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의 지명유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13:49
<<중구의 지명유래>>
개항전의 제물포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삼남 지방의 세곡을 운반하던 중요한 해상 교통로였다.
조선초기에는 남양부 화양만에 경기수영을 두고 경기만을 수비하기 위해 산하에 영종만호, 제물포량만호, 초지량만호 등 6개의 진을 두었는데, 당시 인천에는 제물포량에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31년에 1984년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군제가 편제됨에 따라 이곳도 모두 폐쇄되어 제물포 항구는 구한말 전까지 인적이 드문 한적한 어촌으로 전략하고 말았다.
1883년 1월 1일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의 중심지가 중구 지역으로 자리를 잡게 되자 그 이전의 중심지였던 인천읍(현 관교동)과 부평읍 지역(현 계산동)은 한적해 지고 제물포(여기서 제물포라 함은 현재의 중구 지역으로 자유공원 아래의 북성동과 항동, 중앙동을 일컬음)지역은 새로운 항구도시로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에 여러 나라의 영사관이 설치되고 외국인의 무역상이 자리잡으면서 수도권의 관문되었다.
구한말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되어 중구는 우리 나라 개화의 선구지가 된 고장이다. 특히 자유공원 주변의 지역은 외국인들의 통상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그들이 자유롭게 거주 할 수 있는 일정한 지역의 공간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로부터 제물포 땅을 빌려쓰는 조계 계약을 맺게되어 개항과 더불어 약 30 년간 외국인들의 조계 지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조계 지역의 설정으로 우리의 땅을 외국인들에게 내주어야하는 수치스런 역사의 한을 남기게 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중구 지역은 인천직할시로 승격하기전까지 약 100여 년 동안 인천의 중심 지역으로 발전하여 온 근대화 도시 발전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중구의 변천사는 1945년 8.15 광복과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 지방자치법 공포로 인천부를 인천시 승격되는 등 다사다난 했다. 1956년 10개동으로 인천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해왔으며, 1973년 동구 지역이었던 월미도를 편입하였고 1989년 경기도 옹진군 영종면과 용유면이 중구에 편입 되었다.
▶중앙동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서해안에 위치한 곳으로 1975 년 중앙동, 해안동, 항동, 관동, 송학동 등 다섯 개 동을 합하여 중앙동이라 하였다. 그 후 해안지대의 대 매립공사로 현재의 연안부두가 개발됨에 따라 1985년 중앙동을 중앙동과 해안동으로 분동하였다.
원래 중앙동이란 동명은 이 지역이 인천의 중심지라는 뜻에서 불려진 이름이다. 이곳은 본래 구한말 부내면에 속했던 지역인데 개항과 더불어 이곳에 외국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각국 지계(地界)가 생겨 개화의 중심지가 됐다. 지계가 처음 생겼을 때는 지명이 없었으며 지번과 호수로만 불려왔다. 여기서 지계란 정부간에 직접적인 토지 임차와 관계없이 외국인이 토지 소유자와 개인적인 교섭에 의해 땅을 빌려쓰는 제도로서 이 지역은 주로 일본인들 지계에 속했다.
그 후 지계가 철폐되고 1914년 경기도 고시 제8호에 의하여 일제는 인천의 중심지라는 뜻으로 그들의 지명에 자주 쓰이는 '정'(町)자를 넣어 '본정'(本町)이라 하였다. 광복 후 일본식 동이름 명칭 변경에 따라 1946년 1월 1일부터 중앙동으로 개칭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곳 중앙동은 일제 때 은행과 일반 상점들이 밀집되어 있던 인천의 중심지로 번화가였으나, 1970년대부터는 도시의 팽창으로 인하여 신흥 주택단지가 생겨남에 따라 주요 관공서의 이전과 함께 중앙동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80년에부터 이곳에 상권이 개발되기 시작하여 주변에 신포시장을 비롯 각종 유흥 음식점과 패션가로의 변신을 꾀하였고, 앞으로 다가오는 서해안 시대를 맞이하여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고 무역량이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발전을 도약하고 있다.
▶해안동
항동과 마주보고 있는 해안동은 해면을 매립하기 전 바닷물이 출렁이는 해안선으로 되어 있었던 곳이다. 그런 연유에서 이곳을 해안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을 매립하여 새 외국인의 왕래가 빈번하여 무역상이 즐비하게 들어 서 있었다.
