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 역사

계양구의 지명유래

by 형과니 2023. 3. 22.

계양구의 지명유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20:03

 

<<계양구의 지명유래>>

 

계양구의 근원을 옛 고구려 때부터 기술하고 있으나, 한강 유역의 역사적 추이로 미루어 보아 그 이전의 내력을 어느 정도 살펴 볼 수 있다.

 

계양산을 중심으로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고 하천이 흐르던 계양구 지역에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가 470'주부토군'을 설치하면서 부터 계양구 지역이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757년 신라의 삼국통일 후 주부토군이 '장제군'으로 개칭되고, 940'수주'로 승격되었으며, 1105년 인천이 경원부로 승격된 후 수주에서 분리되었다.

 

그 후 1150년 수주는 '안남도호부'로 개칭되었고, 당시 청사는 지금의 계산동에 위치하였다. 1215년 이규보가 계양도호부 부사로 부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1413년 부평도호부 이후 부평현, 부평군으로 변천되었고, 1914년 부천군이 폐지되며 부천도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대한민국 설립 이후 194년에 인천부를 인천시로 개칭하였고 1968년 인천시 북구가 설치되었으며, 1981년 인천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김포군 계양면이 인천직할시 북구 계양동으로 편입된 후, 인구의 급증에 따라 분동이 계속되었다.

 

1990년 효성동과 계산동을 계양1,2, 계산1, 2동으로 분동하고 같은 해에 작전동을 작전1, 2동으로, 1992년 계양동을 계양1, 2동으로, 1994년 작전1동을 작전1, 3동으로 분동하였다.

 

계양구는 인천광역시 동북쪽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김포군, 동쪽으로 서울과 부천, 서쪽으로 인천광역시 서구, 남쪽으로 경인고속도로를 경계로 인천광역시 부평구와 접해 있다.

 

 

 

계산동

안남도호부 청사가 황어향 선곡에서 1165년에 계산동 중구봉 아래로 이전한 후 계양도호부 길주목 부평부로 되었다(1413). 이때 부평군 부내면이 군내면이 되고 상동과 하동은 부평읍이라 불렀다.

 

1914년 부평읍의 폐읍으로 부평리(계산동)가 되어 부내면 사무소를 부평리에 두었다. 1940년 부평리와 하리를 합쳐 부내면 사무소가 폐지 되었고 1946년 계산동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2년에는 계산1동과 계산 2동으로 나누고 계산 2동은 서운동에서 관할하였다.

 

1977년 계산 1동을 계산동으로 고치고, 1981년 북구 계산동이 되었다가 1990년에 계산 1동과 계산 2동으로 나누어졌으며, 1991년 계산 3동이 생겼다.

 

비석거리

부평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분 또는 경기 관찰사(감사)로서 이 고을의 '구휼, 애민, 선정''공적을 기리기 위한 송덕비'를 세웠던 곳으로 그 원 위치는 계산동 964번지로 부평부에서 동구밖에 있어 이곳을비석거리라 불러왔다.

 

이 비석이 왜정 35년에 관리 소홀로 모양이 말이 아니더니, 광복 후 동사무실 또는 향교 앞으로 이관되고, 또 부평초등학교 진입로에 이전되더니, 지금은 싸이클 경기장 경내로 이전되어 있다. 이처럼 많은 수난을 겪었던 것이다.

 

 

계양동

계양동은 본래 고려(1018)시대 부터 지방제도 개혁을 황어형, 황어향으로 2백년간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부평도호부 산하의 황어면은 둑실리, 복상리, 역동, 갈산리, 오류동, 이화촌, 노오지리, 선주지리, 장기리 등 9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면의 임학동, 용종리, 병방리, 박촌리, 방축리의 5개 동리와 당상면의 동양리, 굴현리, 상야리, 하야리, 평지등 5개리를 병합하여, 계양면이라 하였다. 1917년에 병방리에 있던 계양면사무소를 장기리로 이전하고, 1973년에 김포군에 편입되었다.

 

1989년 인천직할시 북구에 편입되어 계양동이 되어 계양면이 폐쇄되었으며, 1992년 계양동이 계양1, 계양2동으로 분동되었다.

 

 

장기동

장기동은 본래 부평도호부 황여면의 지역으로 황어시장이 있어 황어장터, 황어장, 장터라 불러 장이서는 곳이라서 '장기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로 되고, 또 계양면 소재지였다.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11일 인천 북구에 편입된 계양면의 중심지였다.

