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5-19 15:54:06
어설픈 성탄절과 변두리 여인숙에서의 카니발!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9.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
어려서 우리가 알고 있던 성탄절은 좀 이상한 날이었다. 일년 내내 교회 한 번 안 가던 아이도 시침 뚝 떼고 그날만은 10리 길을 마다 않고 나가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그보다는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회에서 나눠주는 떡이나 미군들이 보내 온 신기한 선물을 받아 와야 하는 날로 알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러면서도 낯간지러운 것은 연탄가스 때문에 산타가 굴뚝으로 들어올 수 없으니 교회에 직접 가야 한다는 제법 그럴 듯한 우스갯소리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또 산타가 굴뚝을 타고 들어온다 해도 걸어 놓을 만한 구멍 안 난 성한 양말이 없었으니…. 비록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고 탓을 당할 일이라 해도 정말 그날 하루는 주님의 어린 양들이 교회마다 그득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그날만은 또 어떻게 하든지 여학생들과 어울려 밤을 지새우는 날로 알았다. 교회 근처에서 얼씬거리든, 미리미리 약속을 해 둔 어느 집 헛간에 숨어들든, 어떻게 해서든지 어른들 눈을 피해 한데 어울려 놀아야 하는 날이었다. 이따위 어리석은 생각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시절이 지날 때까지도 도무지 고쳐지지 않았다.
먹고 살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더욱 사는 게 재미가 없었던 그 1950년대, 60년대. 그래서 그랬을까. 그 시절 우리가 기다리는 한 해의 마지막 명절(어쩌면 진짜 우리 고유 명절보다 우리들에게는 더 명절 같았다.)이자 대목인 성탄절은 참으로 설레는 날이었다. 교회 안팎에 현란하게 치장한 크리스마스트리와 색색의 작은 전구들이 깜빡이며 내는 불빛의 아름다움, 정감어린 성탄 축가들….
거기에다 운이 좀 좋으면 초콜릿 같은 진귀한 먹을거리가 생길 수 있고 알록달록한 풍선이나 희한한 스펀지 공 같은 선물을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잠자리가 그려진 돔보우 연필, 크레용, 줄넘기 같은 것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덤처럼 동방박사 세 사람이 몰약과 향유와 황금 같은 것을 들고 아기 예수를 찾아가는 단막극도 볼 수 있었으니 이토록 호사스러운 날이 다시없었다.
11월 하순으로 접어들면 아이들은 벌써 암암리에 누구, 누구네 집 전나무 가지를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보아 두었던 나무는 12월 중순 무렵, 어느 날 하루 날을 잡아 한밤중에 후딱 베어 오는 것이었다. 다음날 전나무 주인은 몹시 화를 내고 저주를 퍼붓겠지만 한쪽에서는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종을 매달고 솜을 뜯어 트리를 치장했다.
이렇게 기를 쓰고 트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기독교 신자로서 진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트리를 만들고 치장하는 것은 교인이나 비교인이나 전혀 상관이 없었다. 집에 트리가 없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고 무언가 뒤처지는 것이며 고요하고 거룩한 밤의 기쁨을 모르는 원시인쯤으로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사실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크리스마스가 교인, 비교인 구별 없이 성하게 된 것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 신자였고 그래서 성탄절을 공휴일로까지 지정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거기에는 물론 해방과 더불어 진주한 미군들의 풍습이 곧바로 전해진 탓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통행금지가 풀리는 가장 큰 후련함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던 통행금지 사이렌이 그날만은 울지를 않았다. 아무리 밤새 거리를 걸어도 정말 취조를 하거나 호각을 부는 순찰대원이 없었다. 단 하룻밤이었지만 아기 예수가 가져다준 자유가 그렇게 컸었던 이유 또한 있었을 것이다.
1963년 고등학교 1학년 겨울 성탄절에는 송도 능허대 해변에서 밤을 보냈다. 전부 8명의 남녀 학생들은 과자와 빵 부스러기와 땅콩과 삼학 소주 서너 병을 가지고 야음을 틈타 능허대 백사장으로 진출했다. 통행금지가 없는 그날 밤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스러웠는지 밤새 불을 피우고 노래를 불러대도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기우뚱 낡은 목선이 서 있던 그 시절의 능허대 해변은 매립되어 이제는 육지 안의 초라한 동산이 되고 말았지만 어느새 머리에 서리를 얹은 8명의 남녀는 철없던 시절 성탄절의 추억을 거기에 그렇게 묻었었다.
고등학교 2학년 크리스마스에는 마침내 넓은 방 하나를 차지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같은 그룹의 동급생네 집이 무슨 연유였는지 마침 그날 비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10명의 남녀가 살금살금 모여 들어 그 시절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라면도 구해 끓이고 김장 김치에, 동치미에 소주, 막걸리를 마시고 놀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만 한 것이 그때 우리들의 노는 모습이었다. 지금 아이들이 들으면 이 무슨 석기시대 놀이냐고 흉을 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집 주인 녀석이 만든 어쭙잖은 크리스마스트리 옆에서 번호 순서대로 ‘산 이름 찾기’니 ‘강 이름 대기’니 하는 놀이를 했다. 그런데 이 놀이가 또 묘해서 잘못하다가는 감추었던 속내를 들키기 십상이었다.
예를 들어 남자 ‘가’가 여자 ‘다’를 몇 번만 불러도 이내 둘이 수상한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낙인이 찍히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소 마음에 담겨 있던 상대의 발끝이 어쩌다 내 발끝에 슬쩍 스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하나로 온 밤이 더욱 깊고 그윽하고 아름답게 느껴졌으니, 애초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남의 나라. 남의 민족 명절에 느끼던 이 뜻 없이 순박했던 사랑이여.
아무튼 이렇게 어설픈 성탄절이 있었는가 하면 해괴한 방종의 크리스마스 카니발도 있었다. 말 그대로 카니발! 그 시절 몇 안 되던 시내 여관이나 변두리 여인숙이 이날만은 벌써 초저녁에 만원이 되었던 사실이다. 심지어 무슨 미끼와 구실을 대어서라도 처녀들을 유혹하려는 정말 짓궂은 사람들도 많았다. 오늘날은 정말 어떤지 모르겠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호 ‘인천개항장 풍경’ 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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