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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고단한 삶의 외침들

by 형과니 2023. 4. 9.

고단한 삶의 외침들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5-13 19:35:17

 

귓속이 아닌 가슴 속 한구석에 남아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8. 고단한 삶의 외침들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아득한 과거사가 되어 슬픈 듯 아련한 듯 가슴 속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까마득히 잊혀진 소리들-고단했던 삶의 목소리들, 그 시절 우리 귀를 울리던 소리들이 그렇게 슬프고 정겹고 아련한 지난날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해 준다.

 

 

며칠 전 신포동 백반 집에 들렀는데 주인 아낙이 난로의 연통이 막힌 듯하다며 불이 잘 붙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손님 하나가 우스갯소리로 그러면 지나가는 굴뚝 소제부를 불러야죠.”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 그렇구나. 굴뚝 소제부(우리 어려서는 아직 일본식 어투가 남아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가 있었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경동에서 신포동, 중앙동을 거쳐 다시 전동, 내동, 인현동 쪽으로 해서 화평동 굴다리 방향으로 사라지던 굴뚝 소제부 아저씨! 조금 큰 키에 때 묻은 작업복, 검은 방한모, 검은 마스크, 그을음이 새까맣게 앉은 안경! 이맘때쯤이면 우리 동네에 자주 나타나던 굴뚝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그때는 닥치는 대로 아무것이나 아궁이에 쓸어 넣고 불을 때었기 때문에 검댕이 많이 생겨 구들장 밑이고 굴뚝이고 그렇게 잘 막혔던 것이다. 그래서 검댕이 생기지 않는 연탄이 널리 보급되기 전이었던 60년대 초반 무렵까지는 이런 아저씨들의 역할이 자못 컸었던 것이다.

 

 

어깨에는 헝겊방망이와 수세미 솔 같은 것을 끝에 단 두 개의 가늘고 긴 대나무 쑤시개를 둥글게 용수철처럼 말아 메고, 몇 발짝에 한 번씩 커다란 징을 울리며 굴뚝 소제하세요.” 혹은 굴뚝 쑤셔요.” 하던 그 아저씨의 목소리가 백반 한 상을 다 들 때까지 귓가에서 맴돌았다. 가슴 밑바닥이 저려 오는 듯한 길고 한스러운 여운을 가진 징 소리가 하필이면 왜 막힌 굴뚝을 뚫어준다는 표시로 쓰였던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해서 전국 공통이 되었을까.

 

 

생각이 미치자 우리 귀에 사라진 전국적인 소리로, 딸랑딸랑 두부장수 종소리가 귀를 울린다. 어디 그뿐이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처량하면서도 굴곡진 가락으로 약식이나 찹쌀떡혹은 메밀묵하고 외치던, 왜 그런지 마음이 두근거리는 그 음성들도 아련하게 귓가에 되살아난다.

 

 

1963,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르바이트로 식빵 비슷한 것을 밤중에 팔러 다녀 본 경험이 있다. 첫날은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 어두운 밤길만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을 뿐 하나도 팔지 못했다.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 숭의동 공설운동장 옆 논두렁에서 이틀 밤이나 연습을 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다른 빵장수는 참으로 구성지게 쇼빵이요, 쇼빵하며 밤길을 다녔다. 50원이면 손바닥 넓이만한 두툼하면서도 말랑거리는 빵을 살 수 있었다. ‘쇼빵을 외치던 내 어설픈 목소리가 며칠 얼어붙은 그 시절 겨울밤을 울리기도 했었는데. 아무튼 이제는 그 소리 역시 우리 귀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신 닦아요, 구두 닦아요.” 하던 구두닦이 소년의 목소리도, “창영당 아이스케키를 외치던 총각의 음성도 세월의 변화와 더불어 다 귓가에서 멀어졌다. 물론 동인천역 광장을 달리며 내일 아침 동아일보여.” 하던 고학생의 목소리도 지금은 아득히 잦아들고 없는 것이다.

