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구의 지명유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16:53
●남동구의 지명유래
남동구 관할의 여러 지역들은 삼국시대의 '미추홀', '매소홀', 통일신라시대에는 '소성', 고려시대 때 '경원군', '경원부', '인주군', '인천군'에 이르기까지 독립된 행정부서로 존재하지 못하고 전전하다가 조선시대 인천이라는 이름 아래 군, 도호부, 현, 부, 관찰부, 시, 직할시, 광역시 등을 거치면서 때로는 인천 지역에 속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천군에 속하기도 하면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원래 남동구의 남동(南洞)은 인천부 시절 남촌면과 조동면이었던 것을 1914년 부천군에 남촌면과 조동면을 편입시키면서 두 면을 합쳐 한 면으로 만들었는데 남촌면의 '남'자와 조동면의 '동'자를 따 '남동면'이 되었다.
이 것이 남동 최초의 지명이다. 남동구는 지리적으로 화성의 광교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한줄기가 안산의 수리산을 이루고 다시 서쪽으로 계속 뻗어내려 소래산, 거마산, 상아산, 관모산, 주안산으로 이어지고, 산 기슭으로부터 장수천, 만수천, 운연천, 승기천을 이루어 그 천변을 중심으로 농업을 주업으로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옛 인천의 지명 매소홀 즉 '거치른 물의 고장'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천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많은 고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서울에서 우리 나라와 중국을 잇는 뱃길의 시발지인 능허대로 오는 행로의 중간지점이라 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길목을 중심으로 마을이 발전하여 왔을 것이고 또 그 길목마다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 구월동
구월동은 소래산의 주안봉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한 구릉을 이루었는데 그 형태가 마치 거북이와 같다고 하여 '구산'이라고 불리웠으며, 또한 마을 언덕이 반달과 같이 휘어져 있어서 구산의 '구'와 반월의 '월'을 따서 '구월리'라고 하였다. 구월리는 1936년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정지정'이 되었다. 그리고 1946년 다시 구월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구월동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구릉지와 야산에서 배와 채소 등을 가꾸는 근교 농촌지역이었으나, 1980년대 부터 신시가지가 조성됨으로써 크게 발전하였다.
▶ 성말
인천부 주안면 소속의 '성말'은 1903년 인천부가 관할 동리명을 확정할 때 '성리'였다가 1906년에는 '전재리'로 개칭되었고, 1914년 이후에는 구월리에 편입되었다.
성말의 근원은 두 가지 정도가 전해진다. 하나는 마을에 성이있어서 성리가 되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성씨가 있었던 골짜기라 해서 성말골이라고 불리워왔다는 설이다.
지금의 소방본부 남쪽으로 큰 연못이 있었고, 그 동편으로' 백성말들'과 서쪽으로 '앞성말들'이라는 마을보다는 들의 이름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근처에 성말이 있었고, 성말 사람들이 농사짓던 농토가 바로 백성말들과 앞성말들이 아닐까 싶다.
▶ 구월말
구월은 이 지역의 땅 모양이 거북이 모양과 반달 모양에서 비롯되었다. 인천부 주안면 소속의 구월말은 1903년 인천부가 동리명을 확정할 때 구월리가 되었다. 1914년에 전재리마저 통합하여 구월리가 되었다. 인천소방본부 북쪽 길 건너가 바로 '대구월', 동쪽이 '소구월', 구월4동 모래내시장 근처가 '큰구월'이다.
▶ 간석동
간석동(間石洞)은 양촌(間村)과 돌말(石村)이 합쳐져 생긴 이름이다. 1903년 8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확정할 때 주안면 석암리, 간촌리로 구분하였다가 1914년 4월 1일 신설된 부천군으로 편입될 때에는 주안면과 다소면이 합병되어 생긴 다주면에 속하게 되면서 동년 11월 20일 간석리가 되었다.
1936년 다주면의 대부분이 인천부로 다시 편입되면서 간석리, 석암촌은 주안정에 속하게 되었고, 석촌과 양촌은 '목월정'이 되었다가 광복 후 1946년 간석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간석동은 크게 '석촌리'와 '양촌리'지역으로 나뉘는데, 여기에는 양촌리, 새말, 벌터, 실은재, 석촌, 쇠파니, 풀무골, 삼거리, 기와집말 등의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 양촌
지금은 복개되어 볼 수 없으나 20년 전만해도 구월주공아파트 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인천우체국을 거쳐, 간석역을 넘어 주안공단 쪽으로 흘러가는 개울이 있었다.
