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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동구의 지명유래

by 형과니 2023. 3. 22.

동구의 지명유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15:15

 

<<동구의 지명유래>>

 

1882(고종 19) 522일 한·미 최초의 조약이 동구 화도진(현 화수 1) 군영에서 체결되었다. 미합중국 슈펠트 제독과 조선의 신헌 대사가 자리해 조먁을 맺었다.

 

다음 해인 1883(고종 20) 개항을 보게된 유서깊은 화도진에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표지석을 제막한 바 있다.

구한말에는 강화도와 더불어 외세의 침입을 저지하는 서해안 방위의 요충지였고, 1882년 한미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된 화도진지가 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항도 인천의 발상지인 동구는 인천의 서부지역 바다에 접해 일찍이 해상교통을 이용한 공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최근 도시 규모의 발달로 인하여 개발되는 신흥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시 활동이 침체되어 있다.

 

 

만석동

조선시대 나라에 바치는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현물세(,보리,)를 쌓아두던 조창이 전국에 10군데가 있었다. 각 조창에 보관하였던 세곡은 정부의 수급 계획에 의해 한양으로 운반되어 갔으며,

 

바다로 운반되는 현물은 조선(漕船)에 싣고 서해안을 통해 인천을 지나 강화, 김포를 거쳐 한강으로 올라가 용산에 적치했었다. 인천지방 농민들이 납부하는 현물은 용산 정부창고에 운반되는데, 만약 지정 기일 내에 납부하지 않으면 고울 사또는 문책을 당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원거리 고을에서는 미리 세곡을 운반해 와서 야적했다. 야적하던 곳이 인천에는 만석동, 영종 경서동 등지인데 특히 만석동 포구에는 가장 많은 세곡을 야적하였고, 그 수량이 '만석'이라 된다고 하여 '만석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인철도 시발지

지금의 만석 고가 도로 부근은 경인철도의 시발점이었다 한다. 여기에 많은 화차들이 즐비하게 위치해 있었는데, 화차들이 사람들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은수 옹)

 

굉이부리 나루

만석동에 '고양이부리'라는 나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굉이부리'는 고양이부리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재의 판유리 공장 자리라고 한다.(이은수 옹). 굉이부리에는 호랑이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인천향토사담).

 

이 곳은 옛날에 해변가로 산림이 울창한 외진 곳이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부녀자 5~6명이 나물을 캐는데, 그 곳에 한 굴이 있어서 자세히 보니 그 굴 안에는 호랑이 새끼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호랑이 새끼들이 하도 귀여워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미 호랑이가 나타나 '어흥'하고 소리를 질렀고, 이들은 혼비백산하여 나물 바구니를 버린 채, 집으로 도망왔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들의 나물 바구니가 마을 앞에 놓여 있었다. 호랑이도 제 새끼를 해치지 않으니 고마운 표시로 나물 바구니를 물고 갖다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화수동

화수동은 '화도리''수유리'의 머리 글자를 따서 생긴 이름이다.

 

원래 인천부 다소면 화촌동이 되었다가 19065월 동을 늘려 수유동, 화촌동, 신촌리 등으로 분할 되었으나, 다시 화동, 신화수리라는 이름을 거쳐 1937115일 인천부가 정회 규정을 제정해서 동명을 개칭할 때 화수정으로 다시 부르게 된 것이다.

 

광복 후 1946년 동명을 화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화촌, 화동은 이 마을 지형이 마치 장미꽃과 같다고 해서 연유된 이름이고, 신화수와 화수란 화동과 물넘이를 뜻한다.

 

1950년 인천시 조례 개정으로 화수동을 화수1, 2, 3동으로 구분했고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화수 부두 마을

화수 부두 마을은 화수 부두를 중심으로 형성된 어촌 마을이다.

 

화수 부두 마을은 간조 시에 수심이 없어 만조 후 3시간 내외면 출입항이 가능하긴 했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50톤 이상의 어선 50여척이 드나들고 수산물 공판장이 있는 인천 제2의 어항이었다.

 

1988년 화수 부두 준설 공사로 본 부두 인접 지역의 공유 수면을 매립하고, 항로를 무상으로 준설케하는 등 한 때 제 2의 전성기를 꿈꾸기도 했으나, 어획량 감소 등으로 지금은 소규모의 어선들만 드나들고 있다.

 

무너미 마을

'무너미' 는 고래 마루턱이란 뜻으로 '물넘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구정백서(區政白書)의 화수동의 동명 유래를 보면옛 무너미는 화도진이 있던 병영촌으로 유명하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화도진을 중심으로 한 마을 일대이다.

 

화도진지

화도진은 고종 16(18979) 서해안의 감시와 이양선의 침범을 반격하기 위해 축조되었고, 고종 19(1882) 이곳에서 고종의 대신 신헌과 미국 전권 대사 슈펠트 제독 사이에 '한미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됐다.

