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과 이성계-원통이고개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14 19:42:13
1. 조선 건국과 이성계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일본 해적인 왜구가 배를 타고 전국을 다니며 해안을 습격하여 조선을 괴롭힙니다. 왜구를 물리치면서 이성계와 최영 등의 무인 세력이 등장합니다.일부 귀족들이 대토지를 차지하고는 큰 농장을 만들어 호화 사치를 즐기며 정치를 어지럽히자 새로운 개혁 세력이 등장합니다 개혁 세력과 손잡은 이성계는 위화도 화군을 단행하여 권력을 잡습니다.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고려는 옛 고구려 땅인 요동으로 진출합니다. 1388년 원나라를 내쫓고 새로 들어 선 명나라가 요동을 관리하겠다고 통보해 오고 고려의 우왕은 이성계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을 정벌할 것을 명합니다.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합니다.
2. 조선 건국과 닫히는 서해를 알아봅시다.
고려의 최고 가문으로 지위를 누리고 바다를 통한 무역으로 번성했던 인천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해상 교통로였던 인천 앞 바다의 자연도, 덕적도, 영흥도, 교동도 들은 교려 왕족의 유배지로 바뀝니다.
조선은 상업을 억제하고, 국제 무역을 금지하여 인천은 한적한 항구가 됩니다.
국가에서 하는 조공 무역만이 허락되었습니다. 조공무역은 평안도 압록강가에 있는 의주를 통해서 행해집니다.
1) 이성계의 조선 건국 과정
고려는 끝무렵에 이르러 매우 큰 혼란에 빠집니다. 안으로는 몇몇 귀족들이 많은 토지를 차지하여 나라 경제를 어지럽히고, 밖으로는 크고작은 전쟁이 계속됩니다. 홍건적은 한때 고려의 도읍인 개경을 점령하였고, 왜구는 개경 바로 앞인 강화도까지 습격을 하였습니다. 왜구의 피해는 특히 심하여 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해안을 못쓰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해상 교통이 끊기면서 조운이 불가능하게 되어 지방으로부터 조세(주로 쌀)를 운반할 수가 없어 국가 경제는 파탄에 이릅니다.
최영, 이성계와 같은 무인들은 이들을 물리치면서 자연스럽게 세력을 얻었습니다. 조준, 정도전 같은 새로운 개혁파와 손을 잡은 이성계는 위화도 화군으로 고려를 옹호하는 최영을 몰아내고는 정권을 잡게 됩니다.
2) 위화도 화군과 이성계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고려는 잃었던 땅을 되찾고 , 요동을 쳐서 원을 몰아냅니다. 그러나 중국에 새로 들어선 명은 철령위를 설치하여 요동을 직접 관리할 것을 고려에 통보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최영이 중심이 되어 요동을 정벌하자는 여론이 일어납니다.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 통사, 이성계를 우군도 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출정시켰습니다.
요동 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는 좌군도 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요동 정벌은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군사를 돌려 우왕과 최영을 내쫓았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쥔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과함께 손을 잡고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고려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종장을 빼앗아 탄탄한 기반을 닦았습니다. 고려 왕조를 유지시키면서 온건한 개혁을 주장하는 정몽주를 제거하고는 1392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조선을 세웠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에게 조선을 열어 태조로 오를 수 있는 권력을 잡게 해주었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 왕의 명령을 받아 명을 치러 가던 이성계가 군사를 돌려 창 끝을 고려에 들이대고 권력을 잡은 성공한 쿠데타였습니다.
쿠데타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안정된 정권을 유지하고자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사대 외교를 펼쳤으며, 무역을 금하여 고려 때 번성했던 해상 세력을 억눌렀습니다. 인천이 쇠퇴하게 된 이유가 원통이 고개 전설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민심의 동요를 생각하여, 국호를 계속 고려라 하고 서울을 개경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개경에는 옛 고려를 추모하는 구세력이 뿌리 깊이 남아 있는 만큼 새로운 도읍지를 건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널리 퍼져 있던 풍수지리설로 볼 때 개경은 지덕이 이미 쇠한 땅이었습니다.
3) 조선 건국과 원통이 : 고개무너진 백 봉우리의 꿈
동암에서 부평으로 넘어 가는 고개를 원통이 고개라고 부릅니다. 그 고개는 너무 원통한 나머지 주저앉아 원통이 고개가 되었다는 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무학대사로 하여금 도읍지가 될 만한 곳을 두로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 다니던 무학대사는 부평에 이르러 들이 넓고 기름지며 가까이 한강까지 끼고 있으므로 도읍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도읍 터는 백 개의 봉우리를 가져야 하는데 세어 보니 봉우리가 꼭 백 개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이성계는 부평 땅이 능히 도읍이 될 만한 곳이라 기뻐하며, 주안산(만월산-동암역 앞산)에 있던 주안사로 무학대사를 보내어 산신께 제사를 지내도록 당부하고는 흡족한 마음으로 개성으로 돌아갔습니다. 뒤에 다시 백관을 이끌고 찾아와 확인하니 백 개였던 봉우리가 아흔 아홉 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 개의 봉우리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소식을 전해들은 한 개의 봉우리는 원통해서 주저앉아 원통이 고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99번째 봉우리로 가는 고개는 지금도 아흔 아홉 번째라는 뜻의 '아나지 고개'로 불리고 있습니다.
원통이 고개는 왜 갑자기 주저앉아 버렸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전설로 표현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고려는 옛 고구려 땅의 회복을 항상 꿈꾸어 왔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 정벌을 포기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밖으로 뻗어나가기 보다는 방어하기에 적합한 곳에 도읍지를 정하고자 하였습니다.
부평은 그러한 조선의 바램과는 거리가 먼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로 뻗을 수 있는 서해를 아우르고 넓은 평야를 끼고 자리잡은 부평은 조선의 쇄국 정책과 어울리지 않는 곳 이었습니다. 산과 한강에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한양(현재의 서울)이 도읍지가 되면서 조선은 쇄국 정책으로 세계사의 흐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인천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옹진군의 지명유래 (0) | 2023.03.22 |
---|---|
동구의 지명유래 (1) | 2023.03.22 |
미추홀 왕국의 옛 도읍지 문학산 지역 (2) | 2023.03.21 |
월미도 연표로 알아본 인천의 역사 (2) | 2023.03.11 |
소서노와 인천 (0) | 2023.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