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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안녕 숭의경기장

by 형과니 2023. 4. 19.

안녕 숭의경기장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7-12-08 13:23:56


안녕 숭의경기장


한때 도원 원두라 불리던 숭의경기장의 소재지는 도원동인가, 숭의동인가. 지도를 펴보면 가리기가 난감하게 되어 있다. 동의 경계선이 야구장과 축구장을 갈라놓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축구장의 서북쪽으로 일부는 도원동에 들어 있다. 당초 경기장이 이곳 경계선상에 자리잡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지만, 70년을 넘게 지나오면서 그것을 여지껏 정리 못했는지 딱하다. 당장 불편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무튼 그 경기장이 마침내 75년의 생에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동안 지역 침체가 운동장으로 인해서라며 몰아붙이더니, 재개발이 추진되고 내년 철거를 앞두고 지난달 29일 마지막 경기가 있었다. 인천시내 각급 학교 야구부 감독과 야구협회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진 친선대회였다고 한다. 이름조차 ‘납회’였다. 납회란 한해의 마지막 모임이라는 뜻인데 증권시장이나 낚시대회에서도 쓰이는 용어이다. 이 자리에 경기장이 들어서게 된 것은 1934년이었다. 그때까지는 인천시 인구 5만명이던 시절 1920년대 웃터골에 있었다. 지금의 제물포고교 자리였다. 이곳은 인천 스포츠의 발상지였다. 언론인 고일 선생이 그의 ‘인천석금’에서 아예 ‘인천청년의 발상지’라고 못박았었다. 전설적인 엄복동의 사이클도, 전통의 인천야구도, 육상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한인 청년의 스포츠를 반일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일제는 그곳에 자기네 중학교를 세우고 경기장은 도원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형태만 경기장이었을 뿐 겨우 야구장과 축구장의 스탠드는 토성이었다. 야구장 시멘트 본부석은 그 시절에도 날림공사였던지 거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나마 축구장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오랫동안 방치했던 경기장이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64년 제45회 전국체육대회가 인천에서 열림으로서였다.


낙후지역의 재개발은 시대의 추세이다. 그곳에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서고 자연친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야구박물관을 겸하여 건립한다면 이곳이 인천야구의 요람이었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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