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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강화군의 지명유래

by 형과니 2023. 3. 22.

강화군의 지명유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21:47

 

<<<강화군의 지명유래

 

강화의 옛이름은 갑비고차다. 강화도가 고구려의 영역으로 되면서 군을 설치하여 '혈구'라 하였다.(강도 혈구산남 즉 불은면 삼성리 일대에 혈구군터가 있고 진터가 있었다.) 또 신라 경덕왕 16(757)'해구군'이라 하고 신라 원성왕 때에는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고려 초에 진을 현으로 고쳐 열구현이라 하더니 현종 9(1018)에 이르러 현령을 두었고 감무를 3개현에 두었다.

 

고려 고종이 몽고병란을 피하여 1232년에 들어오니 군을 승격하고 강도 심도라 하였는데 원종 11년에 다시 개성으로 환도케 되고 충렬왕(충렬왕:1274~1308)때엔 인천에 병합하더니 다시 옛 지명으로 되돌려 불리웠다.

우왕 3(1377)에 이르러 비로소 강화라 호칭하고 부사를 두었다.

 

 

강화읍

1413년에 읍으로서 다스려왔는데 서문 밖 국정과 북문 밖 당주의 동을 합쳐 한 면을 조성하고 부내면이라 칭했다. 1914년 읍면 폐합에 따라 장령면 합류시켜 본면에 편입하였다. 이 때의 부락명은 부내면에 12동이며 장령면도 등 12개 동이었다.

1938년에 부내면을 강화면으로 개칭하였고 197371일 강화읍으로 승격하여 지금에 9개리를 관장하고 있다. 우왕(1374~1388)때에 강화라 칭하고 부로 승격시켜 부사를 두었으므로 부내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후 군청소재지가 되어 강화라 호칭한다.

 

궁고을

고려 23대왕 고종은 몽고병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천도하고 개경에서 벼슬아치들이 옮겨와 궁궐을 세우게 하였다. 이 곳이 궁궐이 집중되었던 지역이라 궁고을이라 호칭한다. 주로 고려궁지 하부에 있는 취락이라 보면 타당하다. 궁집은 견자산록에서 고려궁지 주변에는 관사만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여 지금에 구전되어 온다.

 

살창이

1413년이래 부내면에 속하였다가 지금에 살창이라 부르는 부락 명이니 글자를 풀이하면 궁지기 궁소임을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여 보아 이 부락엔 고려천도 이래 궁궐의 동남방에 위치하여 서리, 향리, 영리, 등이 궐외에서 생활하였다고 본다. 이곳은 살창이라 했는데 그 연유는 고려 33대왕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니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는 왕씨의 소생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폐우왕하고 진짜 왕씨를 추대하기로 주장하였다.

 

이성계는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우왕과 아들 창왕을 강화로 방축하였다. 우왕을 강릉으로 옮겨 1390년에 주살하고 창왕은 이곳에서 학살하였는데 나이는 겨우 10세였다. 이곳 살창이엔 그 면혼비가 있었으나 마멸되어 알길이 없다.

 

남산리

강화읍 남산리를 말하는데 선원면 연동 윗 마을이 남산이란 고을이어서 혼동되기 쉬우나 강화읍은 신문리 남산절 밑에 있는 동리를 말한다.

1914년 군읍면 폐합때엔 남산동이라 하였는데 일부는 신문리라 했다. 남산리는 지금 남문밖에서 부조개를 거쳐 선행리 북편 산기슭을 말한다. , 남산이라고 부르는데 고려시대엔 화산이라 칭하여 북산과는 상호 안산하고 있다.

 

선원면

강화읍에서 남쪽에 위치한 첫째 행정 구역이 선원면이다.

조선조 태종13(1413)에 군현 명칭을 개정할 때 선원면으로 불렸는데 1914년 군면 폐합이 된 후 선원면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고려 23대 고종년대엔 몽고군이 수차에 걸쳐 침공하여 권신 최 우의 용단으로 이곳 강화도에 천도하게 되었다. 최 우는 이곳으로 천도하여 선원사를 창건하고 고종을 모시고 향연을 베풀었으니 이 때 준공하였고 집권 17년만에 이 고장에서 사망하였다. 강화도에서 첫째가는 사찰을 세우고 금불상이 500을 헤아렸다고 하였으니 장엄하였다.

