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지명유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19:08
서구의 지명유래
서구는 삼국 시대에 '주부토'라 불리면서 백제국에 속했는데,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고구려에 속하게 된다. (475년). 서구는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신라에 영속된다.
'주부토'라는 이름은 원래 부평 평야가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습지로 황무지였다. 그래서 주민들이 봇둑을 쌓았는데 그 '봇둑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고 하여 '줄보뚝'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줄보뚝이 한자로 '圭夫吐'가 된 것이다.
757년 이 지역을 장제군으로 지명을 바꾸는데, '장제'라는 말도 '긴 뚝'을 뜻하며, 고려 태조 때는 장제군을 '수주'로 이름이 바뀌어진다. 이 때 서구는 수주 관할의 황어현에 일시 속하다가 부평현과 황어현이 통압되면서 비로소 부평현에 속해진다.
1150년 고려 의종은 수주를 없애고 한강을 낀 계양산이 수도 방위에 중요한 위치라고 생각하고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안남도호부'를 설치한다. 그 후 1215년 '계양도호부'로 개칭하고 1308년에는 '길주목'으로 승격된다.
구한말(1895년) 서구는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으로 구분되는데, 그 경계는 승학현(싱아고개)으로 모월곶면은 지금의 심곡동 이북이며, 석곶면은 가좌동 이남이다. '모월곶'이란 땅 모양이 마치 반달같이 생겼는데 작은 맥이 터럭(모발)과 같이 뻗어 내려서 '터럭이 많은 반달과 같은 곳'이라는 뜻이다. '석곶'이란 돌(石), 곶(串)이며 '땅 모양이 길게 뻗어 있고 돌이 많다.'고 '돌곶이'라 불렀다.
▶ 검안동
검안동은 한말에 부평군 모월곶면 검안리로 모월곶면의 소재지이며, 흔히 '검바위'로 불려지고 있다. 1914년 부천군 서곶면 검안리로 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과생정이라 불렸고 1946년 검안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55년 백석, 시천, 검안동으로 통합되었고, 1968년 인천시 북구에 속하게 되나 1988년 이후 서구로 분구되어 인천광역시 서구 검안동이 되었다.
검안동에는 백석동과 시천동을 법정동으로 포함하고 있다. 검안동을 옛날 '검바위'라 부른 것은 이곳 주산인 허암산 서쪽 기슭에 큰 검은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검바위 마을은 부평군 모월곶면의 면소재지로 면내 가장 큰 마을이었으며 조선조 연산군 때, 허암 정의향이 은둔했던 곳이라서 '허암산' 또는 '허암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곳에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토성이 있고, 그 북쪽 기슭에는 지석묘가 발견되고 있다. 검바위는 해주 정씨들이 많이 모여 산다.
▶ 백석동
백석동을 '한둘'이라 불러왔는데 이는 '흰돌'이 변한 것으로 마을 뒷산에 코끼리 모양의 상산에는 흰돌이 많아 생긴 마을 이름이다. 백석동은 구한말 부평군 모월곶면 백석리였는데, 1914년 부천군 서곶면 백석리로, 1940년 인천부 운양정이 되었다가 1946년 백석동이 됐다.
1955년 검안동에 병합되고 1988년 이후 서구 백석동이 되었으며 현재 행정동은 서구 검안동이고 법정동은 서구 백석동이다.
이 마을은 조선 선조 때 부평부사를 지내고 훗날 우의정을 역임한 심수경(풍산 심씨)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 앞 한둘 방죽은 개결수(큰 배수로 수문 공사)를 못 막아 농경화를 못했는데, 구한말 권실 친일파 송병준이 방죽 매립에 성공하였다. 또한 백석동을 '한들'이라고도 부르는데, '큰 들'을 뜻한다.
▶ 시천동
시천동은 '시시내'라 불러 왔는데 이는 계양산 북맥 성황댕이를 경계로 '시냇물이 시작된 곳'이라서 생긴 이름이다. 원래 깊숙한 골짜기 벌판이었는데, 봇둑을 쌓아 논을 만드니 갯골이 시내가 되어 냇물이 비로소 시작된 곳이라 '시시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한강 서쪽의 요충지였으나, 지금은 가장 벽촌이다. 시천동은 한말에 부평군 모월곶면 시천리였다. 1914년 부천군 서곶면 시천리로 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 춘일정으로 되었다. 1946년 시천동이 되었다.
그 후 1955년 검안동에 병합되고 1988년 이후 서구 시천동이 되고 현재 행정동은 검안동이고 법정동은 시천동이다. 이 마을은 조선 중기 대사간 류태동을 비롯하여 심남 류희진, 검여 류희장 등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현재도 진주 류씨들이 많이 산다.
이 시시내에는 수령 200년 되는 산수유나무가 시천동 56번지에 있는데, 인천에서는 볼수 없는 희귀종으로 보후수로 지정되었다.
