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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무대미술의 개척자, 원우전

by 형과니 2023. 4. 26.

무대미술의 개척자, 원우전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5-16 11:20:07

 

토월회와 칠면구락부와 무대미술의 개척자, 원우전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토월회 기사 사진

 

 진우촌(秦雨村)이나 원우전(元雨田)이나 다 같이 인천 연극의 할아버지임에 틀림없다. 인천뿐이 아니라 우리나라 연극사에서도 내로라 할 만한 인물들인데 세상에서의 그들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쓸쓸하다. 언젠가 이 자리에서 진우촌이 답답하리만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탄한 바 있는데, 원우전은 그보다 더 하면 했지 조금도 나을 바가 없다.

 

 물론 무대미술가였으니까 감독이나 배우처럼 전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한국 연극에서 배경화(背景畵) 정도에 머물러 있던 당시 무대 장치의 수준을 사실적, 입체적으로 끌어올렸다는 이 선구적 예술가에 대해 우리 모두가 실상 너무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다. 인천이 배출한 문화 예술인의 숫자나 수준 어느 하나 다른 곳에 비해 처질 것이 없는데 어째서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일까.

 인천 연극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311<혁신단>이 협률사(현 애관극장)에서 육혈포강도를 공연한 것이 효시이다. 이후 극작가 진우촌, 함세덕, 연기자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 등이 1926년에 <칠면구락부>를 창단하여 춘향전」 「눈물의 빛등을 애관과 가부기좌에서 공연하였다.”

 인천의 극 연구와 공연 단체로서 특기할 만한 것은 <칠면구락부>의 출현이다. 그 부원은 비록 몇몇 동호인이었으나, 인천 연극 운동에 끼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토월회의 무대 장치가 원우전, 노련한 영화배우이자 연출자인 정암, 극작가 진우촌과 그 외 임창복, 임영균, 한형택, 김도인, 필자 등이 간부진이었다. <칠면구락부>가 조직되기 전의 인천 연극 운동은 자연 발생적이었다. 별다른 목적의식이 없이 이따금 청년들에 의해 공연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앞의 인용문은 인천시사의 기록이고, 뒤의 것은 고일(高逸)이 쓴 인천석금<칠면구락부>에 관한 설명이다. 인천 최초의 연극단체인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의 창단과 그들 멤버의 등장을 기술한 이 두 기록에 따르면 인천의 연극은 <칠면구락부>의 창설과 함께 태동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중심에 원우전(元雨田)이 서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인천 사람이 아닌 원우전이 어떤 연유로 이 칠면구락부 활동에 동참하게 되었을까. 더구나 인천에서 활동하기에는 그는 이미 <토월회(土月會)>를 통해 무대 미술가로 상당히 자리를 굳히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바로 이 <토월회>의 해체가 그의 인천에서의 활동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독립운동사는 토월회가 1922년 일보 도쿄(東京) 유학생들에 의해 발족한 극단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19235월 경, 당시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던 박승희(朴勝喜김복진(金復鎭김기진(金基鎭이서구(李瑞求박승목(朴勝木김을한(金乙漢이제창(李濟昶) 등이 시작한 모임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실제 공연은 19237월이었다. 그해 81일자 발간 개벽은 이렇게 그들의 첫 공연을 적고 있다.

 

 “192374일 동경에 잇는 학생으로 조직된 토월회 제1회 공연극이 서울 조선극장에 열니엿섯다.”

 첫 공연은 무대장치와 등장인물의 조화가 매우 교묘하여 식자의 칭찬이 많았다는 동아일보의 보도처럼 사실적인 연기와 무대미술이 크게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원우전은 이 첫 공연까지는 아직 토월회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9월에 있을 두 번째 공연을 대비해 무대미술팀을 보강할 때, 이승만(李承萬), 윤상렬(尹相烈) 등과 함께 참가하는 것이다.

