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방에서 짜자이 안 먹어, 딴 거 먹어
인천의문화/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2007-04-14 01:24:48
“학생이, 방에서 짜자이 안 먹어, 딴 거 먹어”
<기억 속에 남은 인천 개항장 풍경>
4. 데이트조차 어렵던 그 시절 학생들
해방과 6·25를 거치며 미군을 통해 서구 문물이 전파되고 그래서 사회의 많은 부분이 변화하고 있었지만 남녀칠세부동석만은 언제까지나 요지부동일 듯싶었다. 데이트를 하려면 우선 남녀가 만나는 절차부터 간첩이나 비밀 정보 요원 접선하듯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은밀해야만 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편지 따위로 심정을 전해야 하는데 버젓이 우체국 소인을 찍었다가는 여자 쪽 아버지나 오빠에게 치도곤을 당하니 그리 할 수도 없고 쪽지를 적어 몰래 창문 틈새에 꽂아 놓는 것이었다. 아니면 좀 위험하기는 해도 여자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잽싸게 스쳐 지나가면서 전하는 방법뿐이었다.
이렇게 접선이 성공했다고 해도 거리를 가려면 ‘신작로 행길’을 사이에 두고 남자는 이쪽 여자는 길 건너 저쪽을 걸으며 가끔 눈짓, 고갯짓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 주는 참으로 딱한 데이트를 해야만 했다. 이렇게 세심하게 주의와 조심을 해도 거리 도처는 지뢰밭 같아서 툭하면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다.
동네마다 사나운 왈패들이 있어 용케도 데이트 현장을 알아내고는 길을 가로막고 못된 심술을 부렸다. 말도 안 되는 질투요, 트집이었지만 정말 재수 없이 된통 걸리는 날이면 여자가 보는 앞에서 따귀를 맞고 코피가 터져야 했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은 까닭에 더 몸을 사려야 했다. 학생 출입이 가능한 도너츠 집엘 가도 여자는 저쪽 테이블 남자는 이쪽 자리, 하는 식이었다. 남녀 학생의 눈곱만치의 불미함(?)도 곧 정학 같은 중징계가 따랐다. 단순한 동석이라 해도 걸리는 날이면 훈육주임으로부터 상당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나마 고마웠던 것이 시내에 도너츠 집들이 몇 군데 있었다는 점이다. 기독병원 쪽에서 율목동으로 내려서는 계단 조금 위의 ‘인천도나스’, 그리고 바로 그 밑 삼거리 모서리에 있던 ‘용일당’, 내리교회 밑에서 축현학교로 향하는 샛길에 문을 열었던 ‘명물집’이 그런 장소였다. 그 애타고 빛바랜 추억을 되씹을 겨를도 없이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청춘의 더운 피는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밤을 도와 송도 능허대 모래사장을 향하고 개건너 솔밭, 또는 낙섬 둑길을 거닐어야 했다. 월미도 쪽 대성목재 원목 야적장도 스산하기는 했지만 호젓한 데이트 코스로 손꼽혔다. 그러나 이 장소들 역시 1970년대 이후 ‘개발’이라는 역사(役事)를 거치면서 모조리 뭉개져서 지금은 단 한 군데도 남아 있지를 않다.
이제 이 글의 제목에 얽힌, 다소 과장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그 ‘딴 세상’ 이야기처럼 떠돌던, 그러면서 시절을 훨씬 앞서 가던 이야기를 하나 해 보자. 얌전한 우리 정도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그 이야기는 당시 인천에서 가장 남자답고 패기 있는 학교로 이름났던 모 고등학교 학생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야기는 바로 시내 모 중국집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학생이, 방에서 짜자이 안 먹어, 딴 거 먹어. 여자, 안 돼, 안 돼 해.”하는 희한한 이야기였다. 풍기 문제 때문에 필자가 조금 각색했거니와 당시는 모여 앉기만 하면 입에 올리는 재미있는 화젯거리요, 웃음거리였다.
그 당시 중국집들은 대개 여러 사람이 탁자에 앉는 넓은 홀과 벽이 막힌 온돌방에 방석을 깔고 앉는 몇 개의 객실이 있었다. 일본 찌꺼기가 남아 있던 시절이어서 다다미방도 흔히 볼 수 있었다. 남녀 동반 손님이 들어서면 눈치 빠른 ‘이다바’가 친절하게도 가장 후미진 구석방으로 안내하는 것이 통례였다. 방에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고급 요리를 주문하라는 법도 없었고 빙글거리는 웃음만 띄울 뿐 이다바 녀석이 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주문을 받은 뒤 물 컵을 놓고 방문을 닫은 이다바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면 ‘야끼만두’와 수타(手打) 자장면이 나올 때까지는 누구 하나 범접함이 없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래서 아무의 눈도 의식할 것이 없는 이 적막하고 고즈넉한(?) 골방에서는 고작 도너츠 가게에서도 기를 못 펴는 우리네 같은 순진한 ‘학필이’ 따위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딴 세상 사건이 생기는 것이었다.
물론 그 순서를 바꿔 자장면을 다 먹고 난 뒤, 혹 하릴없이 시간을 쓴다 해도 천성이 느긋한 대국인들, 중국집 주인들은 좀 해서 나가 줄 것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 당시 중국집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마 이렇게 방값과 식대가 한꺼번에 해결되어 가난한 주머니를 절약하게 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이 이야기 끝에는 주인공인 그 학교 학생들이 여자를 동반하는 경우 “소리, 소리, 시끄러워, 우리 살람이 장사 못해.”라며 중국집 짱꿰(藏櫃)들이 고개를 흔들었다는 풍설이 덧붙여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대로라면 버젓이 교복을 입었던 모양이고 그래서 중국집 주인이 어느 학교 학생인 줄 알았을 것이고, 또 그래서 학교 이름이 실명으로 나돌았겠지만 그렇게 저돌적이었던 그때 그 학교 학생들의 전설적인 용기 하나만은 지금 생각해도 부럽기 그지없다.
어쨌거나 그 고루했던 그 시절에 비해 오늘날 중국집이 아니더라도 버스 정류장이나 전철 안이나 가릴 것 없이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못 살 것’처럼 허리를 있는 대로 꼭 끌어안고 또 서로 뺨을 비비며 다니는 자유로운 젊은 연인들을 볼 때마다 “너희들이야말로 더 없이 좋은 딴 세상에 사는구나.”하고 부러운 듯, 괘씸한 듯 입 속 말을 뇌이곤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 지금 문득 그 시절 풍경에 가장 흡사한 구석방을 아직도 유적(遺蹟)처럼 가지고 있는 중국집, 외환은행 건너편 중구 신생동의 신성루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또 무슨 심사인지 모르겠다.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호 ‘인천개항장 풍경’ 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김윤식의인천개항장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의 공동변소 (0) | 2023.04.08 |
---|---|
맥주깡통으로 엮어 만든 양철지붕 (0) | 2023.04.08 |
운동장 최 씨, 본부석까지 와 주세요 (0) | 2023.04.07 |
전쟁과 ‘꿀꿀이죽’ (1) | 2023.04.07 |
댄서와 양색시 간 집단 난투극 (0) | 2023.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