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변 200m 내에서 인분 사용을 단속하라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6-26 15:20:53
대로변 200m 내에서 인분 사용을 단속하라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13. 뽀얀 먼지를 쓴 추억의 신문
옛날 신문을 들추다보면 그때 그 시절과 오늘이라는 시대가 이토록 차이가 나고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반세기도 채 안 되는 불과 40여 년 앞선 거리에 있는데도 그때의 생활 모습들이 마치 뽀얗게 먼지를 쓰고 있는 먼 옛날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중구 관동 2가 3번지, 모 지방지 단기 4290년 3월 16일자, 2면 짜리 신문의 이 날 톱기사는 “쿠바에 무력 폭동이 발생했다.”는 하바나발 로이터통신의 외신이다. 그 폭동이 4292년 쿠바 사회주의 혁명의 시초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바티스타 대통령 일가는 무사하며 대통령 관저로 침입한 폭도의 일단이 격퇴되었고 또 하바나 시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도 끝나고 있다”는 내용이다.
국회에서는 황남팔(黃南八) 의원 외 9명의 의원이 발의한 “절량농가(絶糧農家)와 세궁민(細窮民)구호에 관한 건의안”을 재석 108명 중 90명의 찬성으로 가결시킨다. 이 신문의 사설에서 바로 이 절량농가 문제에 관해 역설하고 있다. 극심했던 춘궁기, 생각하기에도 지긋지긋한 보릿고개 한복판에 서 있던 때였다.
그때 그 시절과 오늘 사이의 유전
49년 전 이 날은 토요일이었다. “3월 6일 재일 교포를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겠다는 해괴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기시(岸) 일본 수상의 용공적 성명을 철저히 규탄하려는” 도민궐기대회가 “상오 십1시부터 인천애국단체연합회 주도리에” 답동 광장에서 개최된다는 기사도 있다. 그때는 대부분의 행사를 토요일에 답동 광장(지금의 답동 사거리)에서 치렀는데 중심지이기는 했어도 차량 통행이 적은 데다가 시청이 가까웠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농사철이 시작되어서였을까. 이런 일도 다 있었나 할 만한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경기도 경찰국에서는 13일 관내 각 서에 대하여 채소 재배에는 절대로 인분을 사용치 말 것과 채소 이외의 농작물에 대하여는 인분 사용도 가하나 시가지와 교외 대로변 근처 2백 미터 거리 내에서 인분 사용을 단속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에야 그렇지 않겠지만 경찰 임무에 밭에 뿌리던 인분을 감시하는 일도 있는 게 매우 희한하다.
기생충의 감염과 전파가 쉬운 채소에는 금지하지만 여타 작물에는 사용해도 좋다는, 비료가 부족해서 인분 사용이 어쩔 수 없었던 당시의 속사정을 읽을 수 있고 대로에서 2백 미터 거리를 띄어 악취를 막아야 하는 경찰의 고충도 행간에 드러나 있다. 농부들의 인분 살포에 대비해 경찰이 줄자 같은 것을 상비하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것이 바로 49년 전 우리 삶의 한 모습, 눈물겨운 자화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거리, ‘도민증’ 때문에 경찰에 관련한 기사를 하나 더 소개한다. 사건인즉 “동인천경찰서에 근무하는 문 모 순경이, 다량의 술을 마시고 용현동 550번지 노상을 통과하던 숭의동 지성이발관 근무, 천 모 씨를 불심검문, 도민증 제시를 요구하자 ‘너 따위에게 도민증을 보일 필요가 없다’고 항거, 문 순경이 천씨의 안면을 2회 구타하고 이때 천이 격분 근처 광산이발관에 달려가 가위를 가지고 문 순경의 우측 흉부를 찌른 것”이었다.
