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설 풍경

by 형과니 2023. 4. 11.

설 풍경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7-12 22:25:51

 

무얼 해도 괜찮고 기쁜 꼭 지켜야 했던 그날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설 풍경

 

1950년대 자유당 시절에는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을 구정이라 불렀다. 이승만 대통령이 워낙 서양 풍조에 물든 분이어서 그랬는지, 양력 명절을 쇠도록 유도했지만 좀처럼 구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박 대통령 시절에도 이중 과세는 국력 낭비라 해서 양력 명절을 쇠도록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때문에 공무원들은 어쩔 수 없이 양력 명절에 차례를 지냈다.

 

1950년대에는 무슨, 무슨 이름이 붙은 날에는 무조건 기념식을 했다. 11일도 예외는 아니어서 방학 중이지만 학교에 등교해 애국가를 부르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이런 날에는 으레 기념 노래가 있어서 식이 파하기 전에 반드시 그 노래를 불렀다. 요즘 학생들은 무슨 노래인가 할지 모르지만 11일 새해 첫 날에 부르는 노래도 있었다.

 

온 겨레 정성 덩이 해 돼 오르니 올 설날 이 아침이 더 찬란하다. 뉘라서 겨울더러 춥다더냐. 오는 봄만 맞으려 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

 

얼핏 기억나는 대로 그 노래의 1절이 이랬던 것 같다. 신정이다, 구정이다, 설을 쇠는 가정이 제 각각이어서 동네에도 양력 설날에 설빔을 차려입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우리 집은 음력설 쇤다. 난 그때 새 옷 입을 거다.” 하며 부러운 마음을 다음 한 달 후로 미루는 아이들도 있었다.

 

내가 살던 중구 인현동 쪽은 조금 덜한 편이지만 관동이나 중앙동, 송학동 지역은 양력 명절날에 더 많은 색동저고리가 거리를 수놓았던 것 같다. 그 일대에 관청의 높은 분이나 큰 회사를 하는 분들 그리고 인천 지역 사회 지도층 인사가 많이 살았었기 때문인 듯하다.

 

우리 집은 이른바 구정 집안이었다. 그러나 가세가 더없이 기울었던 50년대 말 어느 해에는 당연히 찾아온 음력 명절에, ‘나라에서도 구정을 쇠지 말라 하며, 더구나 신정이 지난 지가 언젠데 이제 새삼 무슨 설 타령이냐는 타박을 맞았다. 하기사 어린 내게 이렇게 둘러대시던 할머니의 심정은 오죽하셨으랴.

 

설날이 오면 그야말로 눈 오는 날 강아지처럼 즐겁고 행복한 것이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설레는 마음으로 새 옷을 입고 새로 산 양말과 신발을 신는 날. 차례만 지내고 나면 떡국과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날. 그뿐인가. 평소 무섭기만 하시던 아버지도 연방 웃음을 터뜨리시던 날. 이런 호사스러운 날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되었으면.

 

 

 

평소 만지지 못하던 세뱃돈으로 화약과 딱총을 사서 귀가 멍멍하도록 터뜨리는 것도 즐거웠고 윷놀이도 재미있었다. 가겟집에 걸려있는 또 뽑기판에서 10원 짜리 하나를 뽑아 요행히 상품을 받거나, 평소에 먹고 싶던 미루꾸를 한 갑 사서 우물거리는 것도 더 없는 행복이었다.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 리나 박기당의 만화 만리장성을 빌려다 보아도 크게 나무람을 듣지 않았다. 또 누이나 아주머니들의 널뛰기도 볼만했다. 우리 집에는 아주 크고 좋은 널이 있어서 마당에 단골로 널뛰기판이 벌어지곤 했다. 내동의 옥식이네 아주머니의 하늘 높이 치솟던 그 날렵한 모습이란! 정말 이날 하루는 무얼 해도 괜찮았고 기쁘기만 했다.

