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 대 중국 통교의 관문, 능허대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07-09-30 17:07:38
백제시대 대 중국 통교의 관문, 능허대
<전문가 기고 - 김상렬의 인천문화유산 돋보기>
민족의 관문, 인천
우리 민족은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며 반만년의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인천은 특히 신구(新舊)가 격돌하던 시대에는 개항을 통해 민족 근대화의 첨단에 섰고 IMF라는 최근의 금융위기 때에는 인천국제공항과 송도신도시를 건설하며 동북아시아의 허브도시로 발돋움했다. 이처럼 인천은 바다와 연하고 있는 지리적 요인을 적극 활용해왔다.
개항은 일천한 포구였던 인천을 개화의 도시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외세에 의한 강제 개항이라는 부정적 견지에서 인천 능허대를 최초의 개항으로 보고자하는 견해가 개진되기도 한다. 아울러 최첨단 항만과 국제공항을 갖춘 세계의 명품도시로 도약하면서는 고대교통의 정신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능허대’가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다.
복원된 능허대 정자
능허대의 등장
능허대는 백제 근초고왕 27년(372)부터 웅진(공주)으로 남천하는 개로왕 21년(475)까지 100여 년간 중국을 내왕하는 사신들이 머물던 객관(客館)으로 1990년 인천시지정기념물 제8호로 보호되고 있다. 이곳에서 후풍(候風;바람을 기다리는 것)하던 사신이 도호부 서쪽 10리 다소면(多所面)에 위치한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띄워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 도달하였다.
능허대가 백제시대 대 중국 통교의 관문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는 것은 근초고왕대의 일이다. 중국의 진나라와 공식적인 외교대상이었던 백제는 371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킴으로써 고구려와 구수관계에 놓여 육로를 통한 중국과의 통교가 어려워지자 해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 때 이용한 해상교통로가 등주항로(登州航路)였다.
등주항로는 한강 하류역인 인천의 능허대를 출발, 덕물도(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항로다. 인천이 백제사신의 출항지가 된 것은 한산에서 서해로 빠지는 한강 하류역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과 함께 인천은 전통적인 해상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등주항로가 비교적 안전한 항로였다고는 하지만 총 65회의 사행 중 3차례나 중도에 회항하는 등 당시의 조선기술이나 항해술로 비추어볼 때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제는 ‘방(舫)’으로 표현된 대형선박을 이용했고 북위의 선단을 격파할 정도로 비상한 해전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중국과 통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종화의 『문학산』에 실린 능허대의 옛모습
능허대라는 명칭
‘하늘을 높이 날다’라는 능허대의 명칭은 중국의 문헌, 경승지, 그리고 건물 등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능허’라는 명칭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박민의 호가 ‘능허’였이며 장조(사도세자)의 문집도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이다. 건물에 사용한 것은 ‘능허정’이 가장 많다. 1691년 창덕궁에 건립된 것을 비롯, 삼척 등 각지의 정자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울진현에 ‘능허루’, 보령현에 ‘능허관’, 진주목에 ‘능허당’ 등이 있었으며 ‘능허대’라는 명칭은 황해도 해주, 강원도 울진과 고성에도 있었다. 이렇듯 ‘능허’라는 명칭은 ‘허공을 가른다’, ‘승천하다’, ‘비상하다’ 등의 뜻을 가진 길상어로 관용화된 표현이었으며 중국과 조선시대에 보편화되어 해변의 절경지에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본인들이 간행한 ‘인천부사’에는 ‘능호대(凌壺臺)’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어 발음에서 온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능허대에 대한 오해
능허대에 대해 시민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오해는 발선처(發船處)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능허대는 백제의 사신들이 배를 타고 출항하던 포구가 아니라 그들이 후풍하며 머물던 객관이었다. ‘여지도서’에는 “대진(大津)은 부서 십리 다소면(多所面)에 있으며…중국으로 들어가는 사신이 이곳에서 배를 띄워 산동반도의 등주·래주에 도달하였다.…능허대가 부서 10리 원우미면(또는 원우금면)에 있는데 청량산 여록이 해변으로 들어가 100척의 높이로 가파르게 솟아 있고 위에는 30여 명이 앉을 만하며 대양을 바라보매 막힘이 없었다.”고 했다.
대진과 능허대가 각각 다소면과 원우미면에 소속되어 조금 떨어져 있는 것으로 표현돼 있다. ‘가는 벼랑으로 나 있는 오솔길, 넓은 모래벌에 끊어진 언덕’이라 표현한 탄옹의 시구에서도 알 수 있듯 능허대는 해안 섬처럼 솟아있는 전망대 구실을 한 곳이고 중국으로 향하던 선박의 발선처는 대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옛 사모지고개 모습
능허대에서 기인한 지명
대 중국 사행로에 오르는 백제의 사신들은 서울에서 경인국도를 따라 오다가 지금의 장수인터체인지 부근의 고개를 넘어 인천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가족과 이별의 정을 나누고 헤어지기 때문에 ‘별리고개’라고 한다. 사신들은 별리고개를 넘어 문학산의 고개(현 문학터널 위)를 넘어 능허대로 이동하였는데, 이 때 뒤돌아보니 아직도 가족들이 별리고개에 남아있는 것을 보고 잘 있으라고 세 번 불렀다고 하여 이 고개를 ‘사모지고개’라 한다.
별리고개와 사모지고개는 바로 가족과 이별의 정이 어린 지명이다. 이와 달리 백제의 사신과 기생과의 애틋한 사랑을 전하는 기암전설도 있다. 앞의 책에는 “대진은 백제가 조천할 때의 출선처이다. 그 밑에 기암이 있다. 전하기를 백제사신이 기녀를 데리고 와서 후풍하다가 막상 배에 오르던 날 원별(遠別)의 정을 이기지 못한 기녀가 바위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후인들이 그 바위를 기암이라 하였다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 필자는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운영위원, 인하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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