현재 해안동은 옛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그 중 몇 군데는 내부만 개조하여 유흥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3가에 있는 옛날 미두취급소(米豆取扱所) 자리는 한국은행이 인천지점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주택은행 인천지점이 서 있다. 또한 4가에는 조광빌딩이 옛모습 그대로 있으며 전 식산은행은 현재 산업은행 인천지점으로 되어 있다.
이 지역은 인천항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다가오는 21세기 서해안 시대를 맞이하여 동북아 교역이 활발해지고, 중국과의 무역은 물론 관광객이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발전을 위한 힘찬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관동
중구청과 답동, 신포동 사이에 있는 관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인데 옛 일본지계의 핵심지로서 개항후 이 곳에 주한 인천일본영사관, 일본거류민단역소(사무소), 경찰서, 우체국(일본 영사관 구내) 등이 있었다. 이러한 관청이 밀집돼 있었던 관계로 이곳을 관동이라 불려왔다.
관동은 1914년 중정(中町)이라 불렸는데 이것은 당시 이 일대에 복도조(福島組), 대화조(大和組), 시호조(神戶組) 등 중사(中祀 =하역업자)가 집결 되어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광복 후 1946년 관동으로 개칭했으나 이제는 옛날과 달리 이곳에는 중구청(구시청)만을 남긴 채 관청은 모두 신 개발지로 이주하고 없는 실정이다. 현재 이곳에는 새로운 고급 상표의 가게가 운영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주로 찾고 있다.
▶송학동
응봉산 자유공원 홍예문 남쪽 언덕에 위치한 송학동은 원래 인천부 부내면 지역이었다.
송학동은 응봉산 줄기 남향의 비교적 높은 구릉지대이므로 인천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이 아름다운 주택지구로 되어 있다.
이곳은 개항 초기에는 각국 지계의 핵심지로서 주로 구미(毆美)계 시민의 주거지였으므로 인천을 대표하는 호화로운 저택이나 넓고 수려한 정원이 곳곳에 많았다.
그 예로 독일인 모오셀의 주택, 미국인 데슬러 주택, 다운센드의 주택, 중국인 오예당(吳禮堂)의 주택 기타 성공회 등의 건물이 있다.
애당초 이 지역은 동명 대신에 각국 지계 등급과 호수만으로 지칭되었으나, 지계 철폐후 산 위로 새로된 마을이라 하여 산수정이라고 일본인들이 불렀다.
그후 나라를 되찾아 광복을 기념하여 송학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송학동 1가에 있는 남부교육구청은 일정 때 유치원이었던 것이 해방후 개성에서 피난 나온 송도중·고등학교와 신흥, 송월초등학교 분교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교육자치제 실시와 더불어 인천시교육청으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개 · 보수하여 남부지구를 관할하는 교육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인천문화원은 원래 지인 외국인들의 1급 사교장이었던 제물포 구락부 건물로 1901년에 지어졌다. 그후 일정 때는「청방각」이라 하여 일본 재향군인회, 부인회관 등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최근까지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송학동은 1988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만국공원이 생긴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공원의 이름을 만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 부르고 있으며, 이곳은 인천 시민은 물론 수도권 사람들의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을 뿐 아니라 각종 백일장과 그리기 대회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 홍예문 고개
응봉산 남쪽 송학동에 그 산줄기 고개를 뚫어 만든 문이다. 여기서 '홍예'라는 말 뜻은 무지개를 말한다. 따라서 홍예문은 문의 위쪽을 무지개 같이 반원형으로 만든 문이다. 홍예문은 1905년에 착공하여 1908년에 완공한 것이다.
이 문을 만든 것은 일본인들이 당시에 인천항과 이곳 주변에 있던 일본인 조계에서 경인철도 축현역과 만석동 등지로 물건을 빠르고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이곳 산줄기를 뚫어 만든 홍예문도 일본인들이 우리 나라를 수탈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지금은 담쟁이 넝쿨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더 해주고 있다.
▶ 응봉산
자유공원 전체를 한아름 품고 있는 산으로 수림이 우거지고 경치가 아름다운 산이다. 예전에 시계가 없던 시절 이 산에서 매일 정오를 알리는 대포를 쏘아 오포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산의 높이는 81.6cm 로서 이곳에 최초로 우리 나라 근대식 공원을 조성하였는데 6.25 당시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어 놓은 맥아더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맥아더 동상이 있으며, 한 여름의 더위를 피해 휴식처로 제공하고 있는 연오정,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탑, 그리고 자유여신상 등이 있다.
