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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남구의 지명유래

by 형과니 2023. 3. 22.

남구의 지명유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16:08

 

<<남구의 지명유래>>

남구는 인천광역시의 남쪽에 돌출한 해안선을 따라 남동구와 접해 있고 숭의동 지역이 중구, 도화동 지역이 동구와 학익·용현동 지역이 연수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구의 총 면적은 시 전체의 7%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천시가 광역시로 승격된 이후, 시세의 중심이 남구 지역으로 이동, 현재의 남구는 신시가지 개발과 급격히 팽창하고 있어 인구증가 등으로 행정수요 급증은 물론, 구 전체가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 인천광역시의 중심구 역할을 하고있다.

 

인천광역시 남구는 관내 문학산 부근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인 각종 토기가 출토 되었으며, 금석병용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 등의 지석총군이 남구 관내의 문학, 학익, 주안동 지역에 잔존하고 있다.

 

그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인 5천년~6천년전에 태고민이 남구 지역에서 정착생활을 했을 가능성을 지닌 선사문화사적 위치에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건국하자 그의 두 아들 비류, 온조 두 형제가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가 지금의 문학산 기슭 일대에 나라를 세워 미추홀이라 하였다. 이것이 역사에 나타난 인천의 발상지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의 연혁에서 별다른 특징이 없으나, 1392년에 인천이 경원부에서 인주로 복귀되고 1413년태종13년 인천군으로 되었을 때부터 군.읍의 소재지는 남구의 관교동에 위치하게 되었다.

 

1416(세조6)에 소현황후(세종비)의 외향이라하여 인천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748(영조24)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757년 다시 부로 환원될 때까지 남구는 문학산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남구 전 지역은 인천부와 접경을 이루고 있던 부천군 지역에서 편입해 남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해인 1948815일 공식적으로 출장소 명칭과 관할구역을 재 조정해 남동, 문학, 주안출장소의 3개 출장소로 관할구역 일부를 변경하게 되었다.

 

19673월 인천시 구설치에 관한 법률 공포로 19681월 인천시 남구로 개청하였다. 개청 당시는 1개 출장소와 30개 법정동과 24개 행정동이 있었으며 77.6평방km의 면적에 117,506명의 인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198171일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되어 인천직할시 남구로 개칭해 행정을 수행했다.

 

70년대 개발붐과 급격한 인구 팽창으로 1987년 말 현재 70여만명에 육박하는 구민을 포용함에 따라 행정수행 능력의 한계점에 도달해 19881월 대통령령에 의거 간석 구월지역과 남동출장소 관할동을 분할하여 남동구를 신설했다.

 

또한 199531일 연수 토지개발 지역의 완공에 따라 연수, 동춘, 옥련, 선학동을 분할해 연수구를 신설했고 이에 따라 남구는 6개 법정동과 숭의 4개동, 용현5개동, 학익2개동, 도화3개동, 주안8개동, 문학동과 관교동의 24개동 행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남구는 현재 인구 423,655명의 인천의 중심구로서 서해안 시대의 전개와 함께 활기찬 대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남구의 상징물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고고한 품위를 가진 '매화' 그리고 사계절 푸르른 '소나무'이다 또한 농경문화의 대표격인 '황소'가 상징 동물이다. 인천의 중추역할을 담당해온 남구는 인천 역사의 태동지로 대표되는 '문학산', '인천도호부청사', '인천향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또한 인천 발전의 선도지로서 지리적으로 중앙에 있으며 금융, 상권의 집중지이다. 그리고 교육을 선도하는 시립인천대학교와 인하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관교동

관교동이란 관청과 향교가 있는 '관청리'라는 뜻에서 생긴 동 이름이다.

 

원래 관교동은 인천의 구읍이었으나 현재에는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옛 면촌에는 동헌, 객사, 향청, 창고터가 남아 있었으며, 동촌에는 향교를 중심으로 문묘등이 있었다고 한다.

 

196732일자로 문학, 관교동이 분동됨에 따라 정식적인 행정동으로 출범하였다. 관교동은 고려시대 인천부의 중심지의 소재지였기에 '읍내'로 통용되었다.

 

근세에 와서 '읍내''승기부락'으로 구분되고 19038월에 읍내리, 동총승기리가 되었고 1906년 읍내리는 '관청리', '향교리', 승기리는 '대승기리', '소승기리'로 각각 분할되었다.