 

고려 삼대 사 찰이라 선원 명칭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나 1636년 병자호란에 순절한 충렬사 김상용선생의 만리지가 이곳이었다. 그러므로 그 아호가 선원이었기에 1696년대의 선자로 개정된 것으로서 오늘에 이른다.

 

금월리

이 동리는 1914년 군읍면 폐합 때 대문동 일부와 거말동을 합병한 것이다.

처음엔 '거말리'라 하였고 거말동은 '대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명칭은 큰 마을이란 뜻으로 속칭 금월어지라 불렀는데 금월에 글자를 인용하여 금월리라 하였다 한다.

 

금월리는 이제 선원면에 중심지로 알려지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대문리, 대영촌, 지삼촌, 대촌부락이니 지삼촌은 자고로 세 갈래 길었는데 한편은 동녘마을, 양지마을, 가운데마을로 구분되었으며 뒷산은 칡넝쿨이 많아 갈지산이라 하였는데 속칭 기사미 기새미로 와전되어 있다. 지자에 삼자를 인용하여 지삼촌이 되었으며 대문현은 고려 고종연대의 중성 태안문이 있어 남행 교통로가 되었는데 무너진 연대는 알길이 없다.

 

이정촌

이 마을에 옛부터 내려오는 우물이 있는데 근변에 큰 배나 무가 있었기에 이정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동리를 고식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앞 뚝옆에 부자가 살았는데 이 집에 고씨 할머니가 고수교를 가설하였기 고수리라 했는데 와전되어 고시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불은면

이조 태종 13년에는 인정면과 불은면으로 되어 있었다. 인정면은 삼동암리 근면이니 옛 명칭은 인경리라 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인경리로 부르기도 한다. 그 사유인즉 고려 충렬왕대에 원라 판도합단병이 침입하여 부민을 학살하니 왕은 강화로 난을 피하여 들어왔다. 이 때 평양 유수 정인경이 많은 부민과 함께 이곳으로 자리잡아 기우하였으니 그 아명을 적용하여 인경리라 하였다. 그 후 1413년에 인정면으로 개칭하였다.

 

불은면이라 한 것은 이 면 고능리에 자은사가 있었는데 그 아랫말을 장은말이라 하는데 아직도 법당공이 있다. 이 절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고려 완종115(1270)에 갑자기 못물이 붉은 핏빛으로 변하여 세상에 이변이 있을 것을 예언하는 하는 듯하더니 이해 삼별초의 반란으로 무수한 인명의 손상을 입었다. 그리서 자은사의 ''자를 인용하여 '불은면'으로 하였다.

 

귀동굴

· 고시대 이동리에 능소가 있었다는데 그로 인하여 '귀능극'이라 부르더니 그후는 와전되어 귀둥이라고 불러왔다. 지금은 경주골 부락과 서로 뒤바꾸어 불리고 있는데 능소를 보호하기 위하여 위치를 달리 불리었다고 한다.

 

두두미

고대에 이 부락에 도의만을 숭상하던 군자풍의 인물이 살던 고장이라 하여 두도미라 불러왔는데 이가 와전되어 두두미라 부른다. 한자로는 두두미라 했고 두운리에 있다. 제주고씨 영각공외 후에 명현의 사당 영모사가 자리잡고 있다.

 

길상면

이조 태종13년이래 길상면이라 호칭 해1914년 옛 산문동, 정두동, 정하동 3개동 1부를 양도면에 이속시키고 그 당시 부천군 동검도를 동검리로 하여 합편하고 지금에 6개리를 관장하고 있다. 본면은 정족산, 길상산이라 하는 명산이 있는데 예로부터 길상산 석굴에 영천이 있고 유서 깊은 온수정, 고구려 때의 사찰인 전등사 등 굴리의 명승이 산재하여 있다.

길상산는 진강목장에서 이설한 양마목장이 있었고, 진상하는 쑥이며 감옥 관청의 향탄을 공급하는 등등 명소인 것으로 인하여 아름답게도 행운이 긷들었다는 뜻으로 길상이라 하였다.

 

전등사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을 둘러쌓은 안쪽에 전등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산이 흐르는 곳엔 그윽한 골짜기 간간이 노후된 노송이며 우거진 잡목속에 강이 있어 풍향소리만이 고요를 깨친다.

 

하늘아래 어엿히 선물한 선경인가 할뿐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하도화상이 개산하고 진종사라 불렀다는데서 비롯하였는데 충렬왕비정화공주가 옥등을 시주하였기 전등사라고 개칭하게 되었다. 법화경판 1부를 보존하고 있으며 청동수조와 추녀끝의 나녀상등은 희귀한 점이 있다. 강화 유일의 관광지로 손꼽이고 있는데 일일청담으로 낭만의 비경인가 한다.

