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구의 지명유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18:24
<<부평구의 지명유래>>
부평이란 읍호는 고려 충선왕 2년(1310) 지방 관제를 개혁하여 전국의 목사 고을을 없앨 때, 이 곳 길주목이 없어지고 부평부로 개칭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본래 부평은 '오리울'인 '선곶'에 있던 안남도호부가 1165년 계산동으로 이전되어 온 후 그 중심을 이루어왔다.
그 후 읍호가 계양도호부, 길주목, 부평부로 개칭되고 조선조 태종 13년(1413)부평도호부로 되었다.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된 후, 부평역 주변과 시장지역이 발전을 가져와서 부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4년 부평의 일부와 인천의 일부가 합쳐서 생긴 부천군은 1973년 부천시로 승격되었고 인천시는 1981년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더불어 북구도 인구 증가와 도시 발전으로 인해 1994년 북구를 부평구와 계양구로 분구하게 되었다.
▶ 부평동
부평동은 부평군 부내면 소속의 '대정리'였는데 1940년에 제2차 부역 확장으로 인천부에 편입되어 '소화정'으로 되었다가 해방 후 부평동으로 개칭되었다.
일정 때는 일본군 병기 제조를 하는 곳이었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주둔하여 이 지대를 에스캄이라 호칭했으며 주변을 신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부평동은 부평 지구에서 도시 계획을 가장 먼저 실시한 지역으로 시장 · 상가가 집결된 상업의 요지로서와 또 구청이 소재한 동으로 그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부평의 '장고개'는 주변의 고개 중에서 가장 얕은 고개로 장끝말에 20여호가 살았는데, 왜정 말기 부평조병창 확장 공사로 철거되고 해방 후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또 한국군이 들어서서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어 개발이 뒤지고 있다.
▶ 동수쟁이
부평역 일대를 부평군 시절 '동소정면'이었다는 데서 유래되어 '동소정이'가 어음변화로 둥수재이가 되었다. 동소정이라는 面이름이 붙은 것은 지금의 한일은행 부근에 직경 5m가 넘는 물량이 많은 큰 우물이 있어 부근의 사람들이 모두 이 큰 우물 물을 먹고 산다 해서 '같은 우물을 먹는 곳' 즉 '동소정면'이라 했다. 이 지역은 부평구의 유일한 상업지역의 중심지이다.
▶ 백마장 입구
백마장은 지금의 산곡동을 지칭하는데, 산곡로로 이어지는 신일예식장 일대를 백마장 입구라 부른다. 백마장이란 이름은 1940년 산곡리가 부역확장으로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백마정'이라 했는데, 어음이 변로 '백마장'이 됐다.
현재 이 백마장 입구에는 대림 APT가 자리하고 있고 상업 및 업무 기능들이 미비하나, 인천광역시 재개발 기본 계획에 백마장 입구 북측을 부평 3구역으로 지정, 업무와 상업시설이 유치될 계획이며 또한 굴포천 옆의 불량주택 지역은 부평 2구역으로 지정 주택 재개발이 되어있고, 도시철도 1호선과 3호선과의 환승역인 부평구청역이 계획되어 있는 등, 점차 이 지역의 발전이 가속화 될 것이다.
▶ 산곡동
옛날 마장(馬場)이 있었던 곳으로 부평부가 근세에 이르러 동리 명칭을 정할 때 산곡리로 하였다가, 광복 후 산곡동으로 개정되었다.
동부지역은 공업지역과 주거지역이 혼재하고 있으나 서쪽 산지지역은 개발 제한구역과 녹지지역으로 돼있다. 이 지역은 원적산이 있는데, 일부 철마산이라고도 부른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데, 북쪽은 '안하지 고개'에서 철마산에 이어지고 남쪽은 장고개에서 거봉산에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북구와 서구를 경계로 부평과 서곶의 발전상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 뫼끝말
산곡동 서쪽 뒤로 원적산이 있는데, 이 산의 한가닥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내려 이 마을에 와서 뭉쳐져 아름다운 동산을 이루어 동산밑에 마을이 생기니 '뫼의 끝'이란 뜻에서 '뫼끝말'이라 한 것이다.
