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백화점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11-14 15:20:41
신세계 백화점
미추홀
인천의 전설적인 부자에 강화 출신의 반복창(潘福昌)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14세 때 국내 최초의 증권 회사 격인 인천미두취인소의 한 중매점에 세칭 '요비코(呼子ㆍ미두 시세를 전달하는 아이)'로 들어가 후에 '미두왕(米豆王)'이라 불린 인물이다.
1920년의 미두취인소는 그의 독무대였다. 한 달 봉급이 40~50원 하던 시절, 거금 40만원을 거머쥔 백만장자가 되었고, 경인선 열차를 전세 내 서울서 신여성과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 직후 네 칸짜리 움막 신세로 전락했고, 서른에 중풍을 맞아 불구의 몸으로 미두장을 헤매다가 1939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시대의 또다른 인천 부자로 회자되는 인물에 이규옥(李珪鈺)이 있다. 그는 1920년 내동에 포목점을 차려 큰돈을 벌었다. 이어 석유 대리점과 금전 대부업에도 진출해 1931년의 영업세 납부 실적이 687원에 달했는데 이는 조선인 중 최고의 액수였다. 당시 대부분의 부자들이 재산을 지키기 위해 친일 쪽에 기우러져 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인천식산사(仁川殖産社)의 일원으로서 '조선물산장려운동' 등에 주도적으로 나서서 '큰 부자'로 존경을 받았다. 평생 일경에게 고초를 겪었음은 물론이다.
부자도 부자 나름이다. 반복창 같이 반짝 영화를 누리다가 이슬처럼 사라진 '졸부'가 있는가 하면, 이규옥처럼 남과 함께 부를 나눌 줄 알았던 사표적인 '큰 부자'도 있다. 개인의 부(富)도 그렇거늘, 항차 재벌이라면 사회적 책무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연간 1천억원의 이윤을 내는 신세계 인천점이 마지못해 그 0.6%만을 지역 사회에 환원했다는 본보의 보도가 있었다. 배신감을 느낀 고객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오늘, 자기 부의 축척에만 골몰하는 '반복창'에게 손을 들어줄 인천 시민은 아무도 없다.
/조우성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