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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미각의 보고

by 형과니 2023. 4. 10.

미각의 보고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5-31 22:59:15

 

백옥같이 희고 풍성한 속살의 그 맛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미각의 보고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최고 진미의 대중적 해물로는 대략 4월부터 5월까지 성시를 이루던 참조기와 꽃게를 꼽을 것이다. 하인천 부두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참조기와 백옥같이 희고 풍성한 단맛을 가진 꽃게의 살! 황해 물에서 나는 그 밖의 다른 좋은 생선이 왜 또 없을까만 이것들은 바로 이맘때쯤 우리 한국인의 구미를 사로잡는 대표적인 어물이면서 세계 최고라 해도 좋을 가미(佳味)를 지녔기 때문이다. 아마 인천에서 나서 자란 사람이라면 이런 호들갑에도 전혀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옛날처럼 그렇게 크고 실하지는 못해도 꽃게 하나는 아주 드문드문 행운처럼 그때의 맛을 볼 수 있는데 조기는 영 끝장이 나고 말았다. 어장의 환경 변화와 무분별한 남획이 그만 씨를 말렸기 때문이다. 연평도 파시(波市)라는 말은 이제 사어(死語)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아무 길바닥에서나 조기를 말리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특히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중구 대부분 동네 골목길은 조기를 말리느라고 펴놓은 가마니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여기저기 발길에 채일 정도였는데 웬만한 집조차도 보통 5백 마리, 한 동쯤은 사서 널었다. ‘이라는 말은 조기 천 마리, 비웃 2천 마리 하는 식으로 수를 세는 단위인데 당시 우리 인천에서는 대체로 조기 5백 마리를 한 동으로 계산했던 것 같다. 이렇게 조기가 흔했던 탓에 당시 인천 사람들은 영광 굴비 같은 것은 거의 안중에 없었던 듯하다.

 

학생이었던 우리들은 가끔 내동이나 송학동쪽 골목길에서 조기 서리를 했다. 지나가다가 슬며시 한두 마리를 집어 가방에 넣거나 동복 윗도리 가슴속에 품고 줄달음을 쳤다. 가방과 몸뚱이에 조기 비린내가 배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 기막힌 맛에 비하면 까짓 비리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서리한 반쯤 마른 굴비는 학교 뒤 숲에 들어가서 원시인처럼 그냥 날로 찢어 입에 넣기도 했고, 어느 때는 친구네 셋방 연탄 화덕에 올려 인근에까지 참으로 화려한 냄새를 풍겨주기도 했다.

 

굴비는 좀 청승스럽지만 그때의 방식으로 먹어야 더 맛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기밥통이 없던 시절이니 밥은 당연히 찬밥이고 거기에 먹다 남은 굴비 토막을 뒤적여 대가리와 가시까지 쪽쪽 빨아 먹는 맛!

 

어느 날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는데 마침 집은 비어 있고 찬장에는 찬밥 한 덩이와 아침에 먹다 남긴 구운 굴비 쪽이 있다. 가방만 마루에 던져 놓고는 모자 벗을 겨를도 없이 그냥 선 채로 밥을 물에 말아 뚝뚝 떠먹는 것이다. 더운밥에 금방 구운 굴비 쪽을 올려놓고 먹어야 정식이겠지만 이렇게 머슴밥 먹듯 다소 처량하게 먹는 굴비 맛도 여간만 좋은 것이 아니다.

 

염치없는 이야기지만 어려서부터도 워낙 맛을 파는 성격이어서 지청구를 많이 들었다. 그것이 생전에 늘 안쓰러우셨는지 후일 성년이 되어서도 어머니께서는 제사상에 올랐던 굴비만은 당신 남편보다도, 또 형이나 다른 형제들보다도 둘째인 내게 무조건하고 우선권을 주시거나 가장 맛있는 알짜 부분만을 독식케 하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 집 굴비는 작은형 굴비라는 아우들의 볼멘소리를 다 들었었다.

