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최 씨, 본부석까지 와 주세요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4-09 14:00:38
“운동장 최 씨, 본부석까지 와 주세요.”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2. 인천 스포츠의 메카 ‘그라운동장’
1950년대 초등학교 시절, 우리들은 도원동 옛 인천공설운동장을 이렇게 ‘그라운동장’이라고 불렀다. 영어의 ‘그라운드’와 우리말 ‘운동장’이 합해져 태어난 혼혈 합성어였다. 미군이 주둔하고 영어가 퍼지면서 이런 말이 생긴 것이 아닐까 싶다. 이상한 것은 이 기상천외한 조어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달거나 수정을 해 준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은 그 말이 운동장에 대한 합당한 명칭인 줄만 알고 모두 그렇게 불렀다.
문학경기장이 생기기 전까지 인천의 체육 경기나 행사는 전부 이 그라운동장에서 치러졌다. 그 유명했던 ‘인천 꼬마’ 김호순(金好順) 선수의 사이클 경기가 열렸고 이기상(李起祥), 신인식(申仁植) 두 사람, 한국 최고의 투수의 대결도 벌어졌다. 단 한 차례였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천하장사 김학룡(金學龍), 김학응(金學應), 마산 출신 모의규(牟義奎) 장사가 출전한 ‘황소 타기 전국 씨름 대회’를 볼 수도 있었다. 황소는 김학룡 장사가, 그리고 몸집은 작아도 묘기백출하던 김학응 선수가 준우승으로 금 몇 냥을 받았다.
1958년에는 고국을 방문한 재일 동포 장훈(張勳) 선수의 모습을 이 그라운동장에서 처음 보았다. 또 야구장 한복판에 가설한 특설 링 위에서는 김영배(金英培) 선생의 번개같이 잽싼 펀치를 본 것 같기도 하다. 1958년인가, 그 이듬해였던가. 한일 고교 배구 대회가 열린 곳도 이 그라운동장 야구장 홈플레이트 뒤 백넷까지의 공간에 급조된 맨땅 코트에서였다. 인천공고와 남고 선수들이 인천 선발의 주축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들이 참으로 큰일을 냈다.
일본 팀은 실력이 워낙 강해서 방한 이후 몇 경기를 모조리 3:0 스트레이트로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 못한 인천 팀이 둘째 세트를 여유 있게 이기는 큰일을 낸 것이었다. 그것이 한국 팀이 빼앗은 첫 번째 세트이자 유일한 것이었던 때문에 관중도 본부석도 모두 흥분해 있었다. 코트를 바꾸는 사이 본부석 마이크에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시민 여러분, 얼마나 기쁘십니까? 우리 인천 팀이 처음으로 일본을 꺾었습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흥분도 잠시, 그 후 두 세트를 내리 내 준 우리 팀은 그만 3:1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인천 꼬마 김호순 선수는 신화적인 존재였다. 그의 사이클은 호랑이보다 빨랐기 때문이었다. 김호순이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을 때는 출천 경비 충당을 위해 만화를 발간해 학생들에게 판매했다. 이 만화는 김호순 선수를 영웅화해서 그린 것인데 거짓말 같은 장면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김호순이 부평 원통이 고개에서 도로 경기 연습을 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위험을 느낀 김호순이 자전거로 내달리자 그 날쌘 비호조차도 그만 멀리 처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는 실상 멜버른 올림픽 187km 도로 경기에서는 하위권인 37위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 형편으로는 금메달이나 다름없는 선전이었다.
그라운동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운동장 최씨’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작은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 운동모자 밑으로 유난히 길고 크게 느껴졌던 코, 그는 참으로 성실하고 묵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라운동장의 생생한 역사였다. 야구장 1루쪽 스탠드 뒤 관사에 살던 그는 혼자서 손수레로 경기 용구들을 나르거나 함석 롤러로 흰 석회라인을 긋곤 했다.