 

191431일 부천군 설치 후, 동년 41일에 문학면 관할로 되고 19141120일에 관청리와 향교리가 통합되어 관교리가 되고 대승기리와 소승기리가 통합되어 승기리가 되었다.

 

읍내 관청리는 관청이 있는 소재지를 뜻하고 향교리는 향교가 있으므로 이름하였고, 관교란 관청과 향교가 있음을 뜻한다. 승기란 옛날 고개에 사람이 살다가 폐동이 되었다가 다시 마을 기지가 이어져서 승기라 불리었다고 전한다. 원정은 원부 소재지를 뜻하고 광복 직후 1946'관교동'으로 개칭했다.

 

관교동에는 인천종합터미널이 있어 전국 각지로 왕래하는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또한 주변에 대형백화점들과 농수산물도매시장 등의 대형시설들이 모여있어 인천광역시민은 물론 전국 각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중요한 곳으로 발전하고 있다

 

향교마을

문학초등학교를 나와 왼쪽으로 500m쯤 가면 조선시대 유학생들이 공부하던 인천 향교가 국난과 민족 수난을 같이 하면서 5차례나 다시 지은 끝에 약 550년 전의 옛모습을 보여주듯 의연히 자리잡고 있다. 이 향교 주변 마을을 향교마을 이라고 한다.

 

인천향교는 인천광역시 지정문화재의 건조물 1호이다. 사적자료가 분명치 않아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역사가들은 최항의중수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세조가 임금이던 기간(1445-1468)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향교는 공자 이하 유현(유교에 정통하고 행적이 바른 사람)의 제사를 지내는 문묘와 학생들을 모아 강습하는 학교가 같이 있으며, 그 기능에 따라서 필요한 건물들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승기촌

'승기'란 옛날 이곳의 고개에 사람이 살다가 떠나가서 마을이 없어졌다가 다시 마을기지가 되어 승기라 불렸다고 전한다. 이곳의 하천을 승기천이라 불렀고, 하천 옆의 마을을 승기촌이라 불렀다.동쪽에 뚝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무지내고개

관교동에서 주안 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물이 연못은 물론이고 샘물 및 개울이 전혀 없는 고개로 못과 내가 없다는 뜻을 붙혀 '무지내고개'라고 불렸다.

 

승기천

관교동 승기리 북동쪽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승기리 서쪽에는 높이 55cm의 승기산이 솟아 있다. 승기천의 발원지는 용현동(독정고개 남서쪽 해발 60고지 동쪽계곡)이며 그 길이는 12km 정도이다.

 

옛날에는 논현동을 거처 황해로 흘러들었지만 현재는 수로를 바꾸고 직강고사를 하여 동춘동 동막부락 동쪽에 인공담수호를 조성 승기천 물을 일단 저장하였다가 배수 갑문을 통해 바다로 유칠시키고 있다.

 

바다로 유출되는 배수 갑문 지점은 남동구 고잔 동쪽이다. 인천의 3대 강을 꼽는다면 '굴포천''사천'(뱀내), 그리고 '승기천'을 들 수 있다. 이 세 하천 중에서 굴포천과 사천은 다른 시군에 걸쳐 있는 강이고 순수하게 인천광역시내를 흐르고 있는 강은 승기천 한 곳 뿐이다.

 

 

문학동

인천이 미추홀이라 불렸을 때는 삼국의 건국 초기이며 고주몽의 아들 비류가 미추홀을 건국하고 도읍지로 정한 곳이 문학산 주변의 어느 곳이라는 사료가 있다.

 

이는 현 문학동이 인천의 발생지임을 보여주는 자료로 지역 주민으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게 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인천의 명칭 변경이 거듭되었으나 조선말까지 인천 도호부의 지위는 지속되었는데, 그 도호부 청사가 바로 현 문학동에 있고 600여년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분학동은 문화유적의 고도이다.

 

문학동은 옛날 '성촌', '남산'으로 불리다 19038월에는 '서촌산성리', '남산리'로 구분되었다. 그러다 1906'산성리', '학산리'로 개칭되고 1914' 문학리'로 개칭되었다. 일제시대 문학정으로 다시 개정되었다가 광복 직후에 문학동으로 개정되었다.

