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장동휘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16 11:16:43
돌아오지 않는 해병” 장동휘
김윤식/시인·인천문협회장
▲ 장동휘
인천 출신이면서 인천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듯이 평생을 산 사람들이 많은데 배우 장동휘(張東暉, 1919~2005)도 그런 인물 중에 하나다. 특히 문화 예술인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아, 인천에서 출생했거나 활동했던 이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영화배우만 해도 앞에 소개했던 황정순, 도금봉이 그렇다.
인천이라는 지역이 인구를 ‘수렴하고 발산’하는, 그러니까 흔히 토박이라고 말하는 토착 인구는 별로 없이 대부분 잡다한 지역의 혼합 인구가 유입되었다가 다시 떠나고 하는 그런 특성 때문일까. 예수마저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못 받았다고 하지만, 특히 인천에서는 내 고장 출신에 대해 그런 면이 더 강했던 것일까.
설령 그것이 세상사요 인심이라고 해도, 누차 지적하는 바지만 공식적인 우리 『인천시사』, 우리 ‘인천 영화사’에 역시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전체 기록 자체도 그 양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인천출신 유명 영화인들이 모조리 빠져 있어 소활(疏闊)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그들의 이름 석 자라도 인천사에 기록하는 것이 약소하지만 대접하는 것이고 인천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게 하는 일이다. 무슨 행사를 유치하고 무슨 대회를 열어 인천, 인천을 외치는 것도 중요하나 이런 인천 인물 하나를 더 찾아내 기록하는 것이 말 그대로 인천의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미있는 일일 터이다.
이야기가 많이 옆으로 갔다. 장동휘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도록 한국의 대표적인 액션배우로 명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주인공으로 기억된다. 그는 인천 태생이다. 그의 가계(家系)라든지, 인천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학업 시절의 기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으나, 몇몇 기록에는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천상업학교라면 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일 것인데, 이 또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장동휘가 인천 태생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역시 1959년 당시 인천에서 발행되던 <경인일보> 6월 16일자 ‘사고(社告)’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내용인즉 7월 4~5일 양일간 인천시민관에서 ‘제1회 인천 출신 영화인 귀향 예술제’를 개최한다는 것으로, 앞선 황정순, 도금봉 편에서도 이미 인용한 바 있는데, ‘인천(제물포)에서 태어난 한국 예술계의 톱스타를 총 망라한 귀향 예술제’에 출연하는 ‘귀향 배우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가 영화배우의 길을 걷게 된 행로 역시 자세하지 않다. 어느 기록에는 ‘1938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에 있던 악극단 <칠성좌>에서 연기 활동을 시작하여 광복 후에는 악극단 <낙천지>의 멤버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그가 작고한 뒤 그의 주변을 취재한 듯한 기록에는, ‘1936년 고교를 졸업한 이후 1939년 악극단 <콜롬비아>에 몸담으면서 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후 ‘6·25 동란 때 예술단으로 종군, 국군 위문 활동을 벌이며 장병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는 다소 상이한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뚜렷이 밝혀 낼 단서가 없다.
장동휘가 영화에 데뷔한 것은 나이 38세인 1957년으로 김소동(金蘇東)이 감독한 「아리랑」에 첫 출연하면서였다. 그 후 그는 성격배우, 액션배우로서 연기력를 보이며 1960년대 초반부터 10여 년간 박노식(朴魯植), 허장강(許長江), 황해(黃海), 독고성(獨孤星) 등과 함께 한국 액션 영화의 황금기를 이끈다.
▲ 장동휘 아리랑
그가 출연한 주요 인기 영화를 살펴보면 「두만강아 잘 있거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순교자」 등을 시발로 1960년대 말에는 「팔도사나이」 「돌아온 팔도사나이」 등의 ‘팔도 시리즈’와 「명동 노신사」 「명동 백작」 「비 내리는 명동거리」 등 ‘명동 시리즈’가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돌아가는 삼각지」 「용서받지 못할 자」 「창공에 산다」 같은 영화에 출연해 액션배우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는다.
장동휘는 총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청룡영화상 특별상, 대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을 수상한다. 만년의 작품 「만무방」으로 춘사영화예술상 남우주연상,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영화계의 남긴 공로로 유공영화인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일설에는 ‘인천의 유명한 장사’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말 그대로 건장한 체격과 독특한 마스크, 특유의 너털웃음, 상대를 압도하는 눈초리,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로 그만의 카리스마를 창출했는데, 그 때문에 주로 전쟁 영화와 범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아 통쾌한 액션을 연기함으로써 남성미 물씬 풍기는 한국 최고의 액션 스타 1세대로 이름을 날렸던 것이다.
평생 단 한 번도 TV 출연을 하지 않은 것이나 나이트클럽 출연 자제 등 외고집 영화 인생을 산 장동휘. 그는 그의 외모만큼, 또 연기 스타일만큼 진정 선 굵은 영화인으로 세인의 가슴 속에 추억된다.
‘1969년 TV가 본격 등장해 영화 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영화계를 떠나지 않고 현장을 지켰으며, 부도가 난 영화사의 영화에 무료로 출연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고 특히 ‘동료의 빚을 떠안아 20년간 대신 갚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의리가 깊었다고 한다. ‘영화사가 어려움에 처하면 출연료를 받지 않기로도 유명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그는 생전에 영화배우협회장,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안산지부장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영화 예술 발전과 함께 열악한 환경에 있는 배우들의 권익 보호 장치를 마련하기도 했다. 평생 의리 존중을 생활 신조로 삼아 모범적인 삶을 살면서 후배 영화인들을 따뜻하게 보살핀 보스 기질의 사나이, 장동휘. 그는 분명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95년 「엄마와 별과 말미잘」이란 작품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 이후에는 참전예술인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원로 영화 배우들과 교분을 나누었다고 한다. 2005년 작고할 때까지 충북 청주에서 만년을 지낸 듯한데, 아무래도 우리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 인천과 거리가 점점 멀어졌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