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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졸업 사인지

by 형과니 2023. 4. 11.

졸업 사인지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7-12 22:32:41

 

인생을 다 졸업한 듯 시건방을 떨었다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졸업 사인지

 

매년 2월 무렵이면 전국의 초···대 각급 학교에서 졸업식이 거행된다. 졸업을 함으로써 동료들과 헤어지게 되고 또 정들었던 교정과 선생님들을 떠나게도 된다. 이런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60년대에 중학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 세대들은 졸업 때가 오면 이른바 사인지라는 것을 만들어 서로 돌렸다.

 

사인지는 그것을 작성하는 사람의 개인 신상에서부터 취미, 기호, 장래희망, 포부 같은 것들을 묻는 수십 가지의 설문과 작성자의 자유로운 의견을 기록할 수 있게 자유 서술란을 둔 일종의 개인 정보 기록지였다. 그러니까 그것 한 장만 있으면 친구의 모든 것을 추억할 수 있는 글로 쓴 앨범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사인지가 생겨난 것은 그 당시가 오늘날처럼 교통,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번 헤어지면 좀 해서 만나기가 어려우니까 그렇게라도 추억거리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아마 70년대쯤까지는 이 촌스럽고 낭만적이며 아름다웠던 행사가 그럭저럭 남아 있었다가 급기야 첨단 통신 수단이 출현하면서 사라지고 만 것 같다.

 

이 사인지를 제작하던 대표적인 곳이 근래까지 중구 관동에 있던 미문사(美文社)였다. 제작 최저 단위는 보통 100장이었고 인쇄소는 소위 가리방을 긁는다는 등사 방법이거나 철거덕거리는 활판 인쇄를 했다. 종이가 귀한 때였지만 사인지만큼은 초록색, 노란색, 혹은 분홍색 종이를 섞어 알록달록하게 만들었다.

 

사인지는 친구들이나 아는 여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가 글이 채워지면 회수하는 것인데 그것이 여간 녹녹한 일이 아니었다. 시절이 오늘날과 달라서 특히 여학생에게 전해주거나 전해 받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목격이라도 되는 날이면 삽시에 야릇한 소문이 온 학교에 퍼지게 되고 이해심 없는 어른들이나 호랑이 같은 선생님의 눈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인지 수량의 많고 적음이 인기의 척도가 되었으니 누구나 은밀하면서도 다른 한편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인지에는 게리 쿠퍼나 오드리 헵번, 제임스 딘,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외국 배우를 적는 난도 있고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존 스타인벡의 불만의 겨울같은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쓰는 항목도 있었다. 취미 난에는 분명 독서라고 적긴 했어도 그러나 그 책들은 제목만 외우고 있는 것들이었다.

 

나의 이상형 여성은?’ 하는 질문에는 무턱대고 현모양처형이라고 시건방을 떨기도 했고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가장 선호하는 음악인 것처럼 적기도 했다. 들뜬 감정은 김소월, 박목월, 김영랑, 조지훈을 또 얼마나 팔았던가.

 

미래에 대한 축복의 말을 쓰는 난은 그런대로 솔직하게 적어나갈 수 있지만 사인지 임자에게 대한 인상기꼭 하고 싶은 말같은 것을 기록할 때는 가슴속에 싹트고 있는 그 마음을 그대로 적을 수가 없었다. 고스란히 적었다가 일이 잘못되는 경우의 낭패가 두려웠고, 또 실제로 명문(名文)을 쓰고 싶은데 그러하질 못해 얼버무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때처럼 필력의 무딤을 한탄했던 적도 없었으리라.

 

두어 달쯤 이렇게 사인지를 주고받다가 보면 어느덧 2, 졸업식 날이 코앞에 다가온다. 졸업 선물은 으레 일기장이었다. 고모네 누나나 이모가 동인천 옛 대한서림에 데려가서 위인전, 또는 문학 책 한 권에 얹어 학원사(學園社)나 성문사(成文社) 같은 곳에서 나오던 학생일기라는 것을 사는 것이었다. 매 페이지에 동서양의 속담과 성현의 말씀, 경구 같은 것이 적혀 있고 절기표나 도량형 환산표, 세계지도, 6·25 참전국, UN 가입국에다 일상 토막 상식 같은 것까지 수록한, 책처럼 장정이 번듯하게 생긴 일기장이었다.

 

이런 일기장 외에도 혹 운이 대통하면 중앙동 양지공사(洋紙公司)에서 팔던 촉이 금으로 되었다는 파카 만년필을 손에 넣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스케이트를 선물로 받을 수도 있었다. 때로는 새 가방이 졸업 선물로 낙착되는 일이 있기도 했다. 이런 것은 그나마 그 시절 제법 한다하는 집의 졸업 선물이었는데 그 내용이나 질에 있어서 아마 오늘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요행히 여학생 친구가 보내오는 선물이라면 예쁜 벙어리장갑이나 목도리 같은 것이 있었다.

 

, 그때는 졸업장을 넣는 통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식장 입구에 행상들이 죽 늘어서서 코사지와 함께 팔았다. ‘각쪼가리라고 부르던 두꺼운 종이로 만든 통에 석회로 문양을 만들어 붙이고 칠을 해서 만든 것이 그 시절 유행했다. 빛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니 친구들도 모조리 그 통들을 하나씩 들고 있다.

 

식이 끝나 교문을 나서면 식구들과 점심을 위해 가는 곳이 중국 음식점이었다. 메뉴는 탕수육에 자장면을 곁들이는 것이다. 참으로 중국집은 우리들의 빛나는 졸업을 위해, 그 성찬을 먹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 때는 그것으로 인생을 다 졸업한 듯 착각한 남녀, 그 또래들이 그만 신성루 뒷방에서 배갈을 마시고는 타오르는 목을 잡고 헐떡이면서 한껏 망발을 했던 기억도 있다.

 

반드시 졸업 때에만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교과서 따위를 팔아넘기는 일이 있다. 학년이 오르고 또 졸업을 하게 되면 전 해에 쓰던 교과서와 참고서가 아주 중요한 용돈 조달원이 되었다. 필요가 없게 된 책은 창영학교 앞 헌 책방 거리에 내다 파는 것이다. 낙서를 하지 않고 얼마나 깨끗이 사용했는가에 따라 값을 쳐서 돈을 받았다.

 

철로 건널목을 내려서 배다리 방향으로 돌아 두 번째 집이었던가, 상호는 잊었지만 긴 얼굴에 누런 안경을 쓰고 내 책을 받아주던 그 아저씨는 지금 어떻게 되셨을까. 그 아저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혼비(HORNBY) 영영사전을 팔았다가 대학에 입학해서 다시 사야 했던 해프닝!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인천개항장 풍경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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