이 산의 이름을 '매뿌리산' 또는 '응암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응봉산 정상에 서서 보면 인천항은 물론 멀리 황해 바다와 인천의 전경을 한 눈으로 볼 수가 있어, 인천 시민은 물론 수도권 사람들의 훌륭한 휴식처로 제공되고 있다.
▶연안동
연안동은 바다를 매립하여 만든 땅으로 소월미도 지역을 관할구역으로 하는 행정동이다.
본래 중앙동이던 것을 시조례 제1895호(1985.1.19)로 중앙동과 연안동으로 분동 했다.
그리고 북성동 일부는 구조례 제98호(1988.12.31) 행정동간 경계 조정에 의해 연안동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1973년도 연안부두가 처음 조성되었을 때만 해도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고작 섬 사람들이었는데, 그후 해양센터와 횟집과 인근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하였다. 특히 주말과 공휴일에는 서울 등 수도권 인근 주민들이 수만명씩 찾아와 싱싱한 생선과 횟감을 사가는 명서로 각광 받게 되었다.
이곳은 국제 무역항을 자랑하는 인천항 도크가 있으며, 한중 수교로 인한 국제연안여객터미널 이전 신축공사와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호텔 건축예정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인천 주위에 있는 여러 도서지방을 갈 때에도 이곳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선박을 이용하여 갈 수가 있다.
▶신포동
답동성당 맞은편 재래시장에 있는 신포동은 바다로 통한 내(川)가 있어 순 우리말로 '터진개' 또는 '탁포'(坼浦)라 하였다.
다른 뜻으로 신포동이란 이름은「터진개」의 의미에서 개포동(開浦洞)이란 뜻을 취(取)하고 새롭게 발전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 동네는 개항 후 생겼는데, 구한말 선창리에 속해 있다가 1903년 부내면이 만들어질 때, 새로 번창한 마을이 라는 뜻에서 신창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 중 지금의 신포동 일부인 사동지역 3만여 평은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앞바다를 매립해 생긴 땅이다.
개항 후 외국인들이 몰려와 조계가 생기고 각종 건설공사와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창고나 하치장을 만들기 위해 넓은 땅이 필요해짐에 따라 일본인들이 바다를 매립하게 된 것이다.
1914년 4월 1일부터 일인들에 의해 일본식 동명의 이름으로 '신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정은 유곽촌을 뜻하데 일정 때 지금의 답동성당과 인천여상 부근에 일본 여자들의 사창가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고 한다.
광복 후 동명 개칭에 의해 신포동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원래「신포」는 말 그대로「새로운 포구」라는 뜻이었지만 일제가 1910년부터 바다를 매립해 지금의 항동까지 육지화 했기 때문에 현재는 바다와 완전히 분리된 동네가 되었다.
그후 1977년 5월 10일 시조례 제 1075호(1977.4.18)로 법정동인 사동, 신생동, 신포동, 답동 등 네 개동을 합하여 신포동이라 하였다.
신포동에 있는 재래시장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특히 도로 주변의 상가에서는 유명 상표의 고급 매장이 즐비하며, 젊은이들의 많이 찾고 있는 카페 및 경양식점이 많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외국과의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짐에 따라 외국인들이 많이 찾을 수 있는 패션 및 유흥가로의 발전이 기대된다.
▶항동
중구청 맞은편 바다와 인접해 있는 항동은 선착장과 여객부두, 관세청 등 인천 항구의 주요 시설이 있는 항구의 중심 지역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현재의 항동은 본래 대부분 바다였다.
단지 구한말 부내면에 속하였으나 이렇다할 동명을 갖지 못한 채 해면에 돌출한 소구릉(현재의 올림포스호텔 자리)과 개항후 그 기슭을 매립하여 세관 건물을 지었는데, 이 지역을 오늘날과 같은 인천항이 되게 한 최초의 개항장(제물포항)이다.
일제때인 1914년에는 이곳을 '항정'이라 불렀다. 그 후 항동의 상당 부분은 1915년 일제가 매립하여 항정 3·4·5·6정목이 생겼는데, 광복 후 1946년 1월 1일부터 일본식 동이름 변경에 의하여 항동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항동은「넓고 큰」동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런 뜻에서 이곳이나 충남 태안 인평의 항동처럼 항동, 항골, 한골 등으로 불리는 이름이 전국적으로 많이 있다. 1970년대에 해안 대 매립공사로 현재의 연안부두가 개발됨에 따라 항동 7가가 생겨났다.