 

 이 토월회는 이후 멤버의 정비, 분열, 해체, 재발족 등등의 곡절 끝에 1926224일 제56회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하고 만다. 이것이 결국 원우전이 인천에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인 듯이 보인다. 1926<칠면구락부>가 창설되고 그가 인천에서 활동을 개시하는데, 인천 태생으로 같은 토월회 멤버였던 그 당시 유명 배우 정암(鄭岩)도 인천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일본 <전위좌(前衛座)> 연극연구소에서 연기 연마를 했고, 귀국하여 <토월회><낭만좌(浪漫座)>에서 연극 활동을 했다. 또한 <고려영화사(高麗映畵社)>를 창설하고 무성영화인 쌍옥루(雙玉樓)를 찍었으며, 이때 출연까지 겸하여 정식 영화배우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영화 낙화유수(落花流水)에서는 주연을 맡기도 하였다. 1926년 지방연극 발전을 꾀하는 뜻에서 희곡작가 진우촌과 무대장치가인 원우전, 언론인 고일 등을 규합하여 칠면구락부를 창설하여 향토 연극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것이 인천시사에 나와 있는 정암에 대한 기록으로 정암의 규합에 의해 원우전 등의 멤버가 모여 <칠면구락부>를 결성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정황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기록을 역시 고일의 인천석금에서 찾을 수 있다.

 

 토월회의 인천 공연 이후 무대장치가인 원우전 씨는 아예 인천에 거주를 정하였다. 그 덕으로 싸리재 각 상점의 간판은 근대식으로 진화했으며, 인천 무도관이 생긴 후에는 소년 소녀들의 아동극과 무용을 지도했었다.”

 <토월회>의 인천 공연 날짜는 알 수 없지만 1926년이나 혹은 그 직전이 확실할 것이다. 아마 이때는 토월회의 활동이 쇠퇴해 가고 있을 무렵이었고,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 인천에서의 활동을 작심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인천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칠면구락부>에서는 진우촌이 각색하여 공연한 춘향전」 「카르멘」 「사랑과 죽음이외에 수많은 작품을 각색, 연출하였다. 무대 장치는 원우전, 연출은 정암, 각색은 진우촌과 필자가 담당했다는 막연한 기록 정도에 그친다.

 

 현재 애관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일남 군도 원우전의 애제자로 극단에 들어가 지방 순회공연 등 직업 배우로서의 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인물이다.”라는 고일의 말로 미루어 소년 소녀들의 아동극이나 무용 교습 외에도 약간의 제자들을 상대로 연기 지도를 하지 않았나 싶다. 다만 그가 연극 무대미술 솜씨를 어떻게 상점 간판 제작에도 발휘했는지 중구 경동 싸리재 일대 간판이 근대식으로 진화했다는 고일의 증언이 흥미롭다.

 

 원우전은 전문적인 무대미술가가 드물었던 19201930년대에는 사실상 주요 극단의 작품들을 거의 그가 도맡아 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런 그가 언제 인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서울로 가서 활동을 했는지 우리 인천 연극사는 기록을 비우고 있다.

 

 19366월 조선극장 화재사건으로 이 극장 선전부장으로 있던 원우전이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조선중앙일보 기사를 통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그가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어 1938년에는 서울 종로 6정목(町目) 2층 다락방에 소재한 극단 <아랑(阿娘)>의 멤버가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19413월 발행 삼천리잡지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랑은 동양극장의 경영주가 변경될 때 그 전 동양극장에 관계하든 중진배우 황철(黃澈), 서일성(徐一星), 양백명(梁白明), 차홍녀(車紅女)와 기업 측으로는 전 동양극장 지배인이던 최상적(崔象德), 연출가 박진(朴珍), 장치에 원우전 제씨들이 주로 결성이 되어서 현금은 30여 명의 동지들이 손을 잡고 공동 경영을 하다싶이 의좋고 예원(藝苑)의 살림살리를 하면서 기술 연마에 