양촌은 바로 이 개울가에 있었던 마을로 주원고개의 남쪽 비탈사면에 위치했다고 추정된다. 석바위에서 간석5거리 쪽으로 가다보면 그 중간쯤 주원고개가 나오는데, 그 부근을 지금도 양촌이라고 부른다.
▶ 새말
새말은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이며 이 간석동의 새말에는 장사 '박창보'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때는 조선말 고종 때의 일이다. 새말에는 박창보라는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원래 포수였으나 힘 센 장사였으고 담도 컸다. 당시 간석동 일대에는 무섭기로 소문난 도적이 살고 있었다 한다. 얼마나 무서운 도적이었던지 나라에서는 이 도적을 잡아놓고도 그 도적 부하들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처형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도둑을 체포하여 목을 베기로 작정하였으나 관가에서는 후환이 두려워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을 때 이 소문을 들은 박창보가 자진해서 그 도둑을 처형하겠노라고 관가로 나갔다.
박창보가 장사인데다가 스스로 나섰으므로 관가에서는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리하여 박창보는 마침내 그 도둑 두목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에 도둑의 부하들이 떼를 지어서 박창보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박창보의 집안 사람들은 간이 콩알만해져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박창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부인의 옷을 달라고 하여 입고는 여인으로 변장을 했다.
그리고는 쇠도리깨를 가지고 도둑의 졸개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쳤다. 장사의 억센 힘으로 휘둘러치는 쇠도리깨를 맞고 어느 누가 결딜 수 있겠는가? 삽시간에 도둑 몇 놈이 땅에 쓰러지자 "이놈의 집은 여편네까지 산삼을 삶아 먹었는지 모두 장사로구나.
이대로 계속 싸우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는 걸." 이렇게 말하며 모두 도망쳤았다. 그 후 도둑들이 겁을 먹어 다시는 쳐들어 오지 못했다고 한다.
▶ 만수동
옛 부터 인천은 장수하는 곳으로 이름이 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현종 원년, 인천에 100세 노인이 있던 기록이 있다. 당시의 평균 연령이 40여세인 것에 비하면 이는 약 보통 사람의 두배 반을 산 것이다.
특히 만수동과 장수동 지역이다. 장수로 유명하다. 그래서 동명에 오랜 삶을 나타내는 '수'자가 들어있는 것 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동의 명칭도 '만수동'으로 붙여지게 되었다.
만수동은 20여년 전만해도 띄엄띄엄 형성된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도시 근교농업을 하던 곳이었는데, 1970년대의 인천시의 시세 확장으로 크게 발전한 곳이다.
남동구청의 이전에 구의 중심지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된 주거 중심지로서 많은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만수동의 옛날 이름에는 새말, 구룡골, 산밑말, 담뱅이말, 장승배기, 새골, 비리고개, 돌골, 쇠판 등이 있다.
▶ 새골
원래는 풀이 많아 '초곡'이었는데 '조곡'으로 오기되었다고 한다. 조곡은 '조동'으로 불리우게 되고 조동은 남동구 명칭의 근원이 되었다. 새말은 지도상에 '새골'로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곳은 지대가 낮고 습하여 풀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이루고 있다.
새골의 남쪽으로는 '반줏골', 서쪽으로는 '산박골'이 있는데 이 두 고을 사이에 끼있서 이 새골의 한자 표기에는 여러 가지로 표기된다. 날아 다니는 새의 뜻을 가진 '조'(鳥), 억새풀의 뜻을 가진 '새'(草), 사이의 준말인 '새'(間)로 표현하여 조곡(鳥谷), 초곡(草谷), 간동(間洞)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 관한 지명은 인천의 땅이름 노래에도 등장한다.
▶ 담뱅이말(담방이말)
본래 이름은 '벌담방이'이다. 담뱅이말 앞 들은 장수천에 만수천이 합류하여 소래포구로 흘러드는 곳이다. 따라서 만조시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에 담방담방 넘어들려고 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담뱅이말이다. 이곳에 관한 지명은 새골처럼 인천의 땅이름 노래에도 등장한다.