▶ 화랑농장
지금의 현대아파트와 약수터가 있는 언덕 너머 북쪽 골짜기 마을을 '화랑농장'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1950년 경 상이용사 출신이고 2대 시의원을 지낸 김국환씨와 진상구씨가 상이용사들의 자활원으로 화랑농장을 설치했는데, 얼마 안 가서 운영난으로 중단하였다.
그 후 이곳에 마을이 생겼는데, 마을 이름을 '화랑농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지역은 일반 주거지는 개방이 완료되어 있고 선포 및 호봉산은 인천 도시 자연 공원으로 지정 되어있다.
▶ 청천동
청천동은 1914년 부내면의 청천리가 되었다가, 1940년 제 2차 확장으로 인천부에 편입되어 '천상정'(川上町)이 되었다. 광복 후 '청천동'이 되었는데, 대우자동차 등 대형 기업체들이 소재하여 효성동과 더불어 부평지역의 대표적 공업지역이다.
이 동에는 '원적산'과 '안하지 고개'가 있는데 안하지 고개는 '기러기 떼가 항상 서식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도 하며, 이 곳 주막의 주모 이름이 '안아지'였기에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이곳을 흐르는 하천인 청천이 있는데, 원적산과 철마산에서 시작된 '맑은 내'라는 뜻에서 청천이라 부른다.
▶ 양계마을
'마제이'에서 안하지 사이 큰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 곳이 옛 '안하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원적산 골짜기를 오르면 산중턱에 넓은 산골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양계마을이다.
1961년 12월부터 음성 나환자를 집단 수용하여 양계업으로 생계를 유지토록 해 양계 마을이라 불렀다.
산곡동 석촌 마을과 청천동의 청천농자의 경계 지점으로 현재는 개발 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 지역이 인천광역시 도시 자연공원인 백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각종 운동시설과 자연 속의 휴식 시설 등이 집중적으로 형성되어, 인근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휴식처로 개발될 것이다.
▶ 갈산동
갈산동은 원래 부평군 부내면 '갈월리'였는데 1940년에 인천부에 편입되어 '길야정'이 되었다가, 광복 후 '갈산동'이 되었다. 현재 갈산택지 지구에 대형 아파트 단지의 주거지역과 새로운 공업지역이 혼재하고 있다.
이 동에는 갈산이란 약산이 있는데, 산 전체가 칡으로 뒤덮여 어찌나 오래 묵었는지 집 짓는데 칡 대들보를 쓸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상수도 정수장이 설치되어 한 포기의 칡도 찾을 수 없고 산처럼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또 하천으로는 굴포천이 이 곳을 지나가고 있다.
▶ 갈월리
지금의 갈산동 정수장 자리는 '갈산'(葛山)이란 야산이 있었던 곳인데, 이 산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산 전체가 칡으로 뒤덮여 있어, 이 갈산에 비추는 밝은 달의 야경은 장관을 이루었다.
그래서 '갈산명월'이라 한 것을 요약하여 '갈월리'라 불러 온 것이다. 이 갈산의 칡은 집의 재목으로 쓸 정도로 우거졌었는데, 지금은 한 포기도 찾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 사근다리
간석동에서 부평역에 이어지는 서부용수로는 원통천과 연결되는데 물이 넘치면 여수토교가 있어 수위를 조절하였다.
이 지역엔 인가가 없었는으나 약간 높은 지대에 인가가 하나, 둘 형성되고 농경에 이용하기 위해 허술한 나무 다리를 놓았는데, 워낙 왕래도 드물고 오랫동안 방치하여 삭아 있어 '사근다리'라 부른 것이, 이 지역의 마을 이름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수로는 전과 같이 있는다.
