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서와 양색시 간 집단 난투극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3-23 11:44:07
댄서와 양색시 간 집단 난투극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1. “양풍지대(洋風地帶)에 이상(異狀)!”
1955년 5월 23일, 중구 관동에 있는 댄스홀 청풍장(淸風莊) 앞 노상에서 미군 상대 댄서들과 몸을 파는 양색시들 간에 벌어진 집단 난투극에 대해 특필한 당시 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이 희한한 사건은 양색시군(群)과 댄서들 간에 가로놓인 우열감(愚劣感)이 발단이 되었다. 우월감을 가진 쪽은 댄서들이고 열등감을 느끼는 쪽은 양색시들 이었는데 그만 사소한 언쟁이 도화선이 되어 폭발해 버리고 만 것이다.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여인들과 역시 미군을 상대로 춤을 추며 비슷한 방법으로 생활하는 댄서들의 처지는 아무리 따져 보아도 거기서 거기라고 할 것인데 당사자들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 같다. ‘홀 하우스’에서 곧장 이루어지는 매춘과 멋들어진 사교춤을 추면서 단계를 밟아 가며 이루어지는 그것과는 엄연히 격이 다르고 차별이 있어서 자기들 간에 한 편은 우월감을, 다른 한 편은 열등감을 가지고 지내 왔던 모양이다.
애초 그 날의 집단 난투는 굿 구경이 원인이었다. 저녁 6시 반쯤, 청풍장 인근의 어느 집에서 굿판이 벌어졌는데 굿 구경을 하던 한 댄서와 양색시의 신발이 바뀌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크게 시비 거리도 아니어서 웬만하면 그대로 끝이 날 법도 했는데, 동업자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감정의 앙금이 있어 항시 으르렁거리던 터라 두 앙숙 간에는 급기야 듣기 어려운 상소리 말다툼이 일어나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런데 작은 말다툼 실랑이가 그토록 큰 패싸움으로 확대된 것은 이 광경을 목격한 청풍장 바로 옆 2층집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댄서 때문이었다. 남의 싸움에 흥분한 이 여인이 웅성거리며 길에 서 있는 한 양색시를 향해 화분을 던진 것이었다. 정통으로 화분을 맞은 여인은 그만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고 이에 격분한 양색시 쪽 여인 20여 명이 떼로 몰려 와 1시간이 넘도록 ‘잡아 뜯고 때리고’ 난투를 벌인 것이었다.
이 양풍 지대 여인들의 패싸움은,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인천경찰서 형사대에 의해 진압이 되었지만 여인들 대부분이 한 움큼씩 머리카락이 뽑히고 여기저기 할퀴고 뜯긴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물론 머리에 화분을 맞은 여인과 또 한 명의 여인은 상처가 커서 관동 공립병원으로 옮겨져 가료를 받았다.
이 웃지 못 할 이야기를 옮기다 보면 인천의 ‘특정 지역’ 내력에 관해 간단하게나마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양색시, 댄서 무리가 활동하던 당시의 인천 풍경을 또한 빼 놓을 수 없다.
해방 직후인 1947년 10월, 미 군정청은 포고령을 발표하고 일본식 유곽 제도를 폐지했다. 이에 대해 모두 ‘여성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익 옹호’라는 아름다운 구호와 더불어 문명국으로서의 인간 위의(威儀) 회복을 통해 어깨를 펼 수 있게 된 점을 환영했다.
그런데 막상 미군이 진주하면서 동반자처럼 생겨난 것이 다름 아닌 양색시, 양공주와 댄서들이었다. 필요는 신(神)도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가난과 무지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 밀려난 힘없는 여성들이 이번에는 풍족한 주둔군 미군 부대 주변으로 몰려드는 아이러니가 생겨난 것이었다.