 

토박이는 거의 없고 조선 팔도 여러 곳 사람들이 다 모여 와 사는 도시가 인천이어서 여기만의 독특한 무슨 설 풍습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 각 가정에서야 어떻게 했을지는 몰라도, 어느 집이나 대동소이하게 떡국 같은 세찬을 준비해 낸다거나 어른 아이 모두 설빔을 차려 입는 일, 그리고 밖에서는 남정네들이 모여 벌이는 막걸리 추렴 윷놀이나 드문드문 모여 널뛰는 여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정도가 인천의 설 풍경이었다.

 

물론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다. 그래서 밤새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려다 끝내 쓰러져 잠들어 버리고, 놀라 깨었을 때는 이미 아침! 그러나 거울 속의 눈썹은 누군가 밤새 밀가루만 묻혀 놓았을 뿐 여전히 검은 채로 그대로 남아있던 재미난 추억의 설 풍경도 있었다.

 

그밖에 설날 저녁에는 신발을 방안에 들여놓고 자던 생각도 난다. 신을 밖에 벗어 놓고 자면 귀신이 와서 신어보는데 귀신과 발이 맞는 사람은 일 년 내내 재수가 없다 해서 안에 들여놓고 자는 풍습이었다. 이 귀신을 막는 방법으로는 를 놓는다는 이야기가 곁들여졌다. 가루를 치는 고운 체를 잠자기 전에 마당이나 문 앞에 걸어 놓으면 귀신이 들어오다 보고 그 작은 구멍들을 일일이 센다는 것이다.

 

체의 구멍이 하도 많아 세다가는 잊어버리고, 세다가는 잊어버리고 해서 밤새 시간을 다 보낸 까닭에 신은 신어보지도 못한 채 첫닭이 울면 그냥 서둘러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신발 분실을 막기 위한 경고의 설화가 아닐까 싶다.

 

좀 커서는 친구네 집을 돌며 세배를 하고 둘러앉아 나이롱 뻥을 치거나 이른바 섯다라는 내기 화투를 하는 것이 설날의 정해진 코스였다. 드물게는 마작을 건드리기도 했다. 오후쯤에는 사복 차림에 털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애관이나 동방 극장으로 달려가 인파 속에 파묻혀 설 특별 프로를 보기도 했다. 학생인 줄 뻔히 알았을 터인데도 대목을 보려는 극장의 기도나 단속해야 할 임검 순경이나 다 같이 못 본 체했다.

 

그러고 보면 설날 전후의 행사는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설 전날은 동네 목욕탕에서 지난여름 이후 처음으로 목욕을 하는 것이다. 무릎이고 발목이고 새카맣게 앉은 때를 이 날 한 번에 벗겨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한민족 남녀 전체가 거의 비슷했으리라.

 

하여튼 이렇게 새 몸뚱이를 만들기 위해 좁은 욕탕에서 애 어른이 아귀 끓듯 하는 것도 그야말로 설에 따른 연례 행사였다. 천정과 탕의 밑바닥이 연결되어 있어서 가끔씩 물 데우는 화부에게 여기 더운물 좀 더 줘요하던 여탕 쪽의 소리가 아련하게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욕탕 물 위로 둥둥 떠다니는 때꼽재기를 건져내던 잠자리채며.

 

이발소 역시 장사진을 치기는 마찬가지였다. 벼르고 별러서 명절 전날에 고작 빡빡머리를 깎던 추억. 그리고 가래떡을 뽑기 위해 방앗간 앞에 몇 십 미터씩 늘어서는 일도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거사였다. 우리 집 흰 가래떡이 방앗간 떡 기계에서 줄줄 뽑혀 나올 때의 기쁨과 풍성한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를 따라 배다리 중앙시장에서 새 신을 사던 그 뿌듯했던 기억, 우리처럼 설빔을 사기 위해 나선 수많은 사람들, 그 설레는 마음들. 신포 시장의 생선전이나 넓은 동인천 채미전, 모전 거리 일대는 차례 상에 올릴 제수 장만을 위해 나온 아주머니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70년대까지는 볼 수 있었던 낯익은 설 풍경이었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인천개항장 풍경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