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음악인 김흥산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16 11:15:23
한국 최초 농아악단 설립한 인천음악인 김흥산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김흥산(金興山)이 인천에서 활동한 음악인이라는 기록은 역시 『인천시사』에 근거한다. 기록은 추후 더 발견될지 모르나 이제 지난날 그의 활동이나 행적에 대해 증언할 사람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혀 체계를 잡을 수 없는, 불과 몇 가지 산발적인 자료들일 뿐이다. 하기는 『인천시사』에 남은 한 줄 기록이나마 없었다면 그가 인천에 연고(그것이 아주 잠시였는지는 모르지만)를 두었었다는 사실조차도 그냥 묻혀 버렸을지 모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인천에서 음악 활동이 교회 이외의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훨씬 뒤인 1920년 전후의 일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수한 한국 최초의 양악인 박흥성(朴興成)은 1923년 신포동에 있던 표관(瓢館)극장에서 10여 년 동안 무성영화 시대에 영화를 이끌어 가는 변사(辯士)와 함께 음악을 편곡·연주하였으며, 후배도 양성하였는데 그 중에는 <한국농아악단(韓國聾兒樂團)>의 창설자인 김흥산(金興山)과 작곡가 김기현(金基鉉) 등이 있다.”
이것이 우리 시사에 나타나 있는 김흥산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이 기록으로 보면 그가 충분히 인천 양악(洋樂)의 초기 개척자의 위치에 설 만하고, 더구나 한국 최초로 농아악단을 창설했던 인물이란 점에서 이름 석 자가 아닌, 의당 그의 출생이나 가계, 거주 상황, 행적, 활동 등에 대해 최소 기본적인 추적이라도 있었어야 했다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제 인천 인물편의 이런 ‘공란(空欄)’들은 후학들이 연구와 노력으로 메울 수밖에 없을 듯하다.
김흥산은 특히 재즈 연주가로서 당시 크게 이름을 날렸던 것 같다. 동아일보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1938년 4월 21일자 동아일보는 학예부 주최로 '大衆演藝大會(대중연예대회)'를 개최한다. 한 면 전체에 실린 이 연예대회는 당시 유명 연예인이 총 망라된 대대적인 엔터테인먼트로서 “滿都(만도)의 人氣(인기) 爆發點(폭발점)에” 이르렀다는 제목으로 “夭艶(요념)의 彩色舞臺(채색무대) 우에 花形歌手(화형가수)들의 交響樂(교향악), 明夜(명야)에 開演(개연)될 歌謠祭(가요제)”와 “鄕土舞踊(향토무용)과 現代舞踊(현대무용)의 燎亂(요란)한 꽃밭「오케」·藏舞踊(장무용)의 公開(공개)” 그리고 “「째스」의 獅子座(사자좌)「C.M.C」藝術家群像(예술가군상)”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이「C.M.C」예술가 군상은 “安熙善(안희선), 尹學氣(윤학기), 嚴載桂(엄재계), 玄景燮(현경섭), 池芳烈(지방렬), 李有聖(이유성), 金用浩(김용호), 姜三俊(강삼준), 朴是春(박시춘), 金興山(김흥산), 柳淵(유연), 李鳳用(이봉용), 孫牧人(손목인)” 등으로 여기에 김흥산은 더블 베이스 연주자로 참가한다. 출연자들 기사 밑에 동아일보가 스케치한 김흥산의 프로필을 보면 “藝術家(예술가)로서는 완고한 타입. 餘技(여기)로서는 바이오린, 전기 끼-타, 漢陽人(한양인) 사나히, 三十(삼십)세”라고 되어 있어, 그가 서울 태생이라는 것과 그의 출생 연도가 적어도 1908년이나 혹은 9년이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당시는 보통 한국식 나이 셈법이었을 테니까 아무래도 1909년이 옳을 듯 싶다.