▶ 장수동
장수동은 인천부 조동면 소속의 '장자리', '만의리', '수월리'였는데, 1914년 남동면 소속의 장수리가 되었다. 장수리는 장자리의 '장'과 수월리의 '수'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40년 장수정이 되었다가 1946년 장수동으로 불리게 디었다.
이 장수동은 거마산, 관모산으로 둘러싸인 산지이며, 옛 부터 만수동과 더불어 장수하는 마을로 주로 도시 근교농업을 하던 곳이었다. 현재 장수동에는 관모산 기슭에 인천대공원이 조성되어 식물원, 등산로, 체력단력장, 야영장, 테마공원 등 많은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고, 많은 시민들이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장사골(장자골)
'장사가 많이 나온 부락'이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마을에서 모두 여덟명의 장사가 태어났다 전한다. 조선 말까지만 해도 '장자리'라 불리웠다 한다. 장수동은 특히 장자, 장자골, 장터골, 장자구리, 장골 등 '장'자가 붙은 마을 이름이 많이 나온다.
이는 이곳이 장수하는 마을, 또 건강하여 힘이 센 사람이 자주 태어나는 고장임을 나타낸다.
▶ 서창동
조선시대에는 농촌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가까운 창고에 저장했다 배를 이용하여 서울에 있는 경창으로 운반했다.
인천의 '남촌면'과 '조동면' 마을 사람들은 추수 후 나라에 내는 곡식(세금)과 국가로부터 빌려쓴 곡식의 원리(빌려쓴 곡식과 이자를 합한 것)로 농가당 약 15섬씩이나 되는 벼를 20여리나 떨어진 북창이나 동창에 내야했다.
그런데 그 벼를 운반할 길이 좁아 우마차가 잘 다닐 수가 없어 현물세를 내러 가는 길이 큰일이었다.
이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이 지역에 창고가 설치되었는데, 이 창고 이름이 서창이다. 서창에 간한 또 다른 이야기는 서해 바닷물이 이 곳까지 드나들어서 마을 사람들이 배를 모아 서해에서 창성하다는 뜻으로 배를 서창호, 마을도 서창이라 하였다 한다.
▶ 장자골
서창동 남단에 위치한 장아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장자골은 '장골'이라고도 하여 한자로는 '장곡', '장아동'으로 통한다. 옛날에 황해도 재령에서 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이곳으로 피난와서 살면서 '자기를 숨겨준 마을'이란 뜻으로 장아동이라 표현한 것이 동네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뒷산은 아직도 장아산이다.
장작골은 인천지방 유일한 '땅이름 노래'에 등장하는데 만수동의 샛골과 담방이, 운연동의 음실과 더불어 등장한다. 그 노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샛골에서 새를 잡아
장작골에서 장작 피워
당방이에서 담방 담그어
음실에서 음실 음실 먹자
이 노래는 옛날의 마을 이름을 엮어 민요조로 부르던 노래인데 여기서 '담방 담근다'든지 '음실 음실 먹는다' 등의 말은 본래의 뜻보다는 그 말의 느낌에서 나오는 의태어로 우리말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 운연동
운연동은 원래 인천부 조동면 음실과 연락골 등의 지역으로 1903년 상음리, 하음리, 연락리로 나눠졌다. 다시 1906년 '연악리'로 단일화 된 후 1914년 부천군이 신설되면서 부천군에 편입 되었다. 1914년 남촌면과 조동면이 통합하여 남동면이 되니 그 관할이 되었고 1914년 '운연리'로 개칭되었다.
'운연'이란 음실의 뜻에서 오는 구름의 '운'과 연악의 '연'자를 따서 지은 마을 이름이다. 이 운연동은 옛날 숲이 우거지고 나무가 많아 각종 새들이 집을 짓고 살면서 사시사철 지저귀고 구름도 한숨 쉬어가는 곳인데, 수원 인천간 산업도로(42번국도)가 뚫리고, 제2경인고속국도가 지나면서 개발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 곳이다.
▶ 음실(陰室)
음실은 인천광역시와 경기도의 경계를 조금 못미쳐 남쪽으로 난 내리막길의 작은 언덕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동쪽에는 '이여발장군'의 묘가 있고, 서쪽에는 '도당재'가 있다. 음실 뜻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소리(音)가 나는 집', 또 다른 하나는 '구름같이 높은 집'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음실은 이웃에 연락리가 있는데 연락이란 '연회를 하며 즐긴다'라는 뜻으로 보아 연회에는 항상 음악이 따르고 결국, 음실 역시 음(소리)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도림동
도림동은 옛날부터 복숭아밭이 많아 '복숭아골'이라고 불려 생긴 동명이다.
