐르는 하천들과 습지가 주종을 이루는, 그야말로 자연 환경적인 측면에서 특출난 공간구조를 지닌 곳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인 여행가로써 인천(제물포)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기여한 ‘이사벨라 버드 비숖’ 부인은 일백여 년 전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란 책에, 인천은 “낡고 한적한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할 정도로 척박한 곳이다”라고 표현했듯이 인천의 자연 환경은 이역인(異域人)의 푸른 눈에도 볼품없는 공간으로 여겨졌으리라.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양인의 견해일 뿐, 전통적으로 자연 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의 전통적 정서와 사뭇 다른 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당시의 인천의 정황을 살피는 값진 기록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백두산을 한반도 지세의 중심으로 봤을 때, 산맥으로 펼쳐져 있는 이 땅의 지세는 어느 지역도 그 기운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산과 강 그리고 하천들이 마치 살아 있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천의 산은 소래산을 중심으로 성주산(상아산), 관모산, 거마산, 철마산①, 주안산(약사산, 만월산), 철마산②(원적산), 천마산(중구봉), 계양산 등이 큰 줄기를 이루어 멀리 강화도의 마리산(마니산)까지 이어져 있으며(한남정맥), 또 다른 갈래인 문학산을 중심으로 그 지류(地流)인 질마산(길마산), 수리봉, 연경산, 노적산. 또한 승기산, 청량산 등이 다른 겹으로 포진해 있는 형세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록 그 산세와 지형은 그리 높거나 크지는 않으나, 북으로는 북한산을 잇고 있으며(한북정맥) 가현산과 문수산이 산맥의 다리가 강화도 마리산으로 통하는 형세는 그야말로 전통적인 기혈을 지닌 산세를 가졌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계양산과 소래산 그리고 승기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의 구조 또한 인천을 기름지고 사람이 살만한 공간을 만드는 데에 일조하는 데 굴포천을 비롯해서 승기천, 사천 등이 바로 그 것입니다. 따라서 인천은 해안선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또한 이 들 산맥을 배후로 삼아 형성된 전통적인 명당의 구조를 지닌 지역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 특정지역에 정착한다는 것은 크든 작든 간에 자연적 환경의 요인들이 적합하게 존재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없는 삶의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살만한 곳은 어떠한 곳을 말하는 것인가? 그 살만한 곳은 어떠한 자연 환경과 문화를 지니고 살아가는가? 또는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심은 다른 곳에 사는 사람과 어떠한 차이점을 갖는가? 등등은 사람이 정착하는 데에 환경(총체적 의미로써의 환경)이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몸으로 느끼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만큼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고 자연환경이 우리에게 끼치는 정도에 따라서 삶의 행태가 결정되는 중요한 단서를 부여받게 됨을 알 수 있게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본론.
