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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인천의 공동변소

by 형과니 2023. 4. 8.

인천의 공동변소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4-25 22:22:13

 

기립 자세에는 1, 엉거주춤 앉는 것에는 50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인천의 공동변소

 

 

홍여문(홍예문) 큰 바위 옆 으슥한 데서 약 40여 년 전에 어느 일본 여자가 급한 것을 참지 못했음인지 또는 늘 그런 버릇이 상례로 되었던지 이곳에서 궁치를 허옇게 내놓고 그대로 서서 (방뇨)’를 진행시키는 도중이다.

 

장난 좋아하고 힘센 청년 윤치덕(尹致德)이란 친구가 이 거동을 보고 해괴하기 짝이 없어 힘 있는 대로 철썩 볼기짝을 갈기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었다. () 색시는 그만 혼이 나서(魂飛魄散)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절하듯 쓰러졌었다. 일본 경찰서로 달려가 봉변당한 이야기를 했으나 도리어 꾸중만 듣고 나왔다는 것이다.

 

한국 풍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녀자의 노변 방뇨도 문제려니와 하이얀 큰 궁둥이를 내놓고 남자처럼 서서 누는 일은 일본인의 망신이고 보니 다시 그런 짓을 말라고 호령이 추상같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남녀 간 길가에서 소변을 못 보게 했으며 기립 자세에는 1, 엉거주춤 앉는 것에는 50전의 벌금형에 처하기로 되었다.”

 

1955년에 발간된 고일(高逸)인천석금(仁川昔今)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천의 공동변소를 이야기하자면 양념처럼 따라다니는 우스개 같은 설화다. 아니, 윤치덕이라는 실명까지 거명되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실화일 것이다.

 

홍예문

 

 

아무튼 이 이야기는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무척이나 상하게 했을 것이 틀림없다. 반대로 우리 인천의 조선 사람들은 저들의 야만스러움을 마음껏 웃어 주면서 가슴에 응어리진 배일 감정을 조금이나마 삭이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런 일 때문에 일본인들이 인천 시내 곳곳에 공동변소를 설치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1904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점차 늘어나는 자국민들의 숫자와 더불어 벌금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급한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동변소의 설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더불어 인천을 완전히 저들 식으로 도시화해 가면서 나름대로 깨끗하고 좋은 이미지를 가진 국제 항구로, 또 동시에 해양 관광 도시로 꾸밀 계획이 서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자료가 공소(空疎)해서 그 홍예문 사건 직후의 사정이나 인천에 처음 공동변소가 생긴 시기를 소상하게 밝히기는 어려우나, 1939년 자료에는 언제부터인지 이미 인천 시내 번화가 7개소에 공동변소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송림초등학교 동쪽 축대 밑에, 그리고 옛 축현초등학교 정문 쪽에서 제물포고등학교로 오르다 만나는 작은 사거리 좌측, 현 인천고등기술학원 앞 공터, 또 답동 성당 입구에서 박문초등학교 쪽으로 몇 발짝 올라간 자리에 각각 공동변소가 있었다. 그밖에 신흥초등학교 정문에서 답동 사거리 쪽으로 조금 내려선 자리에도 침침하고 음울하게 생긴 공동변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행인의 왕래가 빈번한 하인천역(인천역)과 축현역(동인천역), 그리고 자유공원 정상 제물포고등학교 뒷담 쪽에도 똑같은 모양의 공동변소가 있었다.

 

이것들은 60년대 말 무렵까지는 그냥 저냥 제 원 모습을 가진 채 남아 있었지만, 두 군데 역전의 것은 몇 번의 역사 신·개축 과정에서 위치도 모양도 딴판으로 변해 버렸고, 송림초등학교 축대 밑과 신흥초등학교 앞, 그리고 답동 성당 정문 쪽에 있던 것과 내동의 공동변소는 모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자유공원 것도 자리를 바꿔 언제 공사를 했는지 현대식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이 공동변소들이 50, 60년대의 추운 겨울 저녁, 걸인·부랑자들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제 숙소처럼 찾아 들던 곳이었다면 곧이들을 사람이 있을까. 오래 살았다 해도 지금은 이미 이 세상 인구가 아닐 그 걸인을 나는 중학교 2학년 겨울, 송림초등학교 축대 밑 공동변소에서 보았다. 이제 다시는 이 땅에 그 같은 시절이 오지는 않을 터이지만 근래에 생겨난 노숙자들이 혹 이와 비슷한 경우를 겪고 있지는 않은지.

 

재래식 변소

 

 

오늘날의 공동변소라면 수세식으로 된 청결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실상 우리의 공동변소는 1950, 6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불과 몇 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풍경을 이루었었다. 부엌은 깨끗이 치우는 사람들이, 그 끝일을 보는 곳은 어째 그토록 지저분하게 처리했는지. 수세식이 아니었음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 사람이 약간만 방향을 그르치면 다음 사람은 조금 더, 그 다음 사람은 조금 더, 이런 식으로 문 쪽을 향해 점점 상황이 나빠져서 한참 뒤의 사람은 도저히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관청이나 민간, 어느 한쪽도 정신을 차려 관리를 하지 않았으니 사태는 자주 더 고약한 방향으로 발전하곤 했다. 다시는 안 올 곳처럼 사방 벽에 코는 왜 그리 많이 풀어 문질러 놓고 침은 어째서 그렇게 여기저기에 뱉어 놓았는지, 청결이나 공중도덕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이 공동변소였다. 더구나 그것이 성당 쪽 것이었건, 학교 앞의 것이었건 대차가 없었다.

 

일본인들의 행정이란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곰살맞다 싶을 정도로 잘고 세밀해서 그해, 1939년 판 인천시세(仁川市勢)’에는 7개 공동변소에 대해 일일 평균 청소 회수 3, 일일 평균 사역 인부 1, 1년 간 연 사역 인부 357따위의, 좀 싱거운 듯한 자료를 기록으로 다 남겨 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가 자잘하다거나 전혀 무용한 내용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인천부(仁川府)의 중요 시책의 하나가 청소와 청결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홍예문 노변에서 해괴한 자세로 소변을 보다 망신을 당한 여자가 있기는 했어도 이런 면이 우리와 다른 일본인들의 철저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인천개항장 풍경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