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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김장과 땔감

by 형과니 2023. 4. 9.

김장과 땔감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5-13 19:34:27

 

올망졸망 식구들이 고난의 계절을 넘겼는데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7. 김장과 땔감

 

 

가난한 아버지의 어깨가 추워지는 계절’ ‘할머니·어머니의 마음이 설핏한 햇살처럼 더 바빠지는 계절차가워지고 스산해져가는 이 계절을 이런 말들로 수식하면 어울릴까. 겨울을 살아 내려면 대비해야 할 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꼽히는 것이 김장이다. 그와 함께 겨우내 땔 난방 연료를 준비해야 한다. 식구들의 입성도 솜을 넣어 두툼히 지어 놓아야 하고 내려앉은 방 구들장 역시 미리 손보아 두어야 한다.

 

그래서 주머니가 가벼운 아버지의 어깨는 한없이 춥고, 어머니의 마음은 찬바람이 불면서 분주하기만 하다. 1950년대 말에 이르도록 대부분의 집 아궁이는 연탄을 땔 수가 없어서 겨울이면 장작을 지폈다. 때로는 단으로 묶은 생솔가지를 트럭으로 들여와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겨우내 그것을 헐어 때면서 방을 덥히기도 했다. 이래서 당시 우리 나라 산들이 모조리 민둥산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1950년대 말 어느 겨울에는 아버지가 미군 폐타이어를 구해 잘게 잘라 뒤꼍에 쌓아 두기도 했는데 이 타이어 조각은 화력도 강하고 오래 타서 월동용 땔감으로 그만이었다. 다만 굴뚝으로 새카맣게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양의 검댕이 이웃집 흰 빨래를 못 쓰게 만들어 놓아 종종 거친 항의를 들어야 했다. 후에 연탄을 들일 때는 임시 연탄 광을 지어 한 번에 천 장이고 이 천 장이고 기술 좋게 줄줄이 쌓아 올리던 생각이 난다. 그것이 19공탄이었다.

 

학교의 월동 연료도 당시에는 장작이 주였다. 11월 들어 난로가 가설될 무렵이면 장작을 패는 인부들이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통나무를 톱으로 썰고 도끼로 패거나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도끼날이 몹시 길고 날카로웠는데 워낙 숙달되어서 받침대 위의 통나무는 어김없이 반듯하게 쪼개졌다.

 

이렇게 준비된 난로 땔감을 그날그날 학급 당번이 열다섯 개비, 스무 개비, 이런 식으로 할당받아 교실로 날라 오는 것이다. 불 관리야 당연히 담임선생의 몫이거나 묵은 나이의 머리가 좀 굵은 아이 차례였다. 3교시쯤 되면 벌써 벌겋게 단 난로 위에는 벤또가 올라오기 시작하고 깍쟁이속의 김치가 부글부글 끓어 찌개 냄새를 피우면 전원이 회가 동해 하는 수 없이 공부가 뒷전이 되던 시절!

 

, 땔감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빼놓을 수 없는 인천 풍경이 떠오른다. 많은 집들이 월미도 부근 북성동, 만석동 등지의 대성목재나 선창산업 같은 목재 회사 원목 야적장에서 목피를 벗겨 땔감으로 삼았다. 실제로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바닷물에 잠겨 있는 원목을 타고 앉아 목피를 벗기다 빠져 죽었다는 사람들의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도 흔히 따라다녔다.

 

연료뿐만이 아니라 김장을 하는 날이면 역사(役事)를 위해 공부가 파하는 대로 집으로 달려와야 했다. 국민학생의 작은 어깨로나마 우물에서 물지게를 져 나르고 김장독과 움파와 움배추, 고구마 따위를 묻을 구덩이 파는 일을 거들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노란 배추 속이파리에 빨간 김장 속을 싸서 한입 가득 넣고 우적우적 씹을 수 있는 즐거움과 우거지를 넣은 뜨끈한 동태 국을 먹을 수 있는 즐거움도 있었다.

 

미국의 사진작가 디미트리 보리아(1902~1990)가 촬영한 한국전 당시 땔감을 실고 가는 소년들

 

김장철이 오면 아연 활기를 띠는 곳이 인천의 대표적인 청과시장인 채미전거리, 물산회사 길이었다. 유명한 설렁탕집 삼강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부터 동인천에 이르기까지 온 천지가 배추, , , 마늘, 쑥갓, 고추, 생강 등속의 김장 물자로 가득 찼다. 황소가 끄는 우차에 바리바리 실려 오는 배추와 무, 지게꾼, 구루마.

 

높은 축대 밑의 넓은 공판장 마당은 한 접, 두 접, 채소를 흥정하는 손님들과 상인의 음성이 어울려 참으로 대단한 성시(盛市)를 이루는 것이었다. 발밑에는 온통 떨어진 배추 이파리, 무청 따위가 카펫을 이루어 걷기에도 푹신푹신할 정도였다. 그 시절만 해도 오늘날처럼 아무 때나 싱싱한 야채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긴 겨울을 대비해 김치, 깍두기, 동치미 같은 반찬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비축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김장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젓갈일 것이다. 할머니, 어머니는 이미 10월만 넘어서면 북성동 하인천역 뒤 경기도수협 어시장에 나가 새우젓이나 황새기젓, 혹은 저부레기, 멸치젓 같은 것들을 미리 사다 두었다. 호리호리하고 긴 몸체에 주둥이 운두가 납작하게 생긴 특이한 새우젓 독에는 오젓, 육젓, 추젓 같은 한국 최고의 맛을 지닌 인천 새우젓이 소금을 쓴 채 담겨져 장독 한 옆에 서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연안 부두가 생기기 전이었고 자가용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던 때라 소래 포구는 별 볼일 없이 한산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인천 사람은 물론이고 서울이나 근교 사람들도 모두 이 옛 북성부두 어시장을 이용했다.

 

특히 지척에 기차 종착역이 있어서 서울 사람들이 많이 내려왔는데 그때쯤이면 차 안이 온통 생선 비린내와 꼬리꼬리 한 젓갈 냄새로 가득 차곤 했다. 가지가지의 물 좋은 생선들과 적당히 발효된 젓갈들이 그득 담긴 수천 개의 드럼통! 어시장 마당은 정말 볼 만한 풍경을 이루었었다.

 

김장을 마치면 겨우살이 준비는 대체로 끝이 났다고 할 수 있다. 잡다한 다른 일들, 솜을 틀어 새로 이불을 시치고, 바지저고리를 손보아 두는 일, 뚫어진 창호지를 다시 바르는 일들은 김장 전에 틈틈이 해 두었기 때문이다. 양지 바른 날, 중앙동 양지공사에서 질이 좀 좋다는 창호지를 사다가 귀얄로 풀칠을 해서 문에 바르고 문풍지도 길게 오려 달던 추억이 떠오른다.

 

이제는 문창호지를 다시 바르거나 하는 일이 없어졌고, 洋紙公司라고 붓글씨체로 써서 큼지막하게 간판을 내 걸었던 이 노포(老鋪)도 이미 수년 전에 문을 닫고 말았다. 오늘날과는 달리 그때는 인천 앞 바다 짠물이 툭하면 얼고 집집마다 처마 끝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리는 강추위가 잦았지만 이렇게나마 월동 준비를 끝내면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도 돌아누우신 아버지 어깨도 하냥 춥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인천개항장 풍경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