-고인돌 문화-
인천은 선사시대 이전부터 그 시대를 엮어온 사람들의 생활 공간으로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살아 온 공간입니다. 이들이 주도 해온 대표적인 문화가 바로 고인돌 문화입니다. 고인돌 문화를 이끌어 온 사람들은 매우 조직적이었고 위계질서가 이미 정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우리가 흔히 돌멘(DOLMEN)이라고 하는 것은 소수의 인원으로써는 세울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의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의 문화는 주검을 단순처리 하는 것이 아니라 부장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의식이 곁들여진 종교적 형태를 지니고 있었고 고인돌을 세우는 형식에 있어서도 절차가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고고학계가 비정하는 고인돌의 형식을 개석식(북방식)이니 덮개식(남방식)이니 하는 것과 부장품인 세형청동검과 마제식돌칼 등은 사용 용도로 보아 매우 비현실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신석기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세련미가 곁들여졌다는 측면에서 다분히 형식성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추론하고 있습니다. 인천은 고인돌 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의 본거지라 할 만큼 양과 규모에 있어서 전국 최고를 자랑합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의 문화자산에 등재될 만큼 그 가치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소금 문화-
인류의 식생활 변화에 있어서 가히 혁명적으로 주도했던 물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금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채집과 수렵이라는 지난한 세월을 거쳐 비로소 땅에 기대어 붙박이로 정착 생활을 하면서부터 소금의 소중함은 따라서 증폭되었던 것입니다. 자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생존하기 위해서는 음식물의 확보와 확보한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소금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요구 되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소금의 사용 용도는 가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대표적으로 음식물을 오랬동안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실례로 김치를 둘수 있는데 김치는 푸성귀나 열매 등을 소금에 절이는 것을 통칭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한자의 차용 예로 보면 침채(沈菜)라고 잘라 말 할 수 있지만 중국어에 침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래된 우리말 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저(菹)라는 용어가 전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중국의 사용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금은 이렇게 채소류나 열매 따위를 오늘날 말하는 발효라는 이름을 빌어서 오랬동안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고려 시대 때의 대 시인이자 한 때 부평부사를 엮임했던 이규보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장에 절인 순무장아찌는 여름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는 겨우내 찬으로 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김치의 역사성을 유추해 낼 수 있는 문헌자료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보다 훨씬 이전에 인천은 소금의 산지로 각광을 받았던 지역임이 ‘고려사’에 기록돼 있고(소금의 생산량과 그 호구 조사를 하였음),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고구려 사람들은 김치와 소금을 즐겨먹는다는 구절 등이 나타납니다. 추정컨대 미추홀을 개국했던 비류가 온조를 멀리하고 인천에 도음을 정했던 이유도 아마 소금 때문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론해 보게 합니다. 그 만큼 소금의 절대적 가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중국의 예를 들어 보면 당 나라는 나라에서 소금의 생산과 관리가 너무 각박한 탓에 소금을 밀매했던 업자들이 외세의 힘을 빌어 반란을 일으켜 당 나라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바로 소금의 위력을 반증하는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인천은 소금과 매우 밀접한 지정학적 조건에 있었음은 말할나위가 없습니다. 근대 시대를 통하여 전국 최초의 천일염 조성지라고 낙점 받은 데에는 이러한 조건들이 이미 구비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을사조약(1905년) 이후 친일 조선 정부와 일본 제국주의 통감부 정치꾼들의 입에 발린 한국 최초의 천일염 조성지는 어찌 보면 우리나라 아니, 인천의 자랑거리인 소금의 역사를 오히려 폄하시키는 오명임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인천은 바다를 모태로 해서 태어난 도시입니다. 고인돌 문화를 주도해 냈고, 가히 음식 문화에 있어서 혁명적 발견이라 할 수 있는 소금의 산지가 바로 인천 문화의 원형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천 문화의 원류는 좁혀 말하면 고인돌과 소금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소극적 개념으로 이 두 가지 주제를 빗대어서 말하는 데에는, 짧은 강의 시간과 더불어 좁은 지면의 탓으로 돌려보지만, 오늘날 인천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발전적 모델을 제시하는 데 결정적 요인을 주었다는 데에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인천의 문화는 바다의 자양을 충분히 섭취해야 하고 바다를 시민의 손으로 직접 일구게 하고 어디를 가나 바다의 냄새가 물씬 묻어나오는 가운데 진정한 대안이 나올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인천 발전의 청사진은 바다를 도외시 해서는 정대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신기루일 뿐입니다. 근자에 시 정책 사업과 국책 사업의 일환으로 비롯되는 일체의 것에 인천 앞 바다의 정기가 가득 서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강의 자료를 갈음합니다.
'인천사람들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역문화와 삶 (1) | 2023.03.09 |
---|---|
인천의 땅과 사람들 (1) | 2023.03.09 |
인천의 역사와 문화 (1) | 2023.03.09 |
인천문화 활성화를 위한 제언 (0) | 2023.03.09 |
인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2 (3) | 2023.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