 

문학이란 이름은 문학산에서 유래되었는데 문학산의 옛 이름은 '남산'이 었으나 학날개 형상을 닮았다 하여 '학산'이라고 불려졌다. 이 학산 북쪽에는 향교에 딸린 '문묘'가 있어서 문학이란 이름이 붙여져 문학으로 불려졌다.

 

문학동은 옛 인천의 부읍 소재지로서 인천의 뿌리가 서려있는 곳이다. 지석묘가 발견된(1927)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어떤 부족이 정착하여 온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곳 문학산은 미추홀 왕국이 건국되었다는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특히 고려조의 7대어향으로 일찍이 인주로 승격되어 발전하기도 했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감리서가 생겨나 부치를 내리로 옮겨감에 따라 급격히 쇠퇴하였다. 문학동은 인천의 옛 읍으로 1914년 부천군 문학면으로 통폐합되었다가 1936년 인천부로 확장될 때 다시 인천으로 편입된 후 1996년 문학동과 관교동이 분동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산성말

문학산성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인천향교 앞 마주보이는 산이 문학산인데 속칭 '배꼽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은 이미 기원전부터 우리의 역사 속에 등장한다.

 

여지도서인천도호부 고적조에는 문학산성을 비류 백제의 옛 도읍지라고 하였고, 안정복은동사강목에서 문학산성에 비류성의 터가 있고 성문의 비판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성내에는 비류정이 있다고 적고 있다. 문학산성은 안,밖 이중으로 된 성으로, 외성은 주위가 약 200m이고 내성은 토성으로 약 100m가 되는데 자연적으로 험난한 것을 이용해 쌓은 것이므로 성벽의 높이가 5m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내 정상에는 흙으로 쌓아 올린 봉화대가 있었다고 한다. 비교적 최근의 기록인전국유적목록에는 '문학산성, 돌로된 성, 미군지가'라고 적어 1959년 이후에 산위의 고적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여지도서,동사강목등 고서에 전하고 있듯, 문학산성이 비류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문학산은 인천의 주산일 뿐 아니라 삼국시대 이래로 인천에 대한 산성의 역할을 담당하여 온 것만은 사실이다.

 

멀리는 비류가 도읍했던 곳이요, 임진왜란 때는 인천부사 김민선이 낡은 성을 다시 쌓고 백성을 거느리고 여러번 왜병을 무찔렀던 요새이며, 조선말 이양선의 내침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국방의 제1선으로 나라를 지키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58년에 동문을개수한 이래 문학산성 복원에 대한 의견조차 제기되고 있지 않아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양성말

문학산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양지바른 곳에 위치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마릉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마을이다.

 

수천현

수천현(水天峴)이란 이름 그대로 비가 오지 않아서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 하늘에다 비를 내려 달라고 기우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는 고개를 말한다.

 

 

학익동

학익동이란 앞산이 '학이 날개를 펼친 형상'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이곳에 지석묘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어떤 부족의 무리가 정착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부여시대에도 문학산 기슭에 '강자골'이란 부락이 있었으며 백제시대에도 어떤 부족이 햇골부락에 정착하였다. <햇골>이란 조개의 산지를 뜻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이 해변에 가까웠던 곳을 추정된다.

 

조선시대 숙종 10년에는 부평 이씨 문중이 낙향하여 강자골 옆에 정착, 부락을 형성하였으며 그 문중에 제운선생이란 분이 있어 그 분의 덕망을 기리는 뜻에서 제운리라 불리게 되었다.

 

학익동은 옛날에는 읍내에 속한 부락이다. 1903년 학익동으로 개칭하여 사용해 오다 1936년 인천부에 편입되었고 광복 직후에 학익동으로 개칭되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많은 공장들이 들어선 오늘날의 학익동은 인천 화학공업 발전 표상의 역할을 해왔으며 최근에는 ITV (인천텔레비전방송국)이 개국하여 인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러한 반면에 심각한 공해문제가 논란거리가 되어 주거환경을 위협하는 관계로 화학공장들을 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제운말

문학산 밑의 마을인데 이곳 출신으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던 유명한 학자부평 이씨 출씬의 제운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마을 이름이다.

 

학익마을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지은 마을 이름으로서 학익동이라는 동명의 시초가 된 마을 이름이다.

 

검동말

옛날 글공부를 하던 글방이 있었던 마을 이름으로서 글씨를 쓸 때 사용하던 검은 먹과 붓을 상징해서 지은 마을 이름이다.