▶ 도림말
'도림말'은 말 그대로 '복숭아 밭이 많이있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마을 뒤로 가 해발 70m 정도의 동쪽을 향한 낮은 구릉있어 과수원 최적지다. 그러나 지금은 복숭아보다도 배밭이 군데군데 있다.
▶ 여무실(女舞室)
도림동에 있는 마을로 무당촌의 이름이다. 여무실이란 '여자가 춤을 추는 집'이란 뜻이다. 옛날 이 마을에서는 큰 집을 지어놓고 처녀를 뽑아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 또는 무당을 양성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무당이 굿하고 춤추는 집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인천에는 여(女)자가 마을에 붙은 곳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여무실이고, 또 하나는 서구에 있는 연희동이다. 연희동은 본래 여희동으로 신라시대에 처녀를 뽑아 베짜기를 가르치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여자와 선자는 불길하고 천하다 하여 '여'자를 다른 자로 고쳐 사용한 것이 연희동이 되었다 한다.
▶ 수산동
수산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사람들이 오래살 수 있는 터전이란 뜻에서 '수산리'로 불렸다. 원래는 인천도호부 시절 남촌면 경신리 지역으로, 바리때처럼 생긴 산이 있어 바리미, 바래티, 배래터, 바렷, 배렷, 또는 발산, 발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아누굴, 황굴, 찬우물, 경신을 병합하여 '발산리'라 했다.
1940년 인천부에 다시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수정'이라 하다 1946년 동명 변경에 의하여 '수산동'이 되었다. 그리고 1977년 도림동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에 속해 있다. 찬우물, 배래터, 능곡동 등의 자연부락이 있으며 아직도 농업중십의 근교 농업지역이다. 그러나 이제는 제2경인고속도로가 완공되어 편리해진 교통과 더불어 지역발전이 기대되고 있다.
▶ 찬우물 부락
수산동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경신고개, 찬우물 고개가 나온다. 그 수산동 242번지 일대가 바로 찬우물 부락이다. 이 마을은 100여년전 김씨성을 가진 6가구가 처음 정착하여마을을 이루었는데,
마을안에 있는 공동우물이 유난히 차다고 하여 찬우물 마을이라고 불렸다. 그후 광복 이 후 '냉정부락'이란 한자음으로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이 마을 지하수는 유난히 차다한다.
▶ 남촌동
남촌동은 원래 자염 즉, 염벗이 많아 인천부 남촌면 염말이라고 불리다 1903년 염촌으로 개칭하였다. 다시 1906년 5월 인천부의 동리명 확정 때 소가 누워있는 모양의 지형이라 해서 '와우리'라 하였다.
그 후1940년 남촌동이 되었다. 남촌동에는 상촌, 하촌, 중촌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 상촌, 하촌, 중촌
남촌동은 전통적인 농업지역인데 마을 이름은 매우 단순하다.'상촌'은 위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고, '하촌'은 아래에 있는 마을,'중촌'은 가운대있는 마을 이란 뜻이다.
▶ 논현동
논현동이란 옛날 마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어른들이 마을 뒤 망월산의 넓은 공터에 모여 의논을 해 이름이 지어졌다는 이야기와 고개에 논이 있어 논고개였는데 이것이 한자어로 논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사신들이 중국으로 떠날 때 배웅 나온 가족들과 이야기하면 넘는 고개라 하여 논현동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 고잔동
육지가 바다쪽으로 반도 모양으로 뻗어나간 지형을 '곶'이라 하는데 '곶'은 '고지' 또는 '고잔'이 되었다. 고잔은 인천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안지역으로 인천부 조동면 고잔리로 변동없이 불리워오다가 1914년 고얏말, 돌우물, 갈매를 병합하여 부천군 남동면 고잔리가 되었다.
그 후 1981년 인천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직할시 남구 고잔동이 되었다가 1988년 남동구가 신설되어 남동구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고잔동이다.
고잔동은 반농, 반어업 지구로 한때 패류 채취와 염전으로 유명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화약과 보르네오 가구 등의기존 공장과 남동공단 입주로 이 지역 발전이 크게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