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노와 인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3 19:43:24
소서노와 인천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이 성 구
그동안 ‘소서노’라는 이름은 생소하여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요즈음 역사드라마 ‘주몽’이 방영되고 서점가에는 ‘소설 소서노’가 나오면서 ‘소서노’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서노가 우리 인천과 관계가 깊은 역사적인 인물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소서노’를 알게 된 것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1931년)‘에서 처음 소서노를 「조선의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제왕일 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이」로 밝혔기 때문에 2000여년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던 ‘소서노’가 살아난 것이다. 이제 ‘소서노’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위대한 여성 지도자로 부상되고 있다.
‘2005년도 제9회 세계 여성학 대회’가 이화여대에서 개최되고 대회에 참석했던 여성 지도자들이 충북 생극에 위치하고 있는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에서 소서노 석상 제막식을 가짐으로서 ‘소서노’는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창업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여성 지도자로 부활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서노’를 인천역사를 연 始母로 모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오랫동안 온조 중심의 백제사에 묻혀 있던 비류전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비류와 함께 소서노가 부활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전의 서문에 나오는 ‘시조, 비류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미 2000여년전에 비류가 온조와 어머니(소서노)를 모시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정착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백제분기의 온조전의 원문 일부)
온조전 .............. 沸流不聽, 分期民 歸彌鄒忽以居
비류천 .............. 沸流謂第溫祚曰............不如奉母民
南遊卜地別立國都.........渡浿帶二水
至彌鄒忽
至以居
그러므로 소서노와 비류는 우리인천의 역사를 연 시조로 우리가 모셔야 할 자랑스러운 조상의 뿌리라 생각된다.
또 한편 우리는 옛 지명을 통해 소서노와 인천의 관계를 밝혀 볼 수 있다.
고구려시대 인천지명을 買召忽, 또는 買召縣이라 불렸는데 그 지명을 召西奴와 관련된 지명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買召’를 ‘소서노가 산 땅’ 소서노가 주인인 땅으로 해석한다(차옥덕 소서노기념사업회).
또한 주석 조선상고사(이만열)에 의하면 ‘소서노가 마한 왕으로부터 서북백리 땅을 사서 미추홀과 하북 위례홀을 얻어 소서노가 국호를 백제라 하더라’ 라고 했다.
이와같이 지명을 통해 우리는 ‘소서노’가 옛 인천의 주인이었음을 알 수 있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소서노’는 누구인가?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 연타발의 둘째 딸이다. 그녀는 첫 남편 우태에게 시집가 비류와 온조를 얻었으나 우태의 사망으로 부여로 돌아와 살았다. 그 후 주몽을 만나 재혼하고 주몽을 도와 고구려 나라를 창업하는데 힘을 기울여 그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예씨의 아들 유류(유리)가 주몽을 찾아왔고 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대를 잇게 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대방고지에 백제나라를 세웠다.(원백제...비류백제) 그러나 낙랑군의 반발로 다시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자리를 잡았으나 이번에는 온조가 비류와 갈라서서 하남 위례성에 ‘십제’라는 나라를 세웠다.
온조전에 보면 ‘소서노는 여러가지 고민 끝에 온조 13년 2월 남장을 하고 비류의 부하를 데리고 위례성에 갔다가 온조의 부하들에게 시해를 당해 죽었으니 그의 나이가 61세였다’라고 기록되었다.
<비류전의 가계도>
유화 | - | 해모수 | 졸본부여의 왕 연타발 | 동부여해부루의 서손 | |||||||||||
↓ | ↓ | ||||||||||||||
예씨 | - | 주몽 | - | 소서노 | - | 우태 | |||||||||
↓ | ↓ | ||||||||||||||
유류(유리) | 비류, 온조 |
※ 비류전에서는 「주몽이 비류와 온조를 자기 소생처럼 여겼다」는 기록을 통해 비류와 온조가 우태의 소생임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소서노는 졸본부여왕 연타발의 세 공주중 둘째 딸이다. 남성못지 않은 용기와 지모가 뛰어나 부왕의 큰 기대를 모았다. 그녀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왕후가 되었으나 두 번의 결혼 실패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마저 서로 갈라서는 큰 충격과 좌절을 겪었고, 끝내 두자식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다가 온조의 부하에게 시해 당한 매우 불행한 여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서노는 온갖 수난과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넓은 도량과 포용력으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세계적인 여성 지도자가 되었다.
우리는 소서노를 비류와 함께 2000여년전 인천의 백제 역사를 연 始母로 인천의 역사적인 정체성의 뿌리로 모시는 지혜를 모아야 할 때가 되었다.
'인천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옹진군의 지명유래 (0) | 2023.03.22 |
---|---|
동구의 지명유래 (1) | 2023.03.22 |
미추홀 왕국의 옛 도읍지 문학산 지역 (2) | 2023.03.21 |
월미도 연표로 알아본 인천의 역사 (2) | 2023.03.11 |
조선 건국과 이성계-원통이고개 (0) | 2023.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