 

갑오경장으로 군제가 개편됨에 따라 진지를 폐지하였는데, 19889월 진지를 복원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현재 주민들의 휴식처로 제공되고 있다. 화도진지는 시 지정 기념물 제2호이다.(화수동 138번지).

 

 

금창동

금창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금곡리와 우각동 지역인데, 광복 후 금곡리 지역은 금곡동이 되고, 우각리 지역은 창영동이 됐다. 1985년 금곡동과 창영동을 통합하여 그 머리 글자를 따서 '금창동'이라 하였다.

 

금곡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금곡리 지역으로서 '쇠골' 또는 '금곡'이라 하였는데 1946년 금곡동이 되었다. 그 후 1985년 창영동과 합쳐 금창동이 된다. 금곡동에는 현재 서적 상들이 몰려 있고 또 오래된 영화관 중의 하나인 피카디리 극장(구 문화극장)이 있다.

 

창영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우각리 지역으로 그 지형이 소뿔처럼 생겼다 하여 '쇠뿔고래·쇠뿔·솔뿌리 고래 또는 우각동·우각현·송근현'이라 하였다.

 

그 후 일제 때인 191441일부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각리로 하였다가, 1936년 제1차 부역확장때 창영정이라 하였으며, 광복 후 창영동이 된 것이다. 창영동이란 새롭게 번창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생긴 동명이다. 창영동에 현재 영화초등학교와 창영초등학교, 기독교사회복지회관, 창영교회 등 교육문화 시설과 많은 고 서방들이 있다.

 

금곡말

금곡이란 금잔디 고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금광의 근거는 없으나 금이 나온 골짜기라는 설 그리고 왜정 때 성냥회사의 누른 유황을 금으로 비유하고 금곡이라고 했다는 설 등이 전해오고 있다.

 

새골

금곡동과 송림동 사이에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로 기와집이 주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촌이었다고 한다(김남규 옹). 인천향토사고에는 쇠골말이 나오는데, 쇠가 난 골짜기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김남규 옹의 말을 빌면, 쇠골은 사이골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한다.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서해안 풍어제는 크게 '배연신 굿''대동굿'으로 나뉘는데, 배연신굿이란 선주들이 자기네 배와 선원의 안전 그리고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무녀의 관장으로 배 위에서 이뤄지는 굿을 말한다.

 

대동굿은 마을 사람들이 해상에서의 안전과 풍어, 협동과 화목을 기원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비용을 마련한 마을 공동의 제의를 말한다.

 

굿의 진행 과정을 배연신굿의 경우 신청울림(신을 청하는 굿)을 시작으로 강변굿까지 12거리로 구성되어 있고, 대동동굿은 신청울림을 시작으로, 해상에서 생명을 잃은 넋을 달래고 마을의 액운을 배에 실어 보내는 강변용신굿까지 24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창영동은 42-3번지 최음전 씨가 전수자이며 시 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제 82-나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평동

화평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평동과 화촌동의 지역인데, 1914년 화촌동과 평동을 병합하여 화평리라 하였다. 그 후 1936년 제1차 인천부역 확장 때 일본식으로 화평이라 하였다가, 광복 후 1946년 동명 변경에 따라 화평동이 되었다.

 

이칙 묘()

이칙(李則)은 인천 화평리 태생의 고성(固城)이 씨이다. 그의 자()는 숙도이고 시호는 정숙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했고 재주가 있었으며, 세조 2(1456)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과중시에서 장원한 수재이다.

 

그는 학식과 덕망이 있어, 임금 앞에서도 서슴치 않고 충간하여, 성종은 또한 그를 신임하였다.

 

이칙은 항상 주장가리를 모든 일을 도()로 다스리라는 것이었으며, 정직하고 결백하여 공정하게 정사를 처리하였다.

 

그가 대사성의 요직에 있을 때, 충청도 관찰사로 어명이 내렸는데, 성균관 유생들은 임금에게 건의하기를 이칙은 우리들의 스승이니 그대로 유임케 하여 주기를 바랐으며, 고상한 도리와 이치를 더 받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더니 성종은 이칙이 재직에 있으면 좋은 줄은 나도 알지만, 그가 도백으로 나가면 그 도 백성이 감화를 받아 훌륭한 백성이 될 것이 아니냐! 하고 거절하였다.

 

그는 화평동에 살다가 죽으니 묘를 인천 화도 뒷산 매화혈 명당에 썼다. 이 산소의 안산은 바다를 접한 만석동 괭이부리에 직면한다. 이칙의 묘가 있는 쥐산과 고양이산은 서로 마주보고 있으나, 그 사이는 바다가 끼어 있어 고양이가 쥐를 잡아 먹지 모사는 형극이라서 이 산소는 명당이라 하였다.

 

이괄(李适)은 이칙의 후손인데 이괄은 역모(이괄의 난)를 하여 그의 일족이 모두 멸문을 당했으니, 그의 선조인 이칙의 산소까지 파내라는 영이 내려졌다.

