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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흐르는 팝 선율

by 형과니 2023. 5. 1.

흐르는 팝 선율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8-06-03 12:57:38

 

꼬부랑 노래, 맘보바지, 깊숙한 풀밭, 다방 그리고 봄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흐르는 팝 선율

 

 

봄은 어느 해나 마찬가지로 늘 똑같은 훈풍과 향기 가득한 꽃가루와 촉촉한 비를 뿌리며 우리에게 오지만 그것을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같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1960, 4·19와 더불어 중학생이 된 그해 봄은 특히 설렘 그것이었다. 어려운 입학시험에 급제를 하여 중학생이 되었다는 기쁨뿐만 아니라 몸 저 밑바닥 어느 구석에서 아련하게 무슨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 오른 수목 사이로 보이는 백악(白堊)의 기상대 건물이 꿈만 같았고 앉아 내다보는 창 밖의 풍경이 그렇게 망연하면서도 어지러울 수가 없었다. 학과 공부는 점점 멀어져 갈 뿐. 나나 내 또래들이나 첫 인생의 봄은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던 서양노래들

 

중학생인 우리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고 할까, 아니면 들쑤셔 놓았다고 할까.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서양노래였다. 페티 페이지나 브렌다 리, 브라더스 포, 짐 리브스 같은 가수들은 정말이지 꿈이며 우상이었다. 특히 페티 페이지가 부른 체인징 파트너즈는 그 애상적이고도 감미로운 선율 때문에 며칠을 걸려서라도 가사와 곡을 꼭 외어두지 않으면 안 되는 명곡이었다.

 

그렇게 새로 들어본 미국 노래들이 우리의 가슴을 갈증 나게 했지만 그 갈증을 풀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는 이른바 유성기(留聲機)를 가진 집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유성기! 라디오조차도 보기 드물었으니 유성기는 더더욱 그랬다. 그 유성기, 축음기가 있는 유일한 친구인 김() 군의 집에 우리 너덧은 노트 장에 한글로 쓴 영어 가사를 들고 일요일마다 모여들었다. 배다리에서 크게 무쇠솥 장사를 하던 집이었다. 그 크고 반들반들한 미제 유성기는 친구네 대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친구 부친의 기색을 살피거나 형님의 허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거기에 판을 걸고는 했다.

 

트위스트라는 것이 유행한 때가 중학교 2학년이던 1961년으로 기억한다. 송도유원지가 아직 오늘과 같은 모양을 갖추기 전이었는데 봄에 동급생 몇과 그리로 원족을 나가 이 희한한 춤을 처음 목격했다. 아주 경쾌하고 매혹적인 노래에 맞춰 추는 춤이었다. 자세는 엉덩이를 조금 엉거주춤하게 뺀 채로 서서, 한 쪽 발뒤꿈치와 다른 쪽 발, 발가락 끝으로 땅을 문지르거나 가끔씩 교대로 공중으로 들어 올려 비비틀어대는 그런 동작이었다.

 

물론 두 손은 땅바닥을 향해 좍 펴고 살랑살랑 젓는 것이었다. 후에 안 것이지만 미군이 휴대한 포터블 전축에서 흘러나오던 그 매혹적인 노래는 네버 온 선데이라는 노래였다. 그 봄 이후 온 나라가 이 노래와 트위스트의 열풍에 휩싸이고 말았다.

 

나름대로패션리더 - 나팔바지, 맘보바지, 빽바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쯤에는 시내 많은 고등학생들이 나팔바지라는 것을 입은 것 같다. 넓적다리까지는 꽉 끼다가 무릎 근처에서 크게 통이 넓어지는 그런 바지였다. 훈육 주임 선생과 이 바지를 입은 학생들과의 신경전은 새삼 언급이 필요 없을 듯싶다. 맘보바지는 오히려 그보다 뒤져서 60년대 초를 지나 유행했다. 나팔바지와 달리 하반신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홀태바지였다.

