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깡통으로 엮어 만든 양철지붕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4-25 22:19:21
화려한 색깔, 문양이 어우러진 현란함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5. 맥주깡통으로 엮어 만든 양철지붕
휴전 후 인천의 산업이 복구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상륙작전이 벌어졌던 인천은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면서 공장들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기 때문에 물자난이 더욱 극심했다. 그나마 풍족한 미군이 들어오면서 일반 시민들은 그들이 쓰다 버린 폐품이나 암암리에 돌아다니던 물자들을 자재로 구해 썼다.
전국 각지에서 인천으로 몰려든 수천, 수만의 피난민들과 이주민들이 바로 그렇게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널판 쪽이며, 씨레이션 박스며, 막대기 토막, 철사 줄 따위를 주워 당장 기거할 판자 집을 지었고 그들이 던져 버린 신문지 쪼가리나 잡지 장으로 도배를 했다.
그러던 어느 때인가 맥주 깡통 지붕이 숭의동 산 9번지, 그리고 전도관(傳導館) 일대와 송현동 수도국산 피난민 촌에 탄생한 것이었다. 궁즉통(窮卽通)! 기와나 함석지붕 대신에 맥주 깡통을 잘라 이어 지붕을 얹는 이 기막힌 고안은 가히 표창 감이었다. 더구나 블루리본이니, 코카콜라니 하는 깡통마다 다른 가지각색의 화려한 색깔, 문양이 한데 뒤섞이고 어우러져 내는 그 현란함이란!
당시의 맥주 캔은 오늘날과 같이 얇은 알루미늄이 아니라 두꺼운 양철이었다. 아래위 접합 부분에는 굵은 테두리가 있는데 이것을 작두로 오려 내면 초등학생들이 쓰는 책받침만한 넓이의 직사각형 양철 판이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일일이 수작업을 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 배다리 원일철공소(元一鐵工所)에서 깡통을 자동으로 절단하는 새로운 기계 장치를 발명하기도 했다.
물자가 부족하기는 의복도 마찬가지였다. 그 즈음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신기한 ‘나이롱 옷’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선망의 대상일 뿐이었고 ‘클린 사지’니 ‘카키복’이니 또 ‘낙타 담요’니 하는 미군 쪽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주요 옷감이었다. 1950년대 국민학교 시절 미군 담요로 만든 두툼하고 누런 세일러복을 입은 아이들이 제법 많았고 집집마다 아주머니들이 모두 ‘몸빼’를 만들어 입기도 했다.
동인천역 부근이 자리한 양키시장 풍경
‘양키 시장’이 생겨난 것은 전적으로 이런 것들이 흘러나오는 루트가 있어서였다. 아무튼 미군 물자의 불법 유통이 심해지면서 순경과 헌병들의 노상 단속도 그만큼 강화됐지만, 벗고 다닐 수는 없어서 그대로 군복 바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단속반에 걸리면 더러 옷을 벗기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검은 페인트로 큼지막하게 ‘염색’이라는 글자를 등짝과 엉덩이, 넓적다리 부위에 써 넣어야 하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국방색만 아니면 그럭저럭 묵인이 되었다. 반면에 국방색 옷은 비록 사제(私製)라 해도 상당한 혐의를 받았다. 이런 딱한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고 없는 돈에도 세탁소에 가서 검게 물을 들여 입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의복 장수들이 생각해 내다내다 그토록 금하던 국방색 군복 패션까지 다 유행시키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신발 사정도 결코 넉넉한 것이 아니었다. 구두는 웬만한 사람들의 몫이 될 수 없었다. 배다리 중앙 시장에 신발 가게들이 많았었는데 ‘왕자표’니 ‘말표’니 하는 것들이 유명했다. 학생들 운동화는 검은색 일색으로 지금 것에 대면 지극히 어설프고 촌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남자는 끈을 묶었지만 여자는 발등에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천처럼 생긴 흰색 고무줄이 들어 있고 뒤축에 헝겊 손잡이가 있었다.
고교생 이상 머리 굵은 학생들은 물들인 군 작업복에 군화를 구해 신었다. 군화 한 켤레면 일이 년을 족히 신을 수 있어 경제성에 있어서 고무신이나 운동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군화는 요즘에는 볼 수 없는 붉은 색으로 반장화 형태였다. 한번 신으면 계절에 상관없이 뒤축이 달아나고 가죽이 하얗게 까져 해질 때까지 벗지 않았다. 학생들만큼은 크게 단속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난방 연료는 물론 일상의 취사 연료도 턱없이 부족했다. ‘구멍탄’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대부분이 소나무를 비롯한 온 산의 나무를 연료로 삼았기 때문에 전 국토가 ‘붉은 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입산 금지’ 팻말을 세우고 1946년, 마침내 미 군정청이 4월5일을 식목일로 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게 앞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
1967년에는 전국의 철도가 증기 기관차에서 디젤 기관차로 완전 교체되었지만 경인선은 아마 그보다 더 전에, 그러니까 1960년대로 들어와 이내 디젤로 바뀌었던 것 같다. 이 증기 기관차가 다니던 시절의 경인선이 얼마간 연료 보급창 구실을 했다면 누구나 의아해 할 것이다.
증기 기관차는 유연탄을 연료로 했는데 화부가 삽질을 해서 탄을 화구(火口)에 보충하다 보면 철길로 덩어리 몇 개는 떨어지기도 했다. 이것을 하루 종일 주워 모아 누런 마대 자루에 채워 파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들이 새까만 얼굴로 자루를 머리에 인 채 골목을 돌아다니던 장면이 사진처럼 선명하다. 지금까지도 궁금한 것은 자루의 단위를 ‘한 깡, 두 깡’으로 특이하게 세었던 점이다.
그야말로 황무지 같은 시절의 추억담만 이야기하다 보니 마음마저 누추하고 구차스러운 듯이 느껴진다. 일제에 의한 강제 개항에 이어 한국 병탐, 해방과 함께 강대국 미소(美蘇)의 이익이 분단 한국을 탄생시켰고 그것이 전쟁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바로 그 당사자에 전적으로 의지해 50년대, 60년대를 생존해 온 역사의 아이러니를 기억해야 한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호 ‘인천개항장 풍경’ 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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