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은둔화가 박응창

by 형과니 2023. 4. 26.

은둔화가 박응창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5-16 11:19:03

 

오소회(五素會)와 은둔화가 박응창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박응창(朴應昌)1908년 개성에서 출생했다. 늘 반복하는 이야기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인천 이주에 관해서도 정확한 시기나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다. 해방 전후 정치, 사회적 요인에 의해 많은 황해도 인구가 인천에 유입되던 그런 측면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은둔화가 박응창에 대한 기록은 인천시사에 나타나 있는 일부와 당시 인천에서 함께 활동하던 한두 사람의 화가, 미술평론가의 회상기 속에 언뜻 이름이 비치는 정도가 전부다. 그의 작품 역시도 선전도록이든, 혹은 한두 점이나마 어딘가에 소장되어 있을 법한 데 알 길이 없다. 그러니 더욱 그의 화풍이 어떠했다거나 추구하던 미술 세계가 어떤 것이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1922년 발족된 선전(鮮展)’ 초기의 공모전에 응모하여 입선한 인천에 거주하는 화가들의 면면은 일인들로 충당되고 있다. 1936년 이후에 와서야 한국인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여기 참여했던 화가는 이무영(李茂榮), 김영건(金永健), 박응창, 최석재(崔錫在), 김진태(金晉泰) 등이다. 서양화의 기법이 이 땅에 처음 도입된 시기는 1910년대 초였으므로 그로부터 30년간의 준비기를 두고 인천에도 그 수확이 거두어진 셈이다. 그것도 일본을 통한 우회 도입이었고 1930년대1940년대 사이에 일본 동경에서 미술을 전공한 유학생 출신이 주축이 되었다.”

 다소 표현이 부정확한 듯하지만 이 인천시사의 기록은 그가 선전 출신 화가라는 사실과 1930년대 후반 이후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오소회

 

 오소회의 창립 멤버 가운데서 가장 연장자에 속하는 사람이 서양화가인 박응창이다. 그는 동경으로 건너가(1928~33)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도입기의 서양 화단에서 활동한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그는 1940년 제16회 선전부터 시작하여 네 차례나 입선한 경력을 가졌다.”

 이 기록은 오소회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인 박응창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인데 두 가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가 일본 유학파라는 것과 선전에 입선한 경력이 있다는 것. 그러나 이에 앞서 실제 그는 고향 개성에서 이 이전에 이미 화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동아일보 1926826일자 개성(開城)발 기사는 지우회(志友會) 주최 본보 개성지국 후원으로 819~20일 양일에 당지 중앙회관에서 지우회 회원 박응창 군 개인의 그림 전람회를 개최한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는 계속해 다음과 같이 박응창의 전람회를 극찬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서도 벌써부터 그는 화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람회는 예정대로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양일간 개최되었었는데 출품 점수는 모두 29점으로 모두 사람 눈을 이끌기를 마지아니하는 훌륭한 작품이었으며 양일간의 입장자는 3500여 명에 달하여 미증유(未曾有)의 대성황을 이루었었는데 모든 관람자는 박 군의 사계(斯界)의 특별한 천재(天才)가 있음을 상찬(賞讚)한다더라.”

 이후 박응창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은 1945818일에 있은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朝鮮文化建設中央協議會)’ 결성과 관련해서다. 이 협의회는 새로운 우리 정부가 탄생되어 문화 예술의 새 정책을 세울 때까지 현 단계의 문화 전체에 관한 통일적 연락과 각 부문 활동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조직된 것으로 박응창은 여기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朝鮮美術建設本部)’ 회원으로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박응창은 최초의 인천 화단(畵壇)을 형성하는 미술 동인회를 결성한다. 그것을 밝힌 인천시사의 내용이다.

