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꿀꿀이죽’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4-09 00:22:13
전쟁과 ‘꿀꿀이죽’
돼지나 개밥이 되어야 할 것들을 먹을 수밖에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3. 전쟁과 ‘꿀꿀이죽’
이번에는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그야말로 우리들이 연명(延命)을 위해 먹었던 음식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이 또한 1950년대 빼 놓을 수 없는 인천 사회 풍경의 하나일 것이다. 연명을 위해 먹었다는 표현에서는 최소한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아주 절박한 뉘앙스가 풍긴다. 더불어 음식이라는 말에서도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온다.
그렇다. 거기에는 이것이 과연 인간의 음식인가 하는 자조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 전체가 극도로 피폐했던 그 당시에는 정말이지 ‘먹고 죽을’ 식량조차 구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돼지나 개밥이 되어야 할 것들을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흔히 말하는 ‘꿀꿀이죽’이었다.
쌀이 남아돌아 주체를 못하는 오늘날에는 상상도 되지 않을 일이지만 그때 우리는 이 해괴하고 슬픈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꿀꿀이죽은 수프 속에 식빵, 고기류, 샐러드 따위의 음식물들이 걸쭉하게 혼합된 미군의 잔반(殘飯)이었다. 쉽게 말하면 미군들이 먹다 남긴 세 끼 식사의 찌꺼기를 모은 것이다.
미군 부대 내에서 발생되는 쓰레기 처리나 병사들이 남긴 잔반을 치우는 일은 한국인이 했는데 그 처리 업자가 바로 공설운동장 야구장 서남쪽, 평양옥 가는 방향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당이 넓고 입구 오른쪽에 잘 지은 일본집이 서 있던 곳이었다. 꿀꿀이죽이 개, 돼지 대신에 사람 차례가 된 것이 바로 이곳에서였다.
인간이 굶는 마당에 축생을 먼저 먹일 수는 없는 일. 더구나 꿀꿀이죽은 매우 기름지고 풍성하면서도 매 끼니 식단이 바뀌는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초근목피 부항 든 백성들에게는 꿀꿀이죽이야말로 허한 속을 채우고 보(補)해 주는 아주 훌륭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착안한 누군가가 남의 침 묻은 이 음식 쓰레기를 팔기 시작한 것이었다.
쓰레기를 치워 미군으로부터 돈을 받고 다시 그 쓰레기를 동족에게 팔아 치부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쌀 한 가마니가 만 환쯤 되던 그 무렵, 꿀꿀이죽의 가격은 기억컨대 한 되들이 깡통 하나에 50환이었다. 결코 값이 눅다고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부친의 사업이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우리 식구 역시 일 년 가까이 그 신세를 졌던 기억이 있다.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했지만 죽기보다도 싫은 일이 그 일이었다. 어엿한 인중(仁中) 학생으로서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4·19가 나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던 며칠 동안 나는 보자기에 싼 큰 양푼을 들고 그 ‘음식’을 사러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종이, 목재, 깡통, 쇠붙이 등속의 각종 폐자재들과 거기에 커다란 드럼통 두 개를 실은 트럭이 미군 부대로부터 우리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개 낮 3~4시경이었다.
야속하다고 할까, 기막히다고 할까. 차가 도착하면 각종 쓰레기들이 내려지고 죽이 담긴 두 개의 드럼통도 한쪽으로 옮겨진다. 그러면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달려들어 내용물 속에 손을 넣어 전체를 세밀하게 조사한다. 통 속에 가라앉은 ‘왕건’ 덩어리를 건져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골라진 소시지나 햄 덩어리, 또 닭고기, 칠면조, 양고기, 스테이크 조각 같은 것들은 잘 손질이 된 후 어엿한 미제 고기로 행세하며 팔렸다.
창영동 골목에는 이런 고기류와 함께 꿀꿀이죽을 끓여 파는 전문점(?)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지금은 골목길조차 그 흔적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 골목을 ‘굴꿀이 골목’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막일꾼, 노무자, 지게꾼 같은 사람들이 끼니를 위해 이용했다.
꿀꿀이죽은 이 골목에서 한 번 더 걸러지고 물이 첨가되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게 되면 멀건 국물 속에는 으깨진 당근 조각이나 완두콩 부스러기밖에는 남지 않는데 그래도 값은 소(小)짜가 한 양재기에 5환, 대짜가 10환이나 되었다.
이렇게 적으면 꿀꿀이죽도 그다지 못 먹을 음식은 아니라는 오해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그것을 처음 먹기 시작했을 때에는 참으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부러진 이쑤시개, 담배 필터, 엉킨 ‘지리가미(티슈)’덩이, 껌을 쌌던 은박지 따위가 우리 입속에서 씹혔기 때문이었다. 끓여 퍼 놓은 죽 속에 담배꽁초가 필터만 남긴 채 풀어져 거뭇거뭇한 무늬를 이루고 있거나 씹던 껌을 숟가락으로 건져내는 순간은 정말 지옥이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군들은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코를 푼 지리가미나 이쑤시개, 껌 종이 따위가 섞이지 않도록 제법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인천 시민 모두가 연명을 위해 이 슬픈 음식을 먹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상당수의 시민과 피난민들이 여기에 목을 매고 산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밖에 또 먹을 수밖에 없었던 물질로 수구레를 들 수 있다. 이 물건은 숭의초등학교, 지금의 정문 좌측, 변전소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있던 가죽 공장에서 많이 흘러나왔다. 쇠가죽에서 마지막으로 긁어낸, 뭉글거리면서도 비계덩이처럼 희고 질긴 이 육질은 그나마 사람들에게는 요긴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생일상의 고깃국이었다.
바지저고리가 온통 땟물에 전 꾀죄죄한 영감이 대나무로 짠 ‘가고’를 메고 다니며 손저울로 달아 팔았다. 수구레가 이렇게 팔린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얼마나 마구 다루고 또 인부들이 장화발로 얼마나 심하게 밟고 다녔으면 그랬을까, 고기 속에는 모래알들이 수없이 박혀 있어서 제대로 씹을 수가 없었다.
해마다 배고픈 봄이 오면 식구들이 총 출동해 송도에서 동막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고둥, 동죽, 삐죽살을 잡는 일도, 청량산 일대에서 알 밴 칡뿌리를 캐는 일도 먹고사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주안, 용현동, 학익동 등 시 외곽까지 차지한 중국인들이 채마밭 언저리에서 냉이를 캐거나 어린 명아주 잎을 따는 일도 또한 연명을 위한 일이었다. 행여 제 밭이 다칠까 전족(纏足)을 한 중국 여인이 뒤뚱거리며 나와 쉼 없이 �라거리던 장면도 떠오른다. 우리 땅에서 우리가 중국인에게 천대받으며 나물을 뜯던 시절이었다.
동인천 채미전 거리처럼 숭의동에도 청과시장이 생겨 흩어진 배춧잎이나 무청, 파 줄거리를 주우러 다니는 일도 부끄러웠지만 삶과는 바꿀 수 없었던 절박한 일이었다. 곰표, 공작표 밀가루 한 포대만 들여놓아도 그토록 든든했던 그때, 밀가루는 고사하고 소, 닭 사료에나 쓰일 말분 가루에 소다를 넣고 찌거나 시커멓게 개떡을 만들어 먹던 사람들…. 이처럼 눈물겹고 심정 사나웠던 역사도 이제는 어언 반세기 전 세월 저 멀리 옛 이야기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호 ‘인천개항장 풍경’ 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 편집팀(enews@in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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