▶ 경서동
경서동은 서해 바다 아늑한 마을이라서 '고잔'이라 불렀데 고잔, 침포리, 곧말, 청라도, 난지도 등 5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말기 부평군 모월곳면 고잔리였는데 1914년 부천군 서곶면 고잔리로 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당시 섬이었던 이 곳의 땅 모두가 왕가의 땅이었기 때문에 '이가정'이라는 일본식 이름이 붙여졌고, 1946년 경서동으로 바뀌었다가 1988년 이후 서구 경서동이 된다.
'경서'란 '징매이고개(경명현)서쪽 마을'이란 뜻을 담고 있다.
▶ 연희동
연희동은 신라 시대에 비단을 짜는 곳으로 유명해 동네 여자들을 뽑아 비단 짜는 기술을 가르쳤는데, 인근 마을 여자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여희 마을'이라 불렀다. '연희'는 여희의 발음이 변해서 생긴 이름으로 '연일'이라고도 했다.
원래 부평군 모월면 '연희리'였는데 1914년 서곶면과 통폐합되어 서곶면 연희리가 된 후, 연희진자리에 면사사무소가 설치된다. 1940년 인천부 정상정이 되고 1946년 연희동으로 바뀌었으며 1988년 이후 서구 연희동이 되었다.
연희동은 심곡동과 공촌동을 법정동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 연희동은 순수한 농촌 지역으로 작은 촌락들을 이루고 살았으나, 지금은 구획 정리 사업이 완료되어 구청, 소방서, 경찰서, 공무원 교육원, 전화국, 우체국 등 각종 관공서가 위치하고 있어 서구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 심곡동
심곡동의 원래 이름은 '깊은 울' 또는 '깊이 울'이다. 옛말 중 마을을 뜻하는 말로 '골', '고을'과 같은 말로 '울' 떠는 '굴'이라고도 했다. 결국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이 탁옥봉 바로 밑 깊숙한 골짜기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심곡동은 한말 부평군 모월곶면 심곡리였으나, 1914년 부천군 서곶면 심곡리로 통폐합 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 일진정이 된다. 1946년 심곡동이 된 후 1955년 공촌동과 함께 연희동에 병합되어 공촌.연희.심곡동이 되었다. 이 깊은 산골 마을이 연희지구 개발로 빌딩, 아파트군이 들어섰다.
또한 임꺽정의 은거지인 징맹이 고개가 도로 개설로 높이가 낮아지고 4차선에서 6차선으로 확장되고 있다.
▶ 공촌동
공촌동은 '고련'이라고 불려 왔는데, 이는 옛 고을이 있던 곳으로 '고현지'가 변한 것이다. 계양산 서쪽에 있는 공촌동은 한말 부평군 모월곶면 공촌리였다.
1914년 부천군 서곶면 공촌리였다가 1940년 인천부 흑전정이 되고 1946년 공촌동이 된다. 1955년 심곡동과 함께 연희동에 병합되고 1988년 이후 서구 공촌동이 된다. 헌재 행정동은 연희동이고 법정동은 공촌동이다.
▶ 가정동
가정동은 '개경주'라 불러 왔는데, 이는 조선 시대 개국 공신 숙위공 조반의 별장이 이곳에 있어 '가정'이라했는데 '가정지'가 변음되어 '개경주'라 하였다.
이 가정지는 가정동 456번지에 비 지정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가정동은 한말 부평군 석곶면 가정리였다가 1914년 부천군 서곶면 가정리가 된다. 1940년 인천부 천대전정으로 바뀌고 1946년 가정동이 되었다. 1965년 석남동에 병합되었다가 1983년 신현동과 함께 가신동으로, 1988년 서구 가신동으로 되고 1990년 신현동과 분동되어 가정동이 되었다.
현재 가정동 5거리는 근처의 공업단지와 김포, 수도권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 고속 도로가 가정동을 관통하고 있다. 고속도로 옆에는 한국 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용감하게 싸웠던 콜롬비아군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고 치열한 싸움에서 전사한 611명의 희생 용사의 넋을 추모하며 그들이 이 땅에 심은 세계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고자 하는 높은 뜻을 되새기고자 1975년 설립한 콜롬비아군 참전 기념비가 있다.
▶ 석남동
석남동은 구한말 부평군 석곶면에 속한 마을로 고잔리, 번작리 등의 작은 동네로 나뉘어 있었다. 석남동은 가정동, 신현동 등지까지 모두 속해 있던 석곶면 중에서 남쪽에 있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1914년 고잔리와 번작리를 합하여 부천군 서곶면 고작리가 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 촌상정으로 변했고 1946년 석남동이 되었다.
1963년 가정동, 신현동이 석남동에 병합되었다가 1983년 가신동(가정동과 신현동)이 분동되고 그 후 1985년 석남 2동이, 1992년 석남 3동이 분동 되었고, 이후 서구 석남동으로 되었다. 석남동 중앙으로 경인 고속 도로가 지나고 있어 육교를 세 곳에 설치하였고 번지기 고개, 성남동 뒷고개, 월덕 고개, 성넘어 고개, 들, 방죽 등도 도시화로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