이처럼 김흥산이 내로라하는 유명 재즈 연주가가 되기 전, 『인천시사』의 기록대로 라면 김흥산은 박흥성이 “1923년 신포동에 있던 표관(瓢館)극장에서 10여 년 동안 음악을 편곡·연주하고 후배도 양성”할 당시의 문하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울 출생 김흥산이 어떻게 인천에 내려 왔으며 박흥성과는 무슨 인연으로 음악 교습을 받을 수 있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김흥산이 음악 교습을 받기 위해 인천에 왔건, 혹은 인천에 왔다가 우연히 그 길에 들어섰건, 결국 인천에서의 음악 수업이 그를 한국 유수의 재즈 연주자로 키운 것만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김흥산이 인천에서 펼친 연주 활동에 대한 기록이 현재로서는 전무하지만, 이 인천 시절 이후 그는 다시 서울을 근거지로 연예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동아일보의 “大衆演藝大會” 그리고 그가 악장으로 활약했던 서울의 악극단에 관련한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도 자연히 인천 쪽에는 그에 관한 일화나 기사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김흥산은 1940~1950년대 한창 대중의 인기를 끌던 <나미라악극단>의 악장으로서도 이름을 날린다. 이 극단은 1941년에 <콜롬비아악극단>으로 창설되어 이어 11월에 <나미라악극단>으로 개칭되었는데 “당시 이름 있던 콜롬비아레코드회사가 일류 가수를 발굴할 목적으로 둔 전속 경음악극단으로, 가수와 연기자 및 무희들을 등장시켜 서울 부민관 등 대극장을 주요 무대로 공연하였으며, 지방 순회공연도 가”지던 악극단이었다. 1942년에는 일본의 도쿄·오사카 등을 비롯한 일본 주요 도시를 순회 공연했던 것으로도 명성이 나 있다.
참고로 당시 주요 단원의 명단을 보면 “연출자 서항석(徐恒錫)을 비롯하여, 작곡에 안기영(安基永), 악장에 김흥산(金興山), 가수·연기에 송진혁(宋鎭赫), 윤부길(尹富吉), 박옥초(朴玉草), 임천수(林千壽), 계수남(桂壽男), 전옥(全玉), 장동휘(張東輝), 김용환(金龍煥), 박용구(朴容九) 등이 활약”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극단은 광복 이후 주로 서울 동양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1950년대 후반부터 영화 붐이 일어나면서 쇠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가 편곡한 「아리랑」에 관한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6·25 사변 때 인천상륙작전을 승전으로 이끈 주력 부대인 미 7사단 사단장에게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기념품으로 ‘전선에서 대인민군 심리전 선무곡(宣撫曲)’으로 쓰였던 「아리랑」의 악보와 가사를 선물했다는 것이다. 그 후 ‘1956년 김흥산이 「아리랑」을 행진곡풍으로 편곡했는데 이 악보가 W. 켈러웨이 사단장에게 전달돼 미 7사단의 정식 군가로 채택되고, 이는 다시 사단가인 「대검가(大劍歌)」를 아리랑 곡조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김흥산은 1957년 서두에 소개한 <한국농아연주단>을 창설하기도 한다. 농아인들을 훈련시켜 실로폰, 기타, 피아노, 첼로 등을 연주하게 했는데 국내는 물론 일본, 캐나다에까지도 가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진명여고 밴드부 교사인 김홍산이 국립맹아학교에서 농학생에게 악기를 가르쳤다.”고도 하는데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없고, 무슨 일이었는지 '1970년 김홍산 단장의 횡포에 단원들이 반발하여 해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1964년 11월, 농아학교 연주단장 김흥산에게 그해 소파상(小波賞)이 수여된다. 소파상은 1956년 윤석중에 의해 창립된 새싹회가 1957년부터 매년 소파 방정환(方定煥)을 기리어 제정했던 상이다.
인천이 기른 한국 초창기 재즈 연주가 김흥산. 그의 공과(功過)가 어떠하든 많은 연구자들이 나와서 인천 예술인으로서 그의 행로를 찾아 적는 것이 결코 의미 적은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그것이 곧 ‘인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