 

노적산말

문학산이 주봉이며 서쪽으로 청학사란 절이 있는 연경산이 있고 이 연경산 서쪽의 봉우리를 노적봉이라고 보른다.

 

지금은 폐쇄되었지만 과거 수인선 협괘열차의 종착역이었던 송도역사의 뒷산으로서 ' 이 봉우리의 형상이 마치 노적가리를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봉우리 아래의 마을을 <노적산말>이라고 불렀다.

 

강자골

현재는 흩어지고 없지만 문학산 골짜기 마을로서 옛날 진양 강씨가 살았다고 한다. 고대 성씨로서 강씨가 살았다는 골짜기 마을을 그 성씨를 따 '강자골'이라고 불렀다.

 

햇골

지금의 옥련동 송도고등학교 입구에서 동양화학으로 넘어가는 대로의 오른쪽 산등성이 마을이 햇골말이다. 이 마을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지만 횃집이 많이 들어서 있다.

 

갯벌이 매립되기 전에는 조개를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백제시대부터 어떤 부족이 살아왔던 마을로 <햇골>이란 조개산지를 뜻하므로 일명 '조개골'이라고 하며 이 지역이 매립되기 전에는 해변에 가까웠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용현동

용현이란 옛 용정리 앞바다에서 장마 때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인 비룡리와 독정리가 합해져서 '용정리'라고 불리다 1947년 용현동으로 개칭되었다.

 

용현동은 원래 다소면 소속의 동명이 <비랑>이라 불리웠는데 19038월 인천부 관내 동리명을 지을 때 '독정리', '비랑리'로 구분되다. 19065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개정할때 '독정리', '비룡리'로 개칭되고 그 후 194611일 광복 직후 용현동이라 개칭하였다.

 

독정리에 세워진 인하대학교

옛 부터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독정리 마을에는 인하대학교가 우뚝 서있다.

 

이곳 에는 1903년부터 3년간 인천항을 떠나 하와이로 이주한 72백여 명의 조선 사람들이 이주 50주년을 기념해 세운 대학교이다. 인하는 바로 '인천''하와이'의 첫 머리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인천을 떠난 화와이 교민들이 끝내 고국을 잊지 못하고 모은 기금을 바탕으로 세워진 뜻깊은 학교인 것이다. 1954년 공과대학을 시작으로 1970년대 우리 나라 경제 성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일하러 갔던 교포들의 기금으로 세워 인천 최초의 4년제 종합대학교가 된 인하대학교는 미래의 우리나라를 이끌고 갈 많은 젊은 청년들이 모여 열심히 공부하는 인천 교육의 요람이기도 하다.

 

비룡이말

'비랭이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비랭이', '비랑이', '비룡이' 등으로 불렸으며 '앞바다에서 장마 때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비룡이말 역시, 이름 그대로 용이 승천했다는 마을 이름이다.

 

독정리

비랭이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독쟁이'로도 불리는 마을 이름으로서, 독정리란 이 마을에 글 공부를 하던 서당이 있어 '책 읽는 소리'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다.

 

성촌말

이 마을에는 창령 성씨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씨족마을 이름이다.옛날에는 많이 살아서 대성이었으나 지금은 분산되어 찾아보기 힘들다.

 

약물터말

용이 날아 올랐다는 비룡말 즉 비랭이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샘물에서 나오는 물의 효능이 대단해서 병을 고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 약물이 나오는 마을의 이름이 '약물터마을'이다.

 

여우고개

지금은 없어졌지만 사람이 드문드문 살았던 옛날 학익동에는 여우가 살고 있었던 고개가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문학산과 연결된 제법 인적이 드문 고개였던 것으로 추측 되어진다.

 

 

주안동

주안동은 19038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확정할 때 '충훈부리' '사미리'로 불리우다가 1906'충훈리' 사미리'로 개정하고, 191431일 부천군이 신설되고 동년 41일 주안면과 다소면을 통합해서 다주면이 된 후 19741120'충훈리', '사미리'를 통합해서 '사충리'가 되었다.

 

1936101일 사충리가 인천부에 편입된 직후 간석동의 일부와 관교동의 일부가 편입되고 '주안정'이라 개칭하였다. 광복직 후 동명을 주안동이라 개칭하였으며 195019일 동명 분할로 주안 12동으로 구분되었다.

