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보는 날이니 당연히 춥지”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8-09 17:55:12
애간장이 타고 온통 누린내가 진동할 일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시험 보는 날이니 당연히 춥지”
‘과연 시험을 없앨 수는 없는가.’
이것은 시험 공부라는 지옥 같은 압제에 시달리면서 지구상의 문명한 인류 저마다가 무릇 한 번씩은 심각하게 회의하던 명제일 것이다. 필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험 제도의 철폐를 때로는 몇이서, 때로는 혼자, 독립 운동하는 심정으로 고고히 외쳐 보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완강한 학교와 선생,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창피와 핍박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학교를 떠난 지 근 30여 년. 오늘에까지도 이런 저런 시험이 시퍼렇게 살아서 내 아이들까지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 나뿐이랴. 내 선배도 그랬고, 내 선배의 선배도 그랬으니, 과연 시험이라는 것은 문명한 인류가 존속하는 한 결코 없앨 수는 없는 제도인 모양이다. 아무튼 어차피 닥쳐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옛날 시험 풍속은 어땠고 오늘날 풍경은 또 어떤지 한 번 살펴보는 것도 시험에 저린 오금을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한민족 전체가 ‘수능 시험’하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아마 “어련할까? 오늘이 무슨 날이여? 애들 수능 보는 날 아닌가? 당연히 추워야지.”일 것이다. 무슨 조화인지 영상의 기온에 포근하고 멀쩡하던 날도 수능만 닥치면 예외 없이 영하로 곤두박질을 치고 사나운 북풍이 몰아치거나 눈이 퍼붓기를 십여 년. 그러니 한민족 전체가 수능 날씨만큼은 기상대 예보를 보고 듣지 않아도 척척 알아맞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문교부인지 교육부인지 거기 장관부터 택일하는 담당자까지 그 공교로운 조화에는 정말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각급 학교의 1학기 시작이 4월에서 3월로 당겨지는 바람에 자연 입학시험 치르는 날이 정월, 엄동설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코를 베일 듯 추운 것이 당연했는데 이 수능이란 것은 12월 초나 11월에 치르는 것이어서 유독 추위 문제가 더 부각된 것이다.
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능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어서 하늘도 반대의 뜻으로 날씨를 궂게 하는 것이니 폐지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를 펴기도 하지만 그것은 시정의 갑남을녀들이 입심 좋게 하는 농담이며, 그저 해마다 금년만이라도 날씨가 좋아 그나마 아이들이 덜 고생하도록 천우신조를 기원할 뿐이다.
1960년대에는 국가고시 비슷한 것이 잠시 있었다, 없어졌고 입학 시험은 각 대학마다 별도였다. 시기는 물론 전국이 동시였지만 전기, 후기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늘날 전국의 고3생들이 일시에 치른 수능 점수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의 대학에 너댓 번의 입학 지원을 하는 어수선하고 정신 산란한 제도는 아니었다. 때문에 그렇게 나라 전체가 눈치와 한숨과 안달과 호들갑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더불어 당시에는 고3 담임 선생의 역할이 컸는데 대부분 제자들의 실력과 적성을 면밀히 파악해서 그에 맞는 대학을 결정해 놓은 터라 더욱 오늘날 같은 법석을 피우지 않고 차분하고 고요한 입시를 맞을 수 있었다. 거기에 집안마다 아버지의 체통이 하 엄중했던 것도 나라가 입시 때문에 그렇게 난리를 치르지 않고 무게를 잡은 한 원인이 되었다.
어른들께서는 시험 당일 아침 일찍 ‘출정’ 인사를 여쭙고 고사장을 향할 때조차도 급제하라는 격려의 말씀은 속에 두시고서 그저 “흠, 흠” 헛기침만 하시는 게 고작이었다. 나머지 식구들도 분위기만 다소 엄숙했을 뿐 평소와 진배없었다. 다만 대문까지 따라 나오신 어머니만 멀어져 가는 당신 자식의 뒤 꼭지에서 간절한 기원의 심사와 함께 오래 오래 그 안쓰러움을 삭이시는 것이었다.
그때는 입시 음식이라고 별 다른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요즘 TV에는 입시생들을 위한 영양 요리니, 간식이니 하며 유명 요리 연구가들이 나와 단백질, 비타민의 성찬을 늘어놓지만 그때는 매일 먹는 밥 세끼뿐이었다. 간혹 어쩌다 때 없는 고깃국을 먹는 경우가 있지만 그 국의 양이 식구 누구에게나 공평했을 뿐만 아니라, 또 먹게 된 경위에 대해 식구 누구도 함구로 일관한 까닭에 반드시 입시를 앞두고 있는 ‘나’를 위한 특별식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함구를 한 것은 아마 시험 당사자의 정신적 부담을 덜어 주고 훗날 가난한 집안에 혹 일어날지도 모르는 작은 말썽을 사전에 막기 위한 어른들의 슬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당시 음식에 관련해서 가리는 것이 있었다면 오직 미역국이나 낙지, 이 두 가지가 밥상 근처에 절대 얼씬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같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 때는 바나나를 거의 볼 수 없는 시절이어서 바나나가 금기의 음식물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부잣집은 혹 어땠는지 알 수 없으나 부적 같은 것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절이나 교회에서 내 놓고 치성을 드리는 일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 자식을 붙이자면 남의 자식이 떨어지는데 그런 이상한 마음의 치성을 부처인들 예수인들 들어 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머니께서 봄에 나물을 하러 가셨다가 도마뱀을 발견하시고는 그 놈이 급히 떼어 버리고 간 꼬리를 내 옷깃에 나 모르게 넣으신 적이 있다는 말씀만 들은 적이 있다.
그때야 초콜릿이든 사탕이든 요즘처럼 발달을 하지 못해 그런 것을 가지고 수험생들을 격려하지만 않았다. 할머니가 사두셨다가 슬며시 내주시는 찰떡이나 갱엿이 고작이었다. 떡에 과자에 사탕에 초콜릿, 그리고 잘 풀라고 휴지, 잘 찍으라고 포크, 또 잘 보라고 거울! 부적이라고 해야 할지 음식이라고 해야 할지, 여자 친구 남자 친구 할 것 없이 이렇게 한 보따리씩 안겨 주는 요즘과는 정말 딴 세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세태를 부추기고 농간해서 초콜릿이나 과자 업자들이 수능과 입시 특수를 단단히 본다는 말도 듣는다. 시험의 중압감 때문에 누군가가 괴로우면 누군가는 그것을 사업이나 부로 바꿔 즐거워지는 것이 인생의 이치인지 모르겠다.
1970년대 중반 무렵, 평준화라는 것이 생길 때까지는 중학교도 입시를 치렀는데 이 코 찔찔이 꼬마들을 따라 수험장에 온 부모는 거의 없었다. 요즘 어머니들처럼 수능 시험을 보는 자식을 위해 하루 종일 교문에 붙여 놓인 엿 덩이 밑에서 몸의 반은 얼어붙어 초죽음이 되는 일은 없었다. 마음 켕기기야 그때 어머니나 지금 어머니나 마찬 가지련만 몇 십 년 사이에 참으로 크게 변했다.
금년에도 아이들이 장차 어떤 인생을 살게 될는지 상당히 영향을 미칠 수능을 치르게 된다. 일류만이 최고가 아니라며 평준화를 만든 사람들이 오히려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기를 하려 한다. “얘들아, 속지 마라.” 이렇게 외쳐야 할 것인지…. 아무튼 해마다 수능 날이 다가오면 춥지나 않기를 바랄뿐이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호 ‘인천개항장 풍경’ 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