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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연수구의 지명유래

by 형과니 2023. 3. 22.

연수구의 지명유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17:33

 

연수구의 지명유래

 

연수구 지역은 1413(태종 13), 전국 74개 도호부 중의 하나인 인천도호부관할 구역으로, 먼우금면(한자 표기대로 읽으면, 원우이면의 옹암리, 먹암리, 망해리, 동막리, 척전리, 한지리, 함박리, 야동, 옥동 지역으로, 먼우금면은 먼우금(먼우금으로 산맥이 길게 뻗어 휘어져(옥이져) 있다는 설), 먼오금(바다가 멀리까지 육지쪽으로 오그라들었다는 데에서 유래됐다는 설), 원호금,또는 원우금이라고도 불려졌다.

 

연수구의 명칭은 남구, 남동구와 접해있는 연수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연수란 글자 그대로 '목숨이 연장된다.'는 뜻이며, 조선시대의 함박리, 망해리 지역을 일제시대 때 일본식 지명으로 바꾸면서 생긴 이름이다. 그러므로 연수구는 이전의 이름이나 역사에 관계없이 만든 이름이다.

 

연수구는 인천광역시 남쪽에 돌출한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는 선학동, 연수동, 동춘동 지역이 승기천을 경계로 남동구와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옥련동, 청학동, 연수동, 선학동 지역이 문학산, 연경산을 경계로 남구와 접해있다.

 

구의 명칭에서 볼수 있듯이 문학산 남쪽에 있어 따뜻하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문학산, 청량산 주변의 비류국, 백제 관련 문화 흔적들과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중국과의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했던 능허대 한나루의 존재 등 연수구가 역사적으로도 가치있는 지역임을 말해주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부터 불어닥친 대규모 택지 개발사업으로 아파트촌으로 변한 연수구는 1994년부터 아암도 주변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를 매립해서 건설 중인 '송도 해상 신도시'가 완공되는 2006년에는 미디어밸리 단지 운영으로 최첨단 국제도시의 면모를 보일 것이며, 대규모의 인구 유입이 예상된다.

 

 

 

선학동

선학동은 본래 인천부 구읍면 지역으로 '도재' 또는 '도장'(도쟁이, 도정)이라 했다. 1914년 무지물, 늑각부리를 병합하여 '도장리'라하고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켰다 다시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무학정이라 하였으며, 1946년 선학동이 개칭되었다.

 

무학정이라 불릴 당시 '무학'이란 '문학산이 학이 춤을 춘다'는 뜻이고, '선학'이란 이 마을 뒷산인 문학산 줄기를 신선이 놀았다는 선유봉이라 불러, 선유봉에서 선자와 문학산에서 학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옛날 이곳은 경주 최씨와 부평 이씨의 세거지지로서 이 두 씨족에 얽힌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작은도장, 큰도장, 간도장, 장도장 등이 있는 순수한 농촌 지역이었으며, 염전이나 바다와 이어져 있어 곳곳에 방죽을 쌓아 두었다.

 

인천읍지 동리조에 보면 도장을 한자로 도장(道章)이라 썼는데, 도장이란 도장(到葬)을 뜻하는 것으로 묘를 항렬 순서대로 쓰지 않고 벼슬을 기준으로 해서 아들의 묘가 위에 있다는 뜻이다.

 

큰도장(큰도쟁이)

선학동에는 큰도장, 작은도장, 장도장, 간도장 등의 여러 도장이 있는데, 이는 선학동에 사는 부평 이씨들이 선조의 산소를 벼슬 순서대로 만들었다는 데에서 유래되는 말이다. 이들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인 큰도장은 여러 뜸이 모여 이루어진 마을로 현재는 금호.아주.뉴서울 아파트가 들어선 대규모 주택단지로 변모했다.

 

능안말

큰도장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지금은 선학중학교, 선학시영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의 앞에는 이허겸의 묘가 있는데, 이 묘를 능에 비기어 그 안에 있는 마을 이라는 뜻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길마산

문학산 정상에서 산줄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보다 보면 신선들이 놀았다는 선유봉 옆의 선학동 뒤편(큰도장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 산의 형태가 '말안장인 길마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산 아래에는 길마사가 있었던 길마시지가 있다.

 

옥련동

옥련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의 옥동, 한진리(현재 송도역 부근), 옹암리(현재 유원지 입구 부근) 지역으로, 19065월 인천부 서면 소속의 서면 5리로 개칭하였고, 1914년 부천군 신설로 그 영역이 됐다. 동년에 먼우금, 한나루, 독바위, 송도를 병합하여 옥련리라 해서 신설된 문학면에 편입 시켰다가, 광복 후 동명 개정으로 1946년 옥련동이 되었다.

