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과 소서노(召西奴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9 00:07:53
인천과 소서노(召西奴)
인천광장 - 김민기 인천언론인클럽회장
인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경주하면 신라의 고도, 불국사. 수원하면 화성과 정조대왕 능참배, 평양성, 개성하면 고려왕건. 전주하면 이성계, 전주이씨, 남원하면 성춘향 등 어느 한도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그 도시의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인천은 항구도시 외 별다른 게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 요즘 인천국제공항과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생각날 뿐, 역사적으로 오랜 도시 치고는 그 도시의 과거가 뚜렷한 것이 없다.
지난달 인천사랑운동 시민협의회가 '백제의 건국실화와 소서노'란 제목으로 문학산 공원화를 위한 제2차 학술 심포지엄을 가졌다. 이날 발표자로는 공주대 사범학과 정재윤 교수의 '백제건국 설화 엿보기' 차옥덕(소서노 여왕 기념사업회장)교수의 '소서노, 비류, 매서홀' 이란 제목의 문학산 역사공원화의 지향성 이란 주제 발표가 진행됐다. 또 약정토론으로는 김기섭 서울역사박물관 전문위원과 채미화 경희대 사학과 강사가 토론을 벌렸다.
이날 심포지엄 결론은 한마디로 소서노와 비류는 우리 인천의 역사를 연 시조로 모셔야할 자랑스런 조상의 뿌리라는 것이다.
2천년전 백제건국의 여제로 떠오르고 있는 소서노(召西奴)는 과연 누구이며 실존 인물이었는가.
60만년전 구석기 이후 면면히 이어온 한민족 역사에서 여성의 역사를 찾아나간다면 더 많은 여성의 활약상이 있을지 모르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1931년)에서 처음 소서노를 '조선의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제왕일 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두나라를 세운 이'로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서노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위대한 여성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상고사 제2장 3절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제1항의 제목에서도 '소서노 여대왕의 백제건국'이라고 표기돼 있고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 뿐더러 고구려 백제를 세운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요즘 TV드라마 주몽에 나오는 소서노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도 고구려 창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소서노라고 명시하고 있다. 소서노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조명해보면 소서노는 졸본부여 5부족중의 하나인 계류부의 공주로서 우태와 결혼해 비류, 온조 두 아들을 두었으나 남편 우태의 죽음으로 20대에 홀로된 몸으로서 고조선이래 뿔뿔이 흩어진 한민족을 통일하고 고조선이 다스렸던 옛 고토(古土)를 회복하자는 계류부 족장인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여걸이라는 것이다.
당시 주몽이 북부여에서 쫓기던 때에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창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주몽은 고구려를 창업한 후 소서노를 정실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전실 자식인 비류와 온조를 친자식처럼 대했다고 한다.
그 후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와서 태자로 삼자 비류와 온조가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이 두려워 어머니 소서노와 오간, 마려 등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그 때 비류가 미추홀. 지금의 문학산 일대에 정착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천이 비류 백제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지금도 문학산 일대에는 문학산성과 비류 우물터가 존재하고 있다.
지금 우리 인천은 오랜 역사가 숨쉬고 있으면서도 두렷하게 뿌리나 근거가 없는 도시다. 시민의 긍지와 자긍심을 살리고 후손들에게 자랑스런 역사와 그 정신적 뿌리를 물려줘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몫이다. 역사는 만드는 것이다.
요즘 중국을 비롯해 일본 등 주변국들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남의나라 역사를 자기 것으로 뺏어가는 무서운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 인천은 그 동안 부끄럽게도 갖고 있는 역사마저도 지키지 못해 많은 것을 잃고 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우리의 역사적 문화의 뿌리를 찾고 개발해 가꾸는 일에 나서야 할 때다.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가 이를 바탕으로 인천의 발상지 문학산의 역사 공원화를 추진하고 있다. 인천의 역사를 밝히고 문학산을 역사공원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이 많다.
무엇보다도 믿을만한 자료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 문학산성과 주변지역에 대한 기초 자료가 있어야할 것이며, 인천이 미추홀이며 비류집단의 근거지였다는 믿음을 사실로 입증하려면 먼저 빈약한 물질적 근거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김민기 인천언론인클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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