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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극장이야기

by 형과니 2023. 4. 12.

극장이야기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7-27 22:52:22

 

가마니 깔고 지린내 참으며 총천연색에 빠졌지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극장이야기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지금은 이미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해서 쉽게 들어 볼 수 없는 말이 저 1950년대,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극장마다 관객의 발길을 붙잡는데 쓰던 비장의 무기요, 최첨단 신식 영화 용어였다. 어둠침침한 흑백 영화에서 그리고 35mm의 협소한 화면에서 장면 장면이 화려하고 생생한 천연색에다 종래의 화면에 비해 배 이상 넓어 보기에도 시원한 와이드 스크린의 새 영화들이 쏟아져 나올 때니 관객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이렇게 침을 발라 선전할 만도 했다.

 

 

아무튼 이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가 대단한 유혹이었던지 1958년 한 해 동안 인천에서 영화를 관람한 연관객수가 무려 755848명에 달했다. 인천 인구가 고작 30만 정도였을 때니까 시민 모두가 1년 동안 두 차례 이상 영화를 본 셈이 되는 것이다. 휴전 5년 후의 시절이면 누구에게나 호구(糊口)문제가 지상 과제였을 터인데도 영화관을 찾은 발길이 이런 정도인 것을 보면 우리 인천 시민들이 영화, 연극 예술에 대해 가졌던 애정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또한 짐작이 간다.

 

 

1957년 인천의 극장은 애관, 동방, 시민관, 문화 그리고 부평극장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흥행을 기록한 극장 수가 앞의 5개 극장 외에 장안, 인천, 미림, 산곡동의 서부극장 등 9개로 늘어난다. 크기로는 시민관이 가장 커서 1,000석 규모였고 인천극장이 900석 그리고 애관극장이 650석으로 그 뒤를 이었다. 애관, 시민관, 장안, 인천, 미림 등은 영화와 연극을 흥행 종목으로 했기 때문에 이들 극장에서는 종종 임춘행 악극단이니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이니, ‘이은관의 배뱅이굿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관객의 총 수는 실상 순수한 영화 관람객 수만이 아니라 악극단 관객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후에 다투어 문을 연 극장으로 세계극장, 자유극장, 현대극장, 조금 더 뒤에 오성극장 등이 있다. 이 중 세계극장이 크게 빛을 못보고 진즉에 문을 닫았다.

 

 

정식 극장은 아니었지만 도원동 덴뿌라 골목으로 해서 유동 쪽으로 내려가는 샛길 언덕에 있던 이른바 용사회관이라는 허름한 극장이 생각난다. 6·25 참전 상이용사들이 운영했다고 하는 이 극장은 외곽 전면만 극장 모습이었지 천막 지붕에 관람용 의자가 부족해서 극장 안의 뒤쪽 경사진 맨땅에는 그냥 가마니나 푸대를 깔고 앉는 그런 극장이었다.

 

 

여기서 인어공주 어쩌구 하는 온통 빗금 투성이, 낡디 낡은 무성영화를 처음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토키도 없고 시네마스코프도 아니었지만 화면은 천연색이었다. 높다란 영사실 창문 옆에 앉아 멋들어진 목소리로 주워섬기던 변사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한때는 내 형이 매일 저녁 나를 청중으로 삼아 이 변사의 흉내를 내어 몹시 지치게 하기도 했다. 이 용사회관은 오래지 않아 문을 닫은 것으로 기억한다.

 

 

최초의 극장 협률사

 

 

1960년대 초반 무렵에 생겼다가 사라진 도원극장에서 괴인 드라큘라라는 영화를 보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눈이 몹시 내린 다음날 이었는데 저녁 8시 무렵, 마지막 날 마지막 상영이었다. 날씨는 살을 에듯 추웠고 더구나 개봉관도 아닌 변두리 극장에 이미 여기저기 재탕 삼탕 우려낸 영화를 마지막 상영 날에 갔으니 관객이 있을 리 없었다. 텅 빈 극장 안에는 관객이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네 군데에 놓여있는 연탄난로는 다 꺼 버렸고 맨 뒤쪽에만 하나가 가물가물 명맥을 잇고 있었다. 열 명의 관객이 난로를 둘러싸고 앉거나 서거나 한 채 영화를 보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얼마를 보다 보면 두 사람이 중간에 나가고 또 얼마를 보다 보면 한 사람이 춥다고 투덜대며 나가고 하는 것이었다. 극장 안은 점점 추워지고 사람은 줄고 게다가 워낙 음산한 영화여서 으스스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참으로 어렵게 표를 구해 관람의 행운을 잡은 나로서는 이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의 멋진 영화를 두고 중간에 자리를 뜨기가 여간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또 얼마가 지났을까. 어느새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남은 사람이라곤 어느 남자 관객 하나와 나 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피터 커우싱의 충혈된 눈과 피 흐르는 송곳니보다도 그 사람이 언제 불시에 일어나 나가 버릴까, 그것이 더 조바심 나고 두려웠던 것이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당시의 극장들은 시설이나 관리나 어느 것 하나 초라하고 옹색하지 않은 게 없었다. 몇 차례의 개보수 끝에 지금은 아주 안락한 환경을 구비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앉아 있기가 괴로울 만큼 지린내가 진동했던 송현동의 M극장, 무슨 연유였는지 주변에 온통 뱀탕집이 늘어서 있던 문화극장. 이 극장이 몇 해 전 피카디리라는 이름으로 면모를 일신하면서 정문 매표소도 금곡동 쪽에서 송림동 쪽으로 방향을 옮겼지만 경영난에 봉착했는지 끝내 문을 닫고 그 자리에는 높다란 빌딩이 들어서 있다. 문화극장에서는 학생 시절 리버티 바란스를 쏜 사나이라는 서부 영화를 단체 입장했던 기억이 난다.

 

 

없어진 동방극장과 그보다 훨씬 뒤에 생겨났다가 사라진 키네마극장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근처에는 동성연애자들이 있어 정신없이 영화에 빠져들다가는 봉액을 만나기가 일쑤였다. 어찌어찌 극장 기도의 환심을 사서 교복 바람에 입장하는 경우, 임검 순경의 눈을 피할 겸 관객이 잘 앉지 않는 맨 앞줄에 푹 파묻히듯 숨어서 영화를 보게 되는데 이 약점을 노렸던 것인지 어느 결에 못된 남색가가 다가와 더운 숨결을 불어넣거나 넓적다리를 쓰다듬곤 하는 것이다.

 

 

1894~5년 인천의 거부 정치국(丁致國)이 세운 인천 최초의 극장 협률사(協律舍)는 한때 축항사(築港舍)라고도 불리다가 1925년경부터 애관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그밖에 일본인극장 인천좌(仁川座)와 가부키좌가 있었고 현 외환은행 자리에 표관(瓢館)이라는 극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아득한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CGV 같은 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대규모 상설 영화관이 등장하고 또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영화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극장들도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의 매력에 이끌려 극장 앞에 줄을 서던 그 시절은 영영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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