본부석에서는 자주 “운동장 최 씨, 운동장 최 씨, 본부석까지 와 주세요.”라는 호출 방송을 하곤 했다. 운동장에 관련된 모든 일이 다 이 운동장 최 씨의 몫이었다. 후에 아들이 그 일을 대물림했었는데 문학경기장이 생기며 손을 놓았다. 60년대에 들어와 겨울이면 운동장에 아이스링크를 가설해 시민들이 호사를 누리기도 했는데 그 덕분이었는지 최 씨의 딸이 국가 대표 빙상 선수를 지내기도 했다. 마흔 이상의 인천 사람이라면 아마 그라운동장이라는 말도, 또 운동장 최 씨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주간인천사」가 1955년부터 주최해 오던 서울, 부산, 대구, 인천 ‘4도시 고교대항 야구대회’도 여기서 열렸다. 1958년 10월 17일에 열린 제4회 대회에서는 인천고가 경기공고, 부산상고, 경북고를 물리치고 종합 전적 2승 1무승부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투수가 우리 동네에 살던 남창희(南昌熙) 선수였다. 그리고 또 한 명 이선덕(李善德) 투수가 있었다. 1956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도 맹활약을 했던 백인천(白仁天)의 경동고가 서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황소가 이기느냐, 공수도가 이기느냐’ ‘맷돼지와 여인의 혈투’ 하는 식의 황당한 경기도 열렸었다. 황소는 송아지보다 조금 컸을 뿐이고, 수십 차례 여자의 수도(手刀)가 내리꽂혔지만 창자를 꺼내기는커녕 겁을 먹은 새끼 돼지만 그라운동장 한가운데서 그야말로 멱따는 소리를 질러 대던 엉터리였다.
1934년 웃터골(현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서 도원동으로 이전해 60여 년 간 환호와 탄성의 장소였던 그라운동장도 6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그 시설이 참으로 빈약했다. 1953년부터 1955년에 이르는 사이에 미군의 도움으로 개축 공사가 있었지만 야구장의 외야쪽 관중석은 그냥 맨 흙 언덕이었다. 경기에 몰두하다 보면 밑으로 줄줄 미끄러지기가 일쑤였다.
야구장에는 중세 성곽 같이 생긴 본부석 스탠드와 양쪽 덕 아웃만 덩그러니 있었다. 육상장도 엉성한 대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1956년 대통령 후보였던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이곳에서 연설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해공 선생은 그 며칠 뒤 호남선 열차에서 급서했다.
그라운동장의 외곽 담장은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철판에 시커멓게 ‘타마구(콜타르)’를 발라 두른 것이었다. 아무리 경비를 철저히 해도 가난한 관중들은 이 철판을 뜯어 놓거나 밑으로 개구멍을 뚫었다. 담을 타고 넘는 사람들 또한 부지기수였다. 사나운 경비원들이 개구멍으로 머리를 디미는 사람들을 향해 몽둥이나 돌 세례 아니면 인분을 퍼다 부었다. 멱살잡이를 당하면서 쫓겨나던 풍경도 흔했다.
그러나 좀 점잖은(?) 사람들은 소방서 옆 ‘모모산’ 기슭에 앉아 까마득히 먼 운동장 안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지금은 많은 분이 떠나셨지만 인천 체육계의 대부 정용복(丁龍福) 선생, 일본 프로 야구 한규(阪急) 브레이브스 선수였던 유완식(劉完植) 선생, 김선웅(金善雄) 전 인천고 감독, 박현덕 (朴賢德) 전 동산고 감독, 이덕영(李德永) 선생 같은 분들의 모습도 다 이 그라운동장에서 볼 수 있었다.
세 번의 전국 체전을 치르면서 크게 발전을 했던 유서 깊은 그라운동장. 문학 경기장이 생기면서 이제는 과거의 영광과 한숨을 한갓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호 ‘인천개항장 풍경’ 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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