 

충훈이란 마을은 조선시대 정부기구인 '충훈부의 방죽'이 있었기 때문에 불렸고, 사미리란 '아름다운 선비'라는 뜻인데 구한 말 이조판서 '이헌경'의 출신 마을을 뜻한다. 사충은 사미리와 충훈리를 합한 이름이다.

주안의 석바위 뒷산에 주안산이 있다. 이 산은 흙 색이 붉고 산 형태가 '기러기가 내려앉는 것 같다'해서 주안산인데, 지금의 간석동, 구월동의 옛 산이름을 따서 지은 면명이다.

 

주안동은 지난 수십년간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각종 관청과 금융기관의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주안수출공단'과 함께 인천의 산업, 금융, 행정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으며 지금은 시청과 주요 시설들이 구월동과 관교동에 많이 건설되어 주도권이 이전됬으나 앞으로 문학터널이 관통되면 송도 해상 미디어밸리와 연결되어 인천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충훈말

충부 또는 충훈동이라고 불렀던 주안동의 마을 이름으로서 조선조 정부 기구인 충훈부 토지가 있어서 '충훈부', '충훈리' 등으로 불렸던 마을이다. 경인선의 주안역을 '충훈부 정거장'이라고도 불렀다.

석바위말

석바위, 석암, 석촌, 석암동으로 바위 이름을 딴 마을 이름이 많이 있는데, 마을에 커다란 돌바위가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 이다.

 

사미(士美)

아름다운 선비가 나온 마을로서 이조판서 '이헌경'이 출생한 마을이란 뜻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충훈동, 소뎅이, 독점, 석바위, 상나무배기, 서낭뎅이, 사거리, 못머리, 사미, 고인돌, 솔안말, 잿말, 다수골, 양지께를 병합하여 사미와 충훈의 이름을 따서 사충리라 하여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됬다가 왜식으로 '주안정'로 불리다가 1947년 주안동으로 고쳐졌다 .

 

주안지석묘

주안지석묘는 주안 도자기 공장 서편에 있던 언덕 즉, 주안 '사미''너분바위'에 여러 오래된 지석묘가 흩어져 있었다. 1957년 인천박물관에서는 이 지석묘를 발굴 조사했튼데 부장품은 발굴하지 못해 1979년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조성되면서 그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그 중 1기만이 수봉공원 반공회관 언덕길 옆에 옮겨져 있다.

 

송내말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서, 송림이 마을 주위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고인돌말

고인돌이 있어 마을 이름을 '고인돌마을'이라 불렀는데 1979년 고인돌을 수봉공원 반공회관 언덕길 옆으로 옮겼다.

 

 

도화동

도화동은 다소면 베말, 일명 쑥골, 도마다리라 불리우다가 1903년 동리명 확정 때 '화동', '도마교리'였던 것을 1914'도화리'로 개칭되었으며, 194611일 광복 직후 도화동으로 개칭되었다. '화동(禾洞)'이란 '벼마을'을 뜻하며 일명 '쑥골'이라 불렸고, 도마교리란 경인도로가 개설될 때 '말이 지나 다니는 다리마을'이라는 뜻이고, 도화리란 도마교리의 ''자와 화동이란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못머리말

'연못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수봉산을 둘러싸고 있는 도화동은 우물이 많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봉산이란 뜻 역시 물에 둘러싸여 있는 산이란 뜻이다. 옛날 수봉산 주위의 도화동에는 논이 많이 있었는데 우물의 풍부한 물을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다. 이곳의 옛 이름 역시 다소면인데, 이 역시 우물이 많은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도마다리말

도화동은 원래 다소면 베말, 일명 쑥골이라고 불리우다가 경인도로가 개설될 때 말이 지나다니는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도마다리말'이라고 했다. 이 도마다리말이 도화동의 뿌리가 된 것이다.

 

신계동

6.25전쟁은 인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 인천상륙작전 등의 사건도 많았지만 북한이 가까운 관계로 인천항과 가까운 황해도에서 배를 타고 피난민이 많이 내려왔다.

 

이 갈곳이 없었던 6.25 피난민들이 비교적 북녘의 고향과 가까운 인천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중 '신계동'이 피난민들의 집단 거주지로 새로운 마을을 개척한 대표적인 마을이다. 예전엔 '시비골'이라고도 불렀다.