말썽이 난 이 도민증은 어느 도에 거주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신분증으로 발급자가 도지사였는데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이었다. 흔히들 사투리로 도민증을 ‘되민쯩’이라고 발음해서 웃기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사라진 약 선전과 학생모집 광고의 추억
광고를 보면 그 당시 생활상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환절기였던 탓인지 감기약 선전과 신경통 광고가 특히 눈에 띈다. 유행성 감기 기침쯤은 문제도 안 된다는 상수제약(上壽製藥)의 백수환(百壽丸)과 같은 회사의 신경통 약 신경환이 크게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신경환은 금곡동에 있던 문화약업사와 이십세기약국에서 판매했는데 가격이 천오백 환(?)이나 되었다. 당시 영화 ‘자유부인’을 돌리던 문화극장의 일반인 ‘봉사 요금’이 2백 환인데 비해 7배반이나 비싼 가격이다.
1947년 미 군정청에서 일본식 유곽 제도를 폐지시켰지만 이미 1902년 일제에 의해 개설되어 근 반세기에 이르도록 뿌리를 내렸던 흔적이라고 할 것인지, 성병약과 “뻑적지근하고 가렵고 좁쌀, 닭벼슬, 또는 사마귀같이 돋는 병”을 치료한다는 싸리재 소재 인천만보당(仁川萬保堂)의 선전 문구도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다. 옛 축현학교 입구, 제일의원의 특설 성병과에서 성병 저항력 시험을 한다는 특이한 광고도 실려 있다. 그 시절 인천 사회의 한 단면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준다고 할까.
여러 사람에게 물어도 아무도 기억을 못하는 낯선 중학교 학생 모집 광고도 끼어 있다. 내동 29번지, 용동 마루턱에 있었다는 청룡중학교(靑龍中學校)가 그곳인데 후기 모집으로 1학년 한 학급을 선발했다. 광고 내용으로 보아 남녀공학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월 19일까지 원서 접수, 무시험 전형이며 입학수속금은 면제라는 것이다.
당시는 4월부터 1학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3월 하순이 되도록 후기 학교는 학생 모집이 가능했다. 아무튼 이 학교가 어떻게 세워졌으며 공립이었는지 사립이었는지, 또 언제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종적을 알 길이 없다. 그 옆에는 후일 선인고등학교에 흡수된 성광중고등학교 학생 모집 광고도 게재되어 있다. 지금 인천대학 자리, 민둥산 꼭대기에 우뚝 서 있던 교사(校舍)가 눈에 선하다. 학교 이름 하나는 환하고 성스러웠는데 속절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신입생 모집을 위해 인천대의숙(仁川大義熟)에서 낸 광고도 보인다. 이 학교에 대해서는 대부분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전동 20번지, 축현학교를 지나 제물포고등학교로 올라가는 경사 길 오른쪽 아래 인천약주인가 하는 양조장 근처 저지대에 있던 전문대학이다. 중학교 시절 단출했던 그 학교 건물을 내려다보며 아침, 저녁 통학하던 생각이 난다.
이 대학은 법정과와 상경과 2개 과, 주야 각 60명을 뽑았다. 지원 자격이 일반 고등학교와 지금은 교육대학으로 승격이 되어 사라진 사범학교 졸업자였고 연령 제한은 두지 않았다. 시험은 국어, 국사, 영어 세 과목 필기고사와 구두시험이었다. “상이군경 자녀에게는 입학금, 등록금에 특전을 부여한다.”는 문구에서 6·25전쟁이 우리 사회에 남긴 아픈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 학교는 “장차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될 경우 해당 학년으로 편입함”이라고 광고를 냈지만 60년대 초반 무렵 문을 닫은 것으로 기억된다.
49년 전의 인천. 신춘 단편 릴레이에 “가마귀 발의 위치”라는 소설을 썼던 심창화(沈昌化) 씨는 벌써 여러해 전에 작고했고 삽화를 그린 박영성(朴瑛星) 화백도 몇 년 전에 타계했다. 낡은 신문지를 펼쳐 놓고 새삼 인간사는 짧고 유전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호 ‘인천개항장 풍경’ 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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