 

 

휴전 이후 1950년대 말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소리였다면 걸인들의 장타령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근래 어느 시인이 각색한 품바연극이란 것이 있어 그 시절 애환을 다시 느끼게 해 주고도 있지만 에헤 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 씨구씨구 들어간다.” 하던 가슴 뭉클한 그 곡조만큼은 정말 잊을 수 없다. 이런 소리들은 지금은 귓속이 아닌 가슴 속 어디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찌그러진 깡통에 사시숟가락을 두드리며 찬밥 한 덩이를 구걸하던 그 시절. 대한서림 윗길 인현동 골목 안에 살 때는 옆집의 옥순관(옥선관) 아주머니가 걸인들에게 일부러 밥을 한 숟가락씩, 한 숟가락씩 감질나게 나눠주면서 몇 번이고 장타령을 부르게 하다가 끝내는 무엇이 복받쳤는지 흐느껴 울던 기억도 난다. 이 걸인들은 5·16 군사 혁명 후 재건대라는 이름으로 수용되어 합숙을 하면서 넝마 줍는 일을 했던가?

 

 

자유공원 응봉산에서 울리던 오정 싸이렌과 통행금지 싸이렌도 이제는 추억 속의 신화일 뿐이다. 1960년대 후반 무렵이었지만 청소년, 학생들의 귀가를 재촉하던 밤 10시의 차임벨 소리도 있었다.

 

 

또 휴전 직후, 밤마다 이불 속에서 듣던 야경원의 딱딱이 치는 소리도 기억난다. 야경원들은 내동 골목길을 내려오며 불조심을 외치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시내에 차가 많지 않아 답동 성당에서 맑게 울리는 낮 12삼종소리를 웃터골 학교에서도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없어진 소리가 또 무엇이 있을까. “자반 고등어 사려.” “어리굴젓 사려.” “콩나물 사려.” 하는 따위의 행상들이 외치던 소리 또한 들을 수 없다. 지금은 이런 장수들이 자동차에 녹음한 것을 확성기로 틀어 놓고 시끄럽게 마을이나 아파트를 돌지만 그때는 모두 육성이었다.

 

 

땜장이 아저씨의 조금 코 먹은 듯한 소리, “양은 냄비 솥뚜껑 고쳐요.”도 있었고 서류 가방을 든 아저씨의 금이나 은이나 채권 삽니다.” 하던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있었다. 물론 강냉이장수나 엿장수의 가위 소리 또한 꿈결처럼 멀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통처럼 생긴 대나무 돌리개를 따르륵, 따르륵 울리던 당고(일본식 팥 경단)’ 장수의 소리도 잊을 수 없다. 긴 장대 끝에 두 개의 유리 상자를 걸어 어깨에 메고 운동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도원동 공설운동장 앞에서 모찌떡과 당고를 팔았다. 그 도원동 언덕에 있던 영화관 용사회관의 그리하였던 거디다.” 하던 변사의 목소리, 동네 공터에 진을 치던 약장수의 아코디언 소리, ‘동동구리무장수의 발장구 소리, 이것들도 다 사라진 소리 중에 끼인다.

 

 

1950년대 인천에는 조기청소(早起淸掃)라는 행사가 자주 있었다. 아침 6시에 마을의 지정된 곳에 모여 비나 삽을 들고 선생님과 동장님을 따라 청소를 하는 것이다. 물론 청소를 시작하기 전에는 보건체조를 하고 으레 여명이 아시아에 비칠 때부터 한양 길 구비 구비백 리를 뚫고…….”로 시작하는 인천 시민의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조기 청소 풍습도 없어졌거니와 제법 씩씩하게 부르던 이 시민의 노래마저 전혀 들어 볼 수 없는 잃어버린 소리가 되고 말았다.

 

 

1950년대 시절 향수가 어려 있는 음향, 음성 중에는 배다리 철로문다리를 우당탕퉁탕 지나가며 험상궂은 연기와 함께 빼액날카로운 소리를 뽑던 증기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는 디젤 기관차가 내던 아득한 경적도 있었다. 옛 인천부두의 그 뱃고동 소리는 어떠했는지…….

 

 

이런 골동품 같은 소리들, 애환이 묻어 있는 삶의 소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려온다. 그리고 심사(心事)는 콧날 시큰한 그 시절로 한없이 달려간다. 마냥 정겹고 아련한 그 시절로.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인천개항장 풍경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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