 

마귀내

일명 모어천이라고 했다. 왕년에 불은면 신현리와 마그네 부락에서는 목장이 있어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이 하천을 마귀내라 했고 소재 부락명은 마그네라 부른다. 이곳에 등자산이 있어 병인양요 백의종군 의사 홍진사의 거처가 있었다. 당대 명문이었으나 시류의 변천은 막을 길이 없었다.

 

 

화도면

화도면은 강화 최남단에 위치한 섬이니 '고가도라'하였는데 강화도 6대산 중 하나인 마니산을 중심으로 동편, 길상면 선두에 접하였고 북편, 양도면 능내리에 접하고 서편, 삼산리 어류정 남으로는 해변 저 멀리 옹진군 장봉도에 접하고 있다.

 

이조 숙종년대 병술년 서기 1706년에 유수 민진원에 이르러 진강둑과 서두둑이 완축되고서 강화본도와 연속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처음 면명 아래 섬이라 해서 하도면이라 칭하였다. 면형정법정구역은 마니산을 중심주변으로 9개리로 편성되었고 현행정구역은 17개구로 되어 있다. 면사무소는 처음 서기 1913년에 설치집무하였는데 서기 1923년 본면내리로 이전하였고 서기 1937년에 일본인 화도국민학교장인 야마모도의 주선으로 하도면을 화도면으로 개칭하였다.

 

양도면

이조 태종 13년부터는 위량면과 상도면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상도면이 5개동 위량면이 7개동으로 구성되었다. 1914년 읍면을 개편할 때 상도면의 길정, 도장, 조산, 능내, 하일 등의 5개리에 위양면의 건평, 삼흥, 인산 3개리를 합병하여 ''자와과 ''자를 인용하여 명명을 창안하였다.

 

내가면

이조 태종 13년이래 내가면으로 호칭했다. 1914년 위량면 정포동과 외주동이 합성되었고 산곶동이 하점면으로 이관되어 형성되었다. 또 하점면의 삼거동 만원동을 관할하던 외가면과 대조적으로 고려해 하점면으로 호칭하기에 이르다. 5개리를 관장하는데 도서지방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기지 외포리가 있으며 고려저수지가 있어 경관이 두드러진다.

 

하점면

이조 태종13년에 각 시군읍의 명칭을 개혁하였을 때는 하음면과 간점면으로 구분하였다. 1914년에 외가면 일부를편입시켜 하점면으로 편성하였는데 지금의 8개리를 관장하고 있다.

 

과거 내가면 소속이던 산곶동과 외가면 소란 망월동이 하점면으로 이속되어 장기간 존속되었는데 1983년 양오리는 송해면으로 편입시켰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써 ''자와 ''자를 합쳐 면명을 설정하였다.

 

본면은 광대한 망월평을 강도 6대산의 하나인 고려산이 북서방으로 포옹하고 있어 별립산과 봉천산을 마주하였고, 외포리 교통망이 좌우로 갈라져 왕복하고 있어 문화의 혜택을 만끽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청동기 시대의 거대한 지석묘가 있는가 하면 고려시대 하음봉씨 시조탄생의 유적지로서 봉천대와 석상각이 있으며 연개소문의 훈련기지가 있고, 오색연꽃을 날려 떨어진 곳에 백련사가 고요를 자랑하고 있다.

 

교동면

교동현은 본시 '대운도'이라 하였다. 또는 '고림' '달을신'이라 하더니 고구려 때에 비로소 '고목근현'이라 했다. 그러나 신라 교동현에서 조선 태조 4(1395)에는 진을 두어 교동진이라 하였으며 다시 승격시켜 현이라 했다. 또한 인조 7(1629)에는 부로 승격시키더니 고종 32(1895)에 강화로 통합하여 다시금 군을 설치하였다가 이제는 강화에 합병시켰다.

 

서도면

1930년 편제 강도지에 의하면 '고래도 서해열도에 위치하여 면리 폐합시 비로소 면리명을 얻은 것이다'라고 기술되었는데 지금 서도면은 4개리를 관장하고 있는데 서해에 있는 섬이라 서도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곳에 1907년 지방유지 박웅세선생이 교회 지하에 영생학교를 창설하여 여자부를 병설하고 육영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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