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관의 추억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7-18 22:09:12
공원을 질러 서쪽으로 가면 필경 ‘만두소’ 된다!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청관의 추억
공화춘 건물
청관은 이른바 청국지계(淸國地界)를 우리 식으로 부르는 말이었다. 1883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이 먼저 인천에 지계를 설정하자 아차, 싶었던 청국이 서둘러 조선과 조약을 체결해서 생겨난 선린동 일대 5천 평에 달하는 지계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지금의 화교 학교 자리에 영사관이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당시로부터 지금까지의 여러 사정과 곡절은 차치하고라도 우선은 1884년 인천구화상조계장정(仁川口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어 동순태(同順泰)니 동순동(同順東)이니 인합동(仁合東)이니 동화창(東和昌)이니 하는 특이한 이름의 화상(華商)들이 주한 총리 원세개(遠世凱)를 따라 건너와 인천 땅에 자리 잡았던, 실로 백 십여 년 만에 화교촌이 다시 기지개를 켠다는 점에서 감회를 느낄 수 있다.
이들은 광목, 옥양목 등의 기계 직물과 밀가루, 설탕, 권련, 비누, 성냥 같은 신상품을 앞세워 단번에 상권을 휘어잡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그리고 또 가장 즐겨 먹는 대표적인 음식인 자장면(참, 국민 모두가 ‘짜장면’이라고 발음하고 있는데 어째서 굳이 ‘자장면’이라고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을 발상시킨 까닭에도 더욱 감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벌써 몇 십 년 전에 문을 닫고 속절없이 퇴락해 가고 있는 유명했던 요리점 공화춘이 정말 자장면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지구상 최초의 발상지였다는 한정(限定)만큼은 썩 신빙이 가지 않는다.
인현동, 내동 인근에 살았으면서도 1950년대 어린 시절에는 여간해서 청관에 가 볼 기회가 없었다. 아니,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두려움 때문에 가지를 못했다. 예닐곱 살짜리가 만국공원을 넘어가야 하는 거리도 거리였지만 어머니가 하신 단단한 당부가 나를 두렵게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절대로 공원을 질러 서쪽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는 것과 그런 일이 있을 경우 필경 나는 ‘만두 속’ 즉 만두소가 되고 말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다시는 내가 어머니도 아버지도 뵐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 또 왜 어머니가 그런 지나친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어쩌면 수호지나 서유기에 대해 잘 알고 계셨던 당신의 지식과 상상력이 반대로 겁이 아주 많으셨던 성품과 합쳐져서 그토록 괴이한 공포를 자아내게 했는지 모른다. 더구나 사변 통에 폐허가 되어 드문드문 비어 있는 컴컴한 청관 건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기서(奇書)에 등장하는 괴담 분위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그러나 사실은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가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청관의 청상을 대국 사람이라고 높여 불렀으나…, 깔볼 만한 몰골이기도 했다. 싼 품값을 아껴 가며 지내는 빈곤하고 불결한 살림과 툭하면 아편 밀매다 부녀자 유괴다 하는 범행을 저지르는 음흉한 성격 등 그들의 생활 실태를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쓴 것으로 보아 그런 혐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국민학교 나머지 4년을 시 외곽에서 보내고 1960년 중학생이 되어 다시 옛 집 근처로 왔을 때, 비로소 나는 ‘겁이 가신 마음으로’ 청관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일요일 미술반 친구들을 따라 청관에 갔고 거기서 궁금하기만 했던 그곳 풍정을 마음껏 뜯어보고 감상했다.
여전히 폐허처럼 보이는 부서진 건물과 거미줄과 검거나 청회색 빛깔의 옷을 입은 음울하게 보이는 사람들. 그러다가도 한 번 입을 열었다 하면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이 나는 사람들. 링처럼 생긴 커다란 귀고리를 달고 뒤뚱거리며 걷는 전족(纏足)을 한 작은 발의 여인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주름살 많은 노인들이었다. 인천 출신 소설가 오정희(吳貞姬)가 쓴 「중국인 거리」가 바로 이런 음산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폐허가 된 중국식 연립주택
그 시절 청관은 또 화가 지망생들의 사생 장소일 뿐만 아니라 영화 로케 장소로도 유명했다. 일요일이면 많은 인천의 화가들이 청관 골목골목에 모여들어 거리를 스케치하고 물감을 칠했다. 적막하고 을씨년스럽기는 했어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이국 풍정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들 모여든 것이다.
지금까지도 거의 그대로 중국 건물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중구청에서 청관을 향해 가면서 언덕을 넘기 전 오른 쪽 첫 번째 집. 그 집에 미나라는 중국 소녀가 살았다. 동그란 얼굴이 중국인치고는 아주 드물게 희고 귀여웠다.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이 일요일이면 이 아이를 마스코트처럼 예뻐해 주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녀도 이제는 어느덧 40 중반이 넘은 나이일 것이다.
기억에는 고 전창근(全昌根) 씨가 감독 겸 안중근 의사 역을 맡았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우리들의 의기를 돋아 준 ‘의사 안중근’이라는 영화와 1959년, 이듬해 대통령 선거를 겨냥해 임화수(林和秀)가 제작했다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이라는 영화에 이 청관 거리가 독립군 비밀 회합 장소나 하얼빈 같은 곳으로 나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청관 언덕 서쪽으로는 풍미(豊美)집 혼자만이 만두를 쪄 내고 간단하게 자장을 볶거나 배갈을 내놓았을 뿐 거리 전체가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하인천 역전 파출소 옆에 내려앉았다가 올라온 맞은편의 대창반점과 함께 지금은 매우 번창해져 있다. 동순동은 물론 문방구를 파는 다른 상점도 열렸고 음식점들도 많이 생겨났다.
풍미집 쪽에서 해안 성당 앞으로 돌아 시내로 넘어오는 길에는 그 시절 한두 군데 남아 있던 중국집들이 노상에 가마를 펴고 해삼을 널어놓은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무척 비싼 음식이라는 것만은 알고서 슬슬 지나치다가 잽싸게 한두 쪽을 집어 내달려 도망쳐 오는 것이다.
그리고는 차오르는 숨을 진정하고 골목길에 숨어 단단한 해삼 덩어리를 입에 넣어 보지만 그저 찝찔한 느낌 외에는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던 철없는 시절의 기억도 떠오른다. 요즘 주말이면 서울, 부천 등지 사람들도 가족을 이끌고 이곳 청관을 찾는다고 한다. 중국 정취도 느끼고 음식 맛도 즐기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쨌든 120년 만에 다시 청관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호 ‘인천개항장 풍경’ 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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