사실 유곽이라는 것은 일본식 공창 제도였다. 1876년 부산, 원산 개항에 이어 인천이 개항된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한반도에 건너 와 살게 되면서 서둘러 들여온 게 바로 이 유곽이었다. 지리적으로 저들과 가까워서 그랬는지 첫 상륙지는 부산이었다. 1902년 부산 지역에 산재해 있던 이른바 ‘특별 요리점’들을 모아 이 땅에 최초의 유곽을 만든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부산의 유곽이 크게 번창하자 다른 도시에도 눈을 돌려 마침내 그 해 12월 인천을 시작으로 1903년에는 원산, 1904년에는 서울, 이런 순서로 유곽을 탄생시켰다. 서울을 제외하면 모두 항구 도시로서 저들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성(性)에 관한 한 비교적 담백한 편이었던 우리 나라에 세계적인 섹스 애니멀 일본인들이 이런 식으로 저들의 공창을 개설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인천 땅 중구 선화동(화개동) 한 구석에 생긴 유곽이 바로 부도루(敷島樓)였다. 이 부도루가 꾸준하게 영업 실적을 올리면서 인접 화개동(속칭 하가동)에 한국 사창가도 생겨났다. ‘흉보면서 닮는다’는 말대로 일본인의 점잖지 못한 풍습을 탓하면서도 어느 결에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후일 미군이 월미도에서부터 숭의동에 이르는 인천항 전체를 차지했을 때 양공주, 댄서의 무리가 그 주변에 독버섯처럼 돋아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군이 인천 시내에서 활개를 치던 50~60년대, 초등학교에서 중·고·대학생 시절을 보냈던 필자는 그때 참으로 낯 뜨거운 풍경을 많이 경험했다. 대낮에도 아무데서나 여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엉덩이를 주무른다거나 또는 예사로이 입을 맞추는 행동 따위는 실로 낯 뜨거운 충격이었다.
양색시들 또한 단정치 못한 옷차림에 껌을 짝짝 소리 나게 씹으며 고작 C레이션 나부랭이와 바꾸어 미군의 요구를 아무데서나 들어 주는 실륜(失倫)를 저지르곤 했다. 이런 행위를 두고 “금수(禽獸)만도 못한 양키 놈들!”이라고 분개하시던 약국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우리 나라에 주둔한 미군들은 저학력자가 많았고 양색시들 또한 그와 비슷해서 아주 상스러운 말을 보통 말보다 더 예사롭게 썼다. 후에 그 의미를 알았지만 그들은 ‘싼 오브 비치’니 ‘퍽 유어 마더’니 하는 지극히 저속한 언어도 아무 때나 마구 길바닥에 뿌려댔다. 더구나 이리저리 흘러나온 그들의 성(性) 용품을 아이들이 풍선인 줄 알고 길게 불며 놀던 그 흉한 광경은 정말 웃지 못 할 난센스였다.
아무튼 댄서와 양공주들 간의 집단 난투가 있었던 그날 저녁 8시 반쯤 경찰은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고, 다음다음 날에는 윤락녀에 관한 자료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인천 시내에 웃음을 파는 여인의 총수는 1,707명으로 이 가운데 양색시를 포함한 미군 상대 접대부만 378명이었다. 곁가지로 적어 보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 중에 여대 출신의 고학력 여성이 4명, 15세에서 20세 사이의 미성년 여성도 29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세월이 흘러 그렇게 동업자간에 패싸움을 벌이고, 단속에 적발되고 하던 양키 딸라니 양공주니 또 댄서니 하는 윤락녀들도 이제는 다 사라졌다. 그리고 미군들이 길 위에 뿌려 놓던 저급한 행태의 문화도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해방과 6·25를 거쳐 50년대, 60년대 그 시절 우리가 보았던 인천의 한 풍경이었던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근래까지 숭의동과 학익동이 특정 지역으로 남아 있었던 것 또한 일본인과 미군이 뿌리고 간 그 길고 긴 역사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호 ‘인천개항장 풍경’ 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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