현재 항동 1가에는 올림포스호텔이 이고 3가에는 인천경찰청이 있으며. 6가에는 인천우체국과 국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항동은 인천의 도로가 시작되는 곳으로 지금의 개항 100주년 기념탑이 있는 자리에 그 뜻을 나타내는「도로 원표 」가 있었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의 서울도로원표에 서울과 인천의 거리가 42km로 나와 있는데, 이 때 42km의 시작점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 서울뿐 아니라 국내 다른 지역과 인천과의 거리를 나태는 기점이기도 했다.
서울과 인천간의 경인고속도로가 24km 인데도 일반적으로 서울과 인천의 거리가 42km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로 원표는 지역마다 그곳 도로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항동의 도로 원표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왜 없어졌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 제물진(제물포)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제물포는 지금의 중구 중앙동과 항동 일대에 있던 포구였다.
'제물'이라는 말은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이 곳에 있었던 수군 기지의 이름이 제물진이었던 것에서 연유된 것이라 한다. 향토 사학자들은 '제물(濟物)을 제수(濟水) 즉 물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말한다. 인천 앞바다는 간만의 차가 커 물때를 맞추지 않으면 군함을 대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제물진이 있던 곳에는 선창리라 불렸다.
1883년 개항이 되자 일본인들은 제물포를 중심으로 일본 조계를 만들어 자신들의 상권을 확대하며 조선 침략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조선 조정에서도 조계가 모여 있던 곳에 인천 감리아문을 두어 개항장 일대의 행정, 조세, 치안, 재판, 외교 업무 등을 처리했다.
그후 인천의 중심은 원래 도호부가 있던 지금의 남구 문학, 관교동 일대에서 제물포 지역으로 점차 옮겨지게 되었으며 제물포는 인천은 물론 우리 나라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결국 제물포는 지금의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넓게는 중구와 동구 일부 지역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1963년 1월 당시의 경인선 숭의역이 제물포역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은 그 역사가 있는 남구 도화동 일대가 마치 제물포인 것처럼 변해버렸다.
이 때문에 옛날 제물포 위치를 따져 볼 때 지금의 경인전철 인천역이 제물포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사동
신포동에 붙어 있는 사동(沙洞)은 원래 이곳에 많은 모래가 있어「모래마을」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본래 이곳은 인천의 부내면 지역으로 옛부터 바다 인근에 있어 모래가 많아 '모래말' 또는 '사촌'이라 하였다.
그 후 1906년 일본인들의 매립조합에 의해 사도(沙島)(현재의 인천항에 있는 도크지역)앞까지 13,000여 평을 매립하고, 애초에는 이곳을 '축지정'이라 하였다.
1914년 4월 1일부터 '빈정'으로 개칭하였다. 여기서 빈정이란 '해변가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동명 개칭에 따라 1946년 1월 1일부터 옛 이름을 따서 사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사동은 위치상 주로 외항선원과 그 가족들이 이용하기 편리하하다는 잇점으로 일찍부터 이곳에는 숙박업소가 들어섰으며 이런 연유에서 이곳을 여관가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이곳에는 주로 보험사의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 모래섬·五分島
모래섬이었던 것을 육지와 연결하였던 곳이다. 또 이곳에서 돈(五分)을 위조했던 곳이라서 불리어지게 되었다.
▶신생동
신흥초등학교 맞은편에 위치한 신생동은 원래 인천부의 부내면에 속해 있었으나 이곳은 황량한 해안선 지대였으므로 따로 동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 지역은 일본인들에 의해 사동, 항동과 같이 해안의 낮은 지대를 매립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개항 20년이 지나도록 지계(地界)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 되었으므로, 신생동은 교외로 간주되어 답동과 함께 주로 일본인들의 묘지로 사용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1906년 이후 일본인들은 이 곳에「동공원(東公園)」(현재의 인천여상 학교내)을 조성하고 일본식 신사(神社)까지 지었을 뿐 아니라 점차적으로 이곳을 개발하여 번화한 일본인 상가 지역으로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1914년 부터는「인천신사」(仁川神社)의 소재지라 하여 궁정(宮町)이라 개칭하였다. 그후 해방이 되자 우리 일본식 동명의 개칭에 따라 새로 생긴 한인촌이라 하여 신생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인천여상과 송도중학교가 있으며, 구 도심으로 건물들이 낡고 발전이 더디되고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