 

수봉산

옛 날, 수봉산은 북구의 계양산과 같이 바다에서 떠내려와 이곳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러한 연유로 원래 산이름은 <봉산>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현재의 한자 명칭 <봉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옛날 이 산의 주위가 바다나 바닷가였기 때문에 생긴 전설이었을 것이다. 수봉산은 주안산의 한 줄기로서 산줄기 외에는 3면이 평지로 옛날에는 바닷물이 그 주위를 넘나들어 물속에 있는 것같이 보였을 것이다.

 

해발 104m의 아담한 구릉인 수봉산은 옛날 다소면 관할이었는데, '다소'란 다수(多水)가 변한 말로 이 지역에 물 웅덩이가 많아 농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 수봉산 기슭에는 <다랭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는 다남(多男)의 뜻으로 이 산의 정기가 좋아서 남자가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1972, 자유공원 서쪽 구석에 초라하게세워진 인천출신 전몰장병의 영령을 기리는 현충탑이 이전 건립지를 물색하던 중, 당시 안동 권씨의 문중산이던 수봉산의 정상부 약 5만평을 시에서 매입하여 현재의 웅장한 현충탑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너분바위'라 불렀던 주안 지석묘는 주안동 집근처에 여러개 흩어져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옮긴 것이다.

 

수봉산에는 수봉암과 청룡사, 연화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인천 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인 '우강정', 어린이 놀이터, 임간 산책로와 시민 운동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숭의동

숭의동은 원래 다소면 소속의 '장사래 마을'이었다. 1903'장천리'라 개칭하였고 1906'여의리', '장천리', '독각리' 등으로 구분되었다.

 

그 때 독각리의 일부가 '도산리'로 변경되었다가, 그 후 1914년 동리명 개정 때, 전기 3개리를 통합해 '장의리'가 되었다가 1936101일에는 장의리가 인천부로 편입되고 194611일에는 숭의동으로 개칭하였다. 1950년 숭의 1,2,3,4동으로 분할되었다.

 

'장사래'는 이 마을 하천이 길고 꾸불꾸불 뱀과 같아서 장사천을 뜻하고, '장천리''긴 내 마을'이라는 뜻이다. '여의리'란 이 마을을 속청 '여의실'이라고도 하는데 '이 절집에 가서 소원을 빌면 뜻대로 된다'는 뜻이다.

 

'독각'이란 '쪽다리'란 뜻이고 '장의리'란 장사리의 ''자와 여의리의 ''자를 따서 지은 이름 이다. 일제때 정정 '대화정'이란 일본의 옛 나라 이름을 따 지은 이름이고 '숭의''옛날 뜻을 이르고져 신령을 숭상하는 뜻'을 이루는 의()자를 바꾸어 쓴 것이라 한다.

 

숭의동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된 경인철도의 '제물포역'이 있으며 외국에는 최초로 개항된 항구인 '제물포항구'가 있어 우리나라 근대사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맡아왔던 역사적인 고장이기도 하다.

 

장사래말

숭의동의 원래 이름으로서 다소면 소속의 '장사래' 마을이었다. 긴 하천이 있다고 하여 '장천리'라고도 하였다. 이 마을의 하천이 '길고 꾸불꾸불한 형상이 뱀과 같다'고 하여 '장사천'이라고 한데서 '장사래'란 마을 이름이 불렸다. 그러므로 '장사래 마을'이란 '뱀처럼 꾸불꾸불한 긴 내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장의리말

뱀처럼 꾸불꾸불한 긴 내가 있다는 장사래 마을과 속칭 여의실이란 절집에 가서 소원을 빌면 자기 뜻을 이루게 된다는 여실말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마을 즉, 장사리와 여의리를 합친 이름이다.

 

독각다리말

독각이란 '쪽다리'란 뜻인데, 독으로 기둥을 세워서 다리를 만든 다리를 말한다. 이 독각다리 곧 '쪽다리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어진 마을 이름이 '독각다리말'이다.

 

능안말

인천에서 살고 있었던 주민들은 인천이 고려시대에 7대 어항으로 불리었던 전성기 였을 때, 권세를 누려 고려시대에 인천에 조상을 모시려는 가문들이 많았다. 고려시대의 '능이 있었던 마을'이란 뜻으로 '능안말'이란 마을명이 생겼다.

 

용동고개

제물포 중앙에 한 언덕이 있다. '언덕 형태가 용과 같다'해서 '용동'이라 부르며 그 언덕을 용동고개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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