 

이 바지는 정면으로 설 경우 남성의 윤곽이 너무 선명히 드러나 보여 민망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봄이 시작되는 이맘때쯤, 새 교복을 맞추면서 옷가게 재단사에게 미리 주문을 하는데 이 바지에 대해서는 선생님보다도 먼저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더 심한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도 용하게 고등학교 졸업 앨범 속의 그룹사진에는 7명의 청소년 모두가 모조리 홀태바지 차림이 아닌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봄은 참으로 슬픈 기억이 남아있다. 학교 뒷산, 기상대 인근에 벚꽃이 활짝 피고 나면 그 벚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주번이어서 일찍 학교에 등교했던 그날, 수천의 꽃잎과 아침 햇살과 한 많은 삶을 밧줄에 걸어버린 사내의 모습. 참으로 목구멍의 침이 마를 만큼 충격적이고 슬픈 장면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하지만 봄이 만개하게 되면 자유공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추억을 가지게도 했던 곳으로도 기억된다. 물론 그 행복한 추억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야심한 밤에 그 근처를 어슬렁거렸다가는 당장 정학이라는 엄포가 진즉에 학교 측으로부터 우리에게 하달된 바 있어서 우리는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벚나무와 아카시아가 총림(叢林)을 이룬 그 밑 풀밭에는 여자가 착용하는 속옷 나부랭이가 버려져 있어서 다음날 아침이면 몇 십 장씩 발견되고 한다는 이야기가 우리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빽바지라는 미 해군의 개인 소지품을 넣어 운반하는 자루 같은 더블 백을 뜯어 그 조각으로 만든 오늘날 청바지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 당시 우리들이 몹시도 선망하던 바지였다. 봄 새 학기가 시작되거나 새로 입학하는, 좀 어수선할 때 집에서 돈을 슬쩍 더 타내서 중앙시장에서 맞추는 것이다. 윗도리는 하는 수 없이 교복이지만 밑은 이 빽바지 차림으로 어쩌다 도넛 가게라도 가는 날이면 여학생들 앞에서 그토록 자랑스럽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시리도록 슬프고 궁끼가 묻어있던 화려한 봄날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생의 봄은 아주 달랐다. 술을 마실 수가 있고, 어른 앞만 아니면 담배를 피울 수 있고, 다방이나 당구장에 출입을 할 수가 있었다. 배다리 쪽 사보이 당구장에서 이찌와리히끼’, ‘오시따위의 일본 용어를 늘어놓으며 당구를 배우던 기억이 우습다. 술은 아무리 마셔도 이 젊은 몸뚱이에 목마름만 키우고, 그래도 이따금 며칠 보지도 않은 새 교과서나 손목시계를 볼모로 잡히곤 했다.

 

뭐니 뭐니 해도 다방 출입처럼 빈번했을까. 예술 하시는 선배들이나 신문사에 계시는 어른들을 따라서 주로 화선장 위의 은성다방을 드나들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올라 기름 먹인 나무 널이 깔린 이 다방이었다. 여기서는 봄가을로 시화전, 그림전이 열리기도 했다.

 

젊은 우리들이 가는 다방으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으로는 기업은행 앞의 짐다방과 조금 뒤에 생긴 동인천 대한서림 자리의 별다방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다방의 메뉴가 특이했다. 커피나 홍차는 지금과 같이 기본으로 있었지만 난데없는 깡티위티니 하는 이상한 이름의 위스키가 있었다. 위티는 홍차에 위스키를 한 잔 곁들이는 것이고 분명하지는 않지만 깡티는 위스키에 냉수를 드는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위스키는 주로 당시에 생산되던 국산 도라지 위스키를 사용했다.

 

다방 출입은 해야 하지만 아직도 배고픈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어느 다방에서나 달걀을 팔았다. 달걀은 두 종류가 있었는데 충분히 삶은 완숙과 반만 삶아 흰자위는 익고 노른자는 날것 그대로 있는 반숙이란 것이 있었다. 밥값과 다방 찻값의 이중 부담이 힘겨운 우리들은 이것을 많이 시켰는데 완숙을 먹는 것은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낙인이 찍혀 있어서 멋들어진반숙을 주문하곤 했다.

 

오늘의 봄이 더 화려하고 더 문명한 봄인지 모르지만 치기가 묻어있고 슬픔이 묻어있고 궁끼가 묻어있던 그때의 봄도 내게는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인천개항장 풍경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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