 

꽃게 맛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의 인천항에는 덕적, 연평해역에서 잡히는 것과 나머지는 중국으로부터 조달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먼어금(송도)의 척전에서 소를 타고 나가 그물을 쳐서 잡던 꽃게가 크기에서나 맛에서나 으뜸이었다. 사진작가 김용수(金容洙) 선생이 남긴 먼어금 사진을 보면 그 시절 조개잡이 아낙들의 긴 행렬과 함께 황소를 탄 어부들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먹음직하게 차려진 간장게장

 

다 자란 꽃게 암컷을 몇 마리고 삶아 식구들이 죽 둘러앉아서 딱지를 열어 주황색으로 익은 고소한 알과 집게다리에 딸려 묻어나오는 흰 살을 발라먹는 뿌듯한 맛이란 그야말로 호사 중의 호사였다. 아마 필생의 호사를 이른다면, 이야말로 서해 바다 인천 땅에 태어난 천생의 호사가 아니었는지.

 

조선간장을 몇 차례 고쳐 다려 부으며 담근 게장은 세계 유일, 최고의 장맛일 것이다. 진한 간장 맛과 함께 어우러져 발효한 게장의 향취는 정말이지 한마디로 딱 부러지게 형언하기가 어렵다. 피로나 병 때문에 입맛을 잃었다가도 게장이 앞에 놓이면 어느덧 숟가락에 손이 가게 되고 이내 밥 한 그릇을 거뜬히 해치우게 되는 것이다.

 

게장은 큰 등딱지 하나만 가지고서도 아홉 식구 세 끼 반찬으로 넉넉하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짜게 담가야 한다. 살이 연해 간기가 적으면 쉬 곯아 버리므로 짜게 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짠맛이 침샘을 자극해서 장맛이 더 달게 느껴지는 것이다. 딱지 양옆 뾰족하게 돌출한 부위에 박힌 알까지 젓가락으로 파내어 가운데로 모은 후 거기에 밥을 넣어 비벼 먹는 황홀한 맛은 한국인, 인천인으로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맛이다. 요즈음은 게 또한 전과 같지 않아서 납덩이가 들어있는 중국산이 횡행할 뿐 아니라 크기나 품위가 훨씬 떨어지는 물건 같지 않은 것들만 돌아다닌다.

 

조기, 꽃게 말고 4, 5월에는 밴댕이가 맛을 낸다. 그 시절 인민군 집이라고 불리던 하인천 쪽에 오래된 밴댕이 집이 아직 남아 있는데 여전히 뼈채 썰어 내는 회가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느끼게 한다. 5월에 호식할 수 있는 것이 대하(大蝦). 이것 역시 송도 앞바다 사리에 걸리는 것을 최상품으로 쳤다. 프라이를 해 먹거나 저냐를 해도 좋고 양념 구이를 해도 일미였다. 내동 중소기업은행 맞은편 터진개 길 모서리에 지금은 무슨 컴퓨터 가게가 자리를 잡고 있지만 거기가 1960년대 무렵까지 중국인 만두 가게였다.

 

우리들이 만두를 먹으러 가면 주인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까닭은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대하 때문이었다. 간혹 우리들 같은 학생들이 드나들고 나면 몇 마리의 대하가 축이 나던 경험을 중국인은 가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 살림은 대하를 그토록 많이 사 둘 여유도, 까닭도 없었는데 산해진미에 정통한 중국인들은 대나무로 짠 가고하나가 그득하도록 그것을 사 놓았던 것이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추억담을 적어 가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1960년대의 아직 매립이 안 된 먼어금 지대나 월미도, 괭이부리 인근이 떠오른다. 매립해서 만든 무슨 신도시가 자손만대 득이 될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매립을 하지 않고 그냥 꽃게며 대하, 동죽을 잡을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면 분명 득이 될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벌써 우리 2세들만 해도 우리가 먹었던 그것들을 영영 먹어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인천개항장 풍경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