 

왕명을 받은 한 신하가 인천에 있는 이칙의 산소를 찾아 나셨으나, 그 날 따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지척을 문별 못할 지경이라 그들은 할 수 없이 돌아 갔다고 한다.

 

그후 200여년동안 그 산소는 원형대로 보존되었는데 제물포가 개항되자 이칙의산소가 있는 쥐부리와 굉이부리 사이의 바다를 막아 육지가 되어 버렸고, 그 산소 부근까지도 도시가 되어 자손들이 석암동으로 산소를 이장하였다. 얼마 후 이 장지 역시 도시가 되어 또 다른 곳에 이장하였다 한다.

 

 

송림동

송림동은 본래 인천부 다소면 송림리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새말, 매하지, 장승거리, 샛골, 활터고개를 병합하여 송림리라 하였는데 1936년 제1차 인천부역 확장때 송림정이 됐다. 광복 후 1946년 동명 개정에 따라 송림동이 되었다.

 

송림1동 지역은 일정때만 해도 인천의 변두리였던 곳으로 일찌기 '노다' 간장 공장이 넓은 터전을 잡고 조업하였으며, 바로 인접하여 조선성냥회사 등 큰 공장이 들어선 까닭에 비교적 곧고 큰 한길이 뚫리게 되었다.

 

그 막바지에 전염병연구소(현 동명초등학교)가 있었다.

 

새골말(샛골)

마을 사이에 있는 골짜기 마을을 말한다. 최병두 옹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송림3동의 교회 부근 마을이다. 손제영 옹의 말에 의하면, 현재의 동일목욕탕 저지대로 대밭이 많이 있었다고도 한다.

 

활터고개말

현재의 송림 4동 국제다방 근처의 고개와 그 일대 부락이다.

 

최성식 옹의 말에 의하면, 현재는 한성목욕탕이 있는 곳으로 송림2동에 활터가 두 군데 있었으며, 이곳 송림4동 고개에도 활을 쏘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 일대는 과일 농장도 있었다고 한다.

 

고개를 넘는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헐떡고개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밖에도 장승거리말(장승의 세웠던 말), 매화지말(매화꽃 같이 생김), 간촌말(마을 사이에 있는 마을임) 등이 전해오고 있다.

 

인천 두묘(痘苗)제조소

일정 때 인천 송림동에는 동양에서 유일한 두묘 제조소가 있었다.

 

두묘란 우두약으로 당시 일본인들은 한우인 송아지에서 뽑는 두묘를 전 세계로 공급하였는데, 그 질도 제일 좋은 우두약이라 했다. 두묘는 춘추 2회에 걸쳐 제조되었는데, 제품은 일본, 중국, 미국 등지로 수줄되었다.

 

일회생산품이 350만명분이라 하니 한국산 송아지 한 마리에서 우두묘가 약 20g 정도 제조되는데, 이를 1천본의 세관에 담아 구분하였는데, 1본의 분량이 약 50인분의 두묘가 되니 송아지 한 마리당 얻는 양은 5천명분이나 되었다고 한다.

 

춘추로 송아지 300마리가 필요하였는데, 1년에 한 마리에서 약 3만원의 수입이 되었다. 그런데 송아지 대금은 고작 1천원 미만이어서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인천 두묘 제조소가 있는 송림동에서 그 후 금곡동으로 이전되었다가 곧 폐지되었다 한다.

 

 

송현동

송현동은 본래 인천부 다소면 송현리 지역인데, 소나무가 많은 고개였으므로 '솔고개'또는 '송현'이라 하였다. 일제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현리라 하였으며, 1936년 제1차 인천부역 확장 때 송현정으로 고쳤다. 그 후 1946년 동명 변경에 따라 송현동이 되었다.

 

그리고 송현동은 19621, 2, 3, 4동으로 분동되었는데, 그 중 송현4동은 1977년 화수2동에 넘겨주고 현재 송현 1,2,3동만 남게 되었다.

 

원래 송현동은 큰 갯골이 내륙으로 깊숙히 어어진 수문통 지역으로 옛날에는 이 주변이 갈대밭으로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1930년대 말 이곳을 매립하여 공장 부지와 주택지를 조성하였다.

 

특히 이 고을 매립하면서 남겨놓은 수로가 배다리(창영동 파출소 앞)까지 이어져 소형 목선이 밀물 때 이수로를 이용하여 드나들었다고 한다.

 

송현1동은 동인천역 배후로부터 수도국산 배수지 부근까지 걸쳐 있는 지역인데, 현재 중앙시장(별칭 양키시장), 송현시장 등 큰 시장이 들어서 있으며 오성극장(현 시네팝)과 미림극장도 있다.

 

송현2동은 1991년에는 수문통 하천이 복개되어 앞으로 이 지역 발전이 크게 기대된다.

송현3동은 본래 수도국산 북녁 기슭인데, 그 후 해면을 넓게 매립하여 인천제철 제1공장과 수출6단지가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