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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옹진군의 지명유래

by 형과니 2023. 3. 22.

옹진군의 지명유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26:47

 

옹진군의 지명유래

 

옹진군은 원래 황해도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황해도 지역이 한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고조선시대 부터이며 고조선 이후 낙랑군에 속해 있었다. 그 후 830년 경에는 완전히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 되었으며 이때 부터 옹천홀이라 불렀음을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옹천홀이라는 이름은 옹천성(일명 화산산성)이 독을 눕혀 놓은 모양 같고 성밖은 급경사로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는데 이 성의 특징을 따서 옹천(독벼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시대의 황해도 지역은 한산주에 속해 있었고 옹진 역시 한산주에 편입 되었는데 고구려 때의 지명인 옹천이 그대로 유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지역이 신라의 중심부와 많이 떨어져 있는 관계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듯 보이나 백령도는 신라와 당이 왕래했을 때 황해 항로상의 중간기지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백령도에 진을 설치하여 성을 쌓고 군대가 주둔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령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기 때문에 군사적 목적보다는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한 항로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였을 것이다.

지금도 백령도 진촌에는 토성지가 남아 있고 그 주변 경작지에는 고려의 기와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진존이라는 지명도''이 있었던 곳을 뜻한다.

 

 

 

북도면

북도면은 고려 현종 9년부터 강화도 제도면에 속하여 장봉도, 신도, 모도, 시도를 관할했다. 1914년 북쪽에 있는 섬이라 하여 북도면이라 이름 짓고, 모도에 면사무소를 설치하여 장봉, 신도, 모도, 시도의 4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그 후 1922년 면사무소를 신도로 이전해 다시 19421020일 북도면 지역의 중앙지대인 시도로 이전하였다. 그리고는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북도면에는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아염도, 사염도, 오도, 선염도, 말못도, 남가지도, 동만도,서만도 등의 섬이 있다.

 

송림면

송림면은 주도인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등 두 개의 유인도와 모이도, 구지도, 당도, 책도 등 4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연평도가 문헌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려 시대로 <고려사> 지리지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안서대도호부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해주목'에 포함 되었는데 해주목 관할 아래 4개의 어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연평 어전이며 그들어전의 주요 산물이 청어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원래 연평도를 주도로 한 송림면은 황해도 해주군에 속했던 곳으로 일리, 이리, 삼리, 사리, 오리, 육리, 칠리의 7개리를 관할하던 곳이다. 그런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옹진군 용연면의 이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동, 송현, 가평, 육도, 소수압, 대수압, 연평의 7개리로 개편 관할했는데 1937년 해주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벽성군 송림면이라하게 되었다.

 

광복 이 후 38선이 생겨 남북으로 분단 됨에 따라 1945년 옹진반도와 함께 경기도에 편입해 옹진군 송림면으로 되었다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육지의 내동리, 송현리, 가평리와 도서의 대수압, 소수압리가 적 치하로 들어감으로 현재 연평리만을 관할하고 있으며, 1962123일 소연평도를 리로 분리시켜 관할하게 되었다.

 

 

백령면

이 섬은 고구려 시대에는 '곡도'(鵠島)라 불렸으며, 고려 시대에 내려와 백령도라 불리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황해도 장연군에 속해 있던 섬으로 그 모양이 고니처럼 생겼다하여 '고니섬' 또는 한자로 고니 곡()자를 '곡도'라 하던 것을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펴고 공중을 나르는 형상과 같다하여 '백령도'라 했다고 한다.

 

대청면

대청면 지역은 고대에 중국과의 해상 교통로상에서 백령도와 함께 중요한 연결선상에 놓여 있었다. 신라 진성왕때에 중국으로가는사신들이 폭풍을 만나 백령도에 머물었던 것을 비롯하여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싸움에서 유금필이 포을도에서 군사를 징발했다는 기록과 중국 사신 서긍이 송에서 고려로 오는 노정을 적은 기록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지명이 기록되기 시작한 것을 고려 시대로 볼 수 있겠다.

 

이 지역의 명칭은 원래 '포을도' 또는 '청조라' 했는데 섬을 멀리에서 바라보면 울창한 산림이 마치 '검푸른 눈썹 먹 색깔과 같기때문'이라 했다. 그러므로 '포을도'란 푸른 섬이란 것을 소리 나는 대로 순 우리 음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며, 이를 한자화한 것이 '청도'가 된다.

 

고려 시대에는 대청도와 소청도가 백령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죄인의 유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특히 고려 제 27대 충숙왕 4(1317)에는 원나라 발라태자가 이곳에 귀양와 있다가 충숙왕10년에 돌아갔고 그 다음 해 정월에 다시 귀양와서 5년을 지내다가 충숙왕 163월에 돌아갔다.

 

그리고 충숙왕 177월에는 원나라 명종의 태자인 타환채목이가 대청도로 귀양와 있다가 충혜왕 원년 12월에 풀리어 원나라에 돌아가 순제가 되기도 했다.

 

이 때 몽고나 원나라의 귀족 및 황태자의 유배시 그들과 함께 유입된 인구도 많아지게 되었으며 이 지역 발전에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주민의 대부분이 조상의 귀양살이로 이곳에 들어와 안착하게 되었다고 보고 되고있다.

 

 

덕적면

덕적면 지역이 역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원삼국 시대를 지나 삼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어 백제의 대중국 교통로상의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접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중국과 통교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부터 이 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금강 유역의 공주로 천도하던 475년까지 100여년동안 사용된 중국과의 교통로는 능허대에서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황해를 횡단하고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와 내주에 이르는 항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이곳은 중요한 항로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간의 한강 유역 장악을 위한 전생이 계속디면서 한때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장악하게 되어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하여 고구려가 장악했던 한강 유역의 옛땅을 회복했다. 551년에 덕적면 지역이 백제의 세력 아래 들어 갔으나, 2년 후 신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덕적면 지역은 신라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된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은 중국의 직접 통할 수 있는 통로의 확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된다. 신라는 이를 계기로 남양만에 당항성이란 요새를 설치하여 중국의 남진, 북제와 사신을 교환하고 외교를 강화하여 삼국 통일의 기초로 삼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덕적도는 덕물도로 나오고 있다.

 

660618일 김인문은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13만 군사와 함께 산동반도의 내주를 출발하여 황해를 건너 덕물도에 정박했다고 한 것에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덕적면 지역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남양에 당항성을 쌓아 중국과 통교한 553년이래 줄곧 당항성이 있는 당성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성군의 지명이 수차 바뀌어 신라 경덕왕 17년에는 당은군으로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 옛이름으로 복구하여 수주의 속군으로 삼았다가 뒤에 인주로 내속하였다.

 

덕적도는 덕물도외에 덕물도, 득물도 등으로도 표기하였는데 용비어천가에 보면 고려 말 왜구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중 '덕적'의 이름 아래 '덕물'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덕적'으로 쓰고 읽기는 '덕물'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자를 서서 '인물도'라고도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덕물도라는 뜻은 '큰물섬'이라는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이 지역을 '수심도'라고도 썼는데 이것 역시 덕적도의 원이름이었던 '큰물섬'에서 온것이라 생각된다. 즉 덕적도란 큰물, 깊은 물, 즉 크고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란 뜻으로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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