 

옥련동 이름의 유래는 청량산 밑에 '백옥같은 돌이 많다'하여, 옥골 또는 옥동, 옥련동이라 하였다고 하는 설과 옥앞에 있는 연못을 뜻한다는 설이 있으며, 이곳에서 학익동 쪽으로 넘어가는 길 주변은 예전에 동죽, 백합, 가무락 등 조개류가 많이 나서(또는 조개잡이 가는 길이어서) 조갯골로도 불렸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홍어회집들이 늘어서 있다.

 

옥련동은 옛날부터 중국과 교류를 하던 능허대가 있고 풍부한 수산물을 얻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송도 유원지가 있어 일제시대 때부터 유명 했는데 송도 유원지 앞 바다를 매립하여 원목야적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갯벌이 없어져 최근까지도 이곳에서 풍부한 어류 패류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1천여명의 어민들 생활 터전이 없어졌음은 물론, 심각한 해상 오염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한편 인천 상륙작전 기념관, 인천시립박물관 등이 있어 연중 관람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나루

한나루는 능허대 밑에 있는 배를 타던 곳으로, '대진'이라고 불렀다. 옛날의 지형은 능허대에서 송도역(송도파출소)쪽으로 바다물이 접해있어 하나의 조그만 포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 포구를 '한나루'라 불렀다 한다.

 

송도

청량산을 배경으로 서해의 푸른 바닷가에 위치한 송도는 원래부터 유원지로 개발한 곳이라 한다. 지금은 매립되어 '송도해상신도시'의 시작점이 된 아암도의 경치는 일품이었으며, 해수욕장 수문이 있는 곳이 큰 능허대였다고 한다. '송도'라는 이름은 이 곳이 '마치 섬과 같이 생기고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연수동

연수동은 이곳이 문학산 남쪽에 위치하여 따뜻하며 해안의 공기가 좋아 건강에 좋은 곳이란 뜻에서 생긴 동명으로, 문학산 동남쪽에 자리잡은 '머그미마을'을 근거지로 하여 생겼다고 한다. 연수(延壽)란 글자 그대로 '목숨이 연장된다.'는 의미이며, 조선시대의함박리, 망해리 지역을 일제시대 때 일본식 지명으로 바꾸면서 생긴 이름으로서 이전의 이름이나 역사에 관계없이 만든 지명이다.

 

인천에는 만수동, 장수동, 연수동과 같이 '()'자가 든 마을이 이웃하여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인천에는 100세된 노인이 많다.'고 적힌 것으로 보아, 지명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연수 3동에 있는 배수지 공원 밑에는 최근까지 적십자가 인천결핵요양원이 있었다. 그것을 보아 이 일대가 공기가 맑고 요양하기 좋은곳이라는 것을 나탸낸다.

 

부수지

부수지의 현재 위치는 연수 2동에 있는 시영아파트와 그 옆의 근린공원 일대로 부수지에서 동북간 까치섬에 이허겸의 묘가 있는데 풍수설에 이 묘자리의 형국이 '연화부수형이라 했다. 여기에서 '부수'라는 글자를 따서 '부수지'라 불렀다 한다.

 

마리

현재 연수14단지 서쪽 일부 지역을 '마리'라고 불렀으며 동남쪽으로 '바다가 보인다'하여 망해리라 했고, 조선시대 말기에도 망해리로 불렸다.

 

이 곳에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옛날 이곳은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고 동네 가축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산신령의 노여움 때문이라 생각하고 큰 감나무 밑에 상돌을 놓고 산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해마다 감나무에는 많은 감이 주렁주렁 열렸지만 열린 감 중에 한개라도 사람이 먹으면 죽어버린다고 하여 감을 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석공이 제를 지내는 것은 미신이라 하여 상돌을 깨뜨려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석공의 아내는 바다로 조개를 캐러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딸은 비가 많이 오는 날 고개를 넘다가 불어난 물에 휩쓸려 죽었으며, 석공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한다.

지금 이곳은 택지개발로 인하여 주택단지로 변해 있으나 지금까지도 매년 음력 415일이면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산쪽에서 매년 산제를 지내고 있다.

 

구레메기(두루메기)

연수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풍수설에 의하면 길마산 동북향의 지형이 마치 '말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갈마음수혈'이라 했다. 이와 관련지어 생각하면 말이 물을 못 먹어 힘이 빠져 굴레를 벗어버리고 이 고개를 넘어왔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말이 구레메기라 한다.