▶ 삼산동
삼산동은 원래 부평군 부내면 '후정리'였는데,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삼입정'이 되었다가 해방 후 1946년에 동 개정으로 '삼산동'(三山洞)이 되었다.
현재 대부분이 생산 녹지지역으로 논과 밭이 많고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주거지역이 들어서고 있다.
이 곳에는 '영성산'이 있는데, 경인 고속도로의 전신인 왜정 말기 국방도로 건설 당시 토취장으로 흙을 파가서 산의 밑뿌리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은 굴포천이 있다.
▶ 부개동
부개동은 본래 부평군 부내면 '마분리'였는데 1940년 인천부로 편입되어 '명치정'이 되었다가 해방후 동명을 우리 식으로 고치면서 '부개동'이 되었다.
이 동네에는 금마산과 부개산이 있는데 '금마산'이란 이름은 산의 형국이 '비단결 같은 말잔등'같아서 생긴 이름이다. 이 금마산은 옛 지도에는 없는 무명의 산이어서, 이를 찾느라 고생도 많이 한다 했다.
또 부개산은 북쪽 줄기의 작은 봉우리가 등잔 같이 생겨 '등잔산'이라 불렀는데, 이 곳에 변전소가 생겨 지금은 한국전력 본부가 들어섰으니, 옛이름 등잔산과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 산동네
부개산 북쪽 골짜기를 타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무허가 판자집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점차 많아져 무려 수백호에 이르니 사람들이 '산동네'라 부르게 되었다.
▶ 일신동
일신동은 원래 부평군 부내면의 '선동리'였는데, 1940 년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향취정'이 되었다가 광복 후 1946년 동명 개정으로 '일신동'이 되었다.
왜정 때는 일본군사 기지로 지정되어 대부분의 주민들이 철거당하고 변두리에 민가 몇 채만 있었는데, 지금은 개발 제한구역과 생산 녹지지역으로 되어 인구 밀도가 낮다.
▶ 황굴
본래 부평 도호부 때 '동소정면 항동'으로 마을 모습이 '항해하는 배'와 같다 하여 '항동'이라 한 것이 '황굴로 변하였다.
또 옛 이 동리 안에 우물이 없어서 멀리 동구밖에 대동 우물을 파 놓고 물을 길어다 먹었는데, 이 마을의 모습이 '항해 중인 배와 같다'고 하여 '마을 안에 우물을 파면 배 밑창을 뚫는 것과 같아 배가 파선되어 이 마을이 망한다'는 속설이 있어 절대 우물을 못 파게 했다. 현재 이 곳은 마을이 없고 군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개발이 불가능하다 .
▶ 십정동
이 동에는 지금의 약사사가 있는 주안산을 '원통산'이라고 부르는데, 이 산은 석산(石山)으로 암석이 모두 붉은 빛을 띠고 있다.
동암이란 역과 학교가 생긴 것처럼 중종때 김안노가 이 동암으로 인해 경인 운하 개굴에 실패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산줄기는 원적산과 더불어 인천시 발전에 장애를 가져와 푸대접 한다는 말이 자주 나오기도 한다.
▶ 열우물
경인 철도 백운역에서 서쪽 동암역 사이의 고개를 '열우물 고개'라 한다.
이 고개 너머 산 중턱에 벽촌 마을이 있었는데, 다른 마을에서는 대동 우물 한 개 파는데 많은 시일이 걸리지만, 이 고개에서는 혼자서 며칠간이면 우물을 팔 수 있어 몇 집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모두 우물을 파서 '한 마을에 우물이 열개도 넘어 열우물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 일설에는 상정 초등학교 위쪽에 대동 우물이 있어 물량이 많고 아무리 추워도 물이 따뜻하여 '열(熱)이 나는 우물'이라 해서 '열우물'이라 했다고도 한다.
지금도 일부 개발 제한구역에 위치한 지역만 열우물 마을의 형태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