 

 

박응창커트

 

 광복 이듬해인 194612월 최초의 순수 미술인 단체로 인천미술인 동인회라는 그룹이 탄생되었다. 세루팡이라는 다방에서 모임을 가진 창립 동인은 이건영(李建英), 최석재(崔錫在), 김순배(金舜培), 김찬희(金燦熙) 등이며 임직순(任直淳), 김기택(金基澤) 등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는 별도로 인천미술인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 회원은 서양화에 박응창·김학수(金學洙우문국(禹文國김찬희·이명구(李明久윤기영(尹岐泳한봉덕(韓奉德), 서예에 류희강(柳熙綱박세림(朴世霖장인식(張仁植), 미술평론에 이경성(李慶成) 등이다. 해방 후 인천 화단을 형성하는 모체로서 이들 단체가 출범하기는 했으나 전쟁으로 모든 것이 와해되는 실정이었다.”

 이밖에도 박응창은 1952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산하 단체로서 대한미술협회 인천지부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가해 김영건, 윤기영, 최석재, 박흥만(朴興萬), 장선백(張善栢), 류희강, 박세림, 장인식, 이경성 등과 회원전을 갖기도 한다.

 

 앞에서 잠깐 비췄지만 그가 참여했던 미술 동호인 그룹 오소회는 인천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단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대해서는 역시 인천시사가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의 대부분은 오소회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인 미술평론가 이경성 씨 자신과, 더불어 이들과 많은 교유를 가졌던 미술평론가 김인환 양 씨에 의해서 증언된 것이기도 하다.

 

 오소회의 출발은 이색적이고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50대 중반 연령의 동호인 모임이라는 점, 현역 전업 작가는 물론 대학 교수와 현직 인천시장이 참여했다는 점, 회화(동양화·서양화)와 서예, 그리고 평론가의 그림까지 곁들인 오소회는 문화계 인사들의 집합 장소이기도 했던 은성다방에서 모임이 추진되었다. 전시장도 같은 장소를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1969년 제1회전에서 1978년의 8회전까지 비교적 오랜 수명을 누린 그룹이 되었다. 도중에 회원 교체도 있었는데 창립 회원은 서양화의 박응창·김영건·우문국 등이며, 여기에 아마추어 화가로서 윤갑로(尹甲老·당시 인천시장), 이경성(홍익대 교수/평론) 등도 가세하고 있다. 2회전 이후 류희강, 장인식, 정재흥(鄭載興·서예), 오석환(吳錫煥·동양화), 황병식(黃秉植·서양화) 등이 신입 회원으로 출품하였다.”

 오소회가 인천 미술계, 혹은 인천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의 하나는 당시 많은 수의 화가들이 서울로 진출하는 가운데서도 이들은 끝내 지역에 남아 활동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런 소명 의식 속에서 오소회를 창립했고, 서울에 종속하는 미술이 아닌 독자적인 인천 미술 문화를 정립하고자 고심했던 것이다.

 

 단체 자체는 나를 비롯해서 윤갑로 등 아마추어가 섞여 있었고, 서예가 및 화가 등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뚜렷한 조형적인 발언은 못했다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의미 있는 단체였던 것이다.”라는 이경성의 회고가 그야말로 의미 있게들리는 것이다.

 

 박응창에 대한 것으로 오소회를 창립할 당시 남인천여상미술교사였다는 짧은 기록이 보이고 장인식 지부장과 함께 1964년 미술협회 경기도지부 제3대 부지부장으로 1년간 미협을 이끌었던 기록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간적인 이야기나 예술론에 대해서는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뒤에 오는 전문 학자들이 이 부분을 채워서 인천 예술사의 온기(溫氣)를 회복시키기를 바란다.

 

 과욕을 모르던 이 은둔 화가는 오로지 仁川 지역에만 칩거하면서 조용히 작품 생활에만 일관하여 왔다는 오소회 맏형 박응창에 대한 기록이 그래서 더 우리의 책무를 일깨우는 듯하다.

'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배우 서일성(徐一星)  (1) 2023.04.26
무대미술의 개척자, 원우전  (2) 2023.04.26
최병구 시인  (0) 2023.04.26
영화배우 장동휘  (0) 2023.04.25
인천음악인 김흥산  (0) 2023.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