 

또한 학의 순수 우리말이 두루미인데, 문학산의 아래쪽에 있어 학이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두루메기'라고도 불렀다 한다.

청학동

청학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의 산뒷마을이며, 산뒷마을은 이곳이 문학산의 뒷편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1903년 인천부가 동리명 확정 때, 산후리라 하였고 그 후 1906년 면명을 개정할 때 먼우금면을 서면으로 개칭하고 이 지역은 서면 2리라 개정하였다.

 

일제시대인 1914,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청릉, 뒷골, 안골, 옥터를 병합하여 '청학리'라하여 신설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되었는데, 청학이란 이름은 청릉마을의 ''()자와 문학산의 ''()자를 따서 일본인 마음대로 지은 이름으로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의 하나로 여겨진다.

 

19402차 행정구역 조정 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청학정이라 하다가, 광복이 되어 1946년 부터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청학동이 되었다.

 

청릉마을

뉴코아 백화점 건너편에 있는 서해아파트 주변의 마을로 청량산 동북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청릉마을은 옛날에 능이 있었다고 하며, 마을 뒷편 청량산에는 청릉고개가 있고 청릉마을 뒤로 있는 골짜기 주변에는 뒷골이 있었다.

 

물푸렛골

청량산에 있는 병풍바위 아랫쪽에있는 마을로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의 뒷산에는 높이 10미터 가량의 낙엽 교목인 물푸레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이 마을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동춘동

동춘동은 옛날 먼우금면 소속의 자앞마을과 동막마을로 1903'척전리', '동막리'라 하였다 19065월 먼우금면을 서면으로 고치고 척전리를 서면 3, 동막리는 척전 4리로 개칭하였다.

 

1914년 부천군이 신설되어 그 영역이 되고 동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신설된 문학면에 편입시켰다 다시 동년 1120일에 척전 3, 4리를 통합하여 동춘리라 하였다. 1940년 인천부에 편입에 따라 일본식으로 동춘정이라 하다가 광복 후 1946년 동춘동이 되었다.

 

'자앞마을'이란 '네모 모양 자의 앞모양과 같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고, 동춘동 뒤쪽에 있는 청량산의 또 다른 이름이 척량산이라고도 하는데, 척량은 풍수지리설에서 '금으로 땅을 재는 형국' , 금척량지형의 준말이며, 그 앞에 있는 동네라 해서 자앞마을이 됐다고 한다.

 

동막이란 동쪽에 군대가 막을 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동춘동은 본래 지역적으로 청량산 동쪽이 되므로 동촌이라 해야하나, 삼촌이 삼춘으로도 불려지듯 동촌이 동춘으로 변한것이라 여겨진다. 혹자는 이 일대가 연일 정씨의 세거지지로서 연일 정씨 중 명인의 호가 동춘이라서 동춘이 되었다고도 하나 연일 정씨 집안에 그런 사람이 없다하니, 동운의 유래는 전자에서 찾음이 옳을 것이다.

 

또 다른 지명 유래로는 동은 동막을 뜻하고 춘은 봄의 꽃을 의미해서 동춘이라 불리었다는데, 이는 이곳이 연일 정씨 문중에서 60여명의 벼슬아치가 나와 참신한 '봄의 꽃'을 비유해 지은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동막

동춘동을 이룬 동네의 하나로 현재 동막초등학교 주변 마을들을 말하며, 연일 정씨 세거지지이다. 여기의 지형은 선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으로 옥년탄금형이어서 여기에 산소를 모신 연일 정씨가 등양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동쪽에 군대가 막을 치고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돈막'이라고도 불렸다는데, 이는 '돈이 많이 생기는 고장'이라는 뜻으로 동막의 별칭이다.

 

신촌(새말)

동춘 1동 봉재산 남서쪽 아래, 시듬골과 같이 구석마을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해안가 마을 이었으나 지금은 마을 앞쪽이 매립되어 해안도로가 지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자연 부락 지명에는 새터, 새말, 신촌, 신기촌 등의 지명이 많은데 이는 주변 마을보다 비교적 나중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와, 마을과 마을 사이의 마을이라는 의미의두 가지가 있다.

 

이 곳은 위치상으로 볼 때, 신촌이라는 말보다는 사이에 있는 마을 이라는 새터가 더 맞는 표현이라 생각되나, 일제시대 때 지명을 일본식으로 고치면서 간촌인 새터가 신촌인 새터로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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