 

이화동

이화동은 본래 부평도호부 황어면 지역으로 계양천 섶의 벌판 가운데 마을로서, 옛날 계양천의 하류인 천등천을 따라 한강으로 통하는 배가 드나드는 곳이라서 배곶이, 배꼬지, 선곶이라 했는데, 한자표기 때 배곶이라 하니까 배() ()으로 착각하고 이화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김포군 노장면 당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부천군 계양면 이화리로 되고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11일 인천 북구에 다시 편입되었다.

 

 

오류동

오류동은 옛 수주읍 소재지로 부평도호부 때는 황어면 지역이다.

 

이 마을에는 오리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오리울, 오릿골, 오류울, 오류동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김포군 노장면 당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로 되었다.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인천 북구에 편입되었다.

 

오리울이 생긴 유래는, 선조 28(1595) 윤명선이 부평도호부 부사로 부임하여 보니, 옛 수주 때 명재상 윤관이 수주지주사를 지냈음을 감명깊게 생각하고, 처사가 끝나자 이곳에 낙향하여 정착한 이래, 그 후손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7효자 4정려가 나온 효가 가문으로 일컬었다. 마을의 구성이 오리울, 넘말, 아랫말로 구분되어 '오리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서 오울이리라 했다'는 설도 있다.

 

 

박촌동

박촌동은 본래 부평도호부 동면 지역으로 박씨가 많이 살아 박촌이라 했고, 조선 중기까지 박촌을 중심으로 300호가 넘는 부평 제1의 대성을 이루었었다.

 

1914년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천군 계양면 박촌리로 되었다.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인천 북구에 다시 편입되었다.

 

동양동

동양동은 부평도호부 당산면 소재지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당미, 양지말, 모뎅이, 동녘해, 서녘해를 병합하여, 동녘해와 양지말의 이름을 따서 동양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 동양리로 되었다.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인천 북구에 다시 편입되었다.

 

당미라 했음은 부평읍지에부평부 동족 십리되는 벌판 가운데 당신이 있다라고 했듯이, 당꾀를 따서 당산명이 되었고 '당뫼'가 어음의 변화로 '당미'로 되었다.

 

이곳에는 순강군 이선린 그 아들 수군절제사 이필형, 순평군 이선봉, 원종공신 이필겸 등의 묘소가 있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

 

병방동

병방동은 본래 부평도호부 동명의 지역으로, 세조 즉위(1455) 후 이곳에 중익진을 성영하여 병징이 주둔 하였으므로 '병방'이라 했고 또 동면사무소가 있어 동면으로 불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부천군 계양면 병방리로 되고 계양면 소재지가 되더니, 19171120일 장기동으로 이전하였다.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다시 인천 북구에 편입되었다.

 

방축동

방축동은 본래 보평도호부 동면의 지역으로, 앞에 방죽을 막아서 '방죽말', 또 말등성이 같다는 '발번뎅이말'로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부천군 계양면 방축리로 되었다.

 

이 곳에는 금계와 같다는 '금계봉' 도당굿 터가 있는 '도당산' 쇠물을 녹여 창검을 만들었다는 '검노지산'이 있고 중골, 황쇠골, 멱골, 쇠웅골 등의 골짜기가 있다. 방죽말은 밀양 당씨의 주거지로, 정조 22(1798) 윤광석이 부평도호부사로 있을 때, 어명으로 좌수가 된 당문보 부자가 살던 곳이다.

 

효성동

원래 부평군 마장면 효성리였던 효성동은 1914년 부천군 부내면 효성리로 되었다가, 1940년에 '서정'으로, 그리고 1946년 효성동으로 되었다.

1990년 동세 확장으로 효성 1동과 효성 2동으로 나누어졌다.

 

새별이

새별이라 함은 효성동 마을을 옛 이름이다.

 

이 지역은 수원이 없는 볼모지 벌판의 논이 없는 척박한 지역이다. 땅에는 씨가 안 트고 자라지 못하니, 개간은 하였어도 모두 묵은 밭으로 도처에새풀만이 무성하여, 농토는 일구었어도 논둑 밭두렁이 온동억세풀로 모두가억새벌판이어서새풀이라 불렀던 것이새별이로 변하였다. 새별이를 한자로 적을 때 샛별로 잘못 적어 효성(曉星)리로 탈바꿈 되었다.

 

 

 

 

'인천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구의 지명유래  (1) 2023.03.23
강화군의 지명유래  (0) 2023.03.22
서구의 지명유래  (1) 2023.03.22
부평구의 지명유래  (0) 2023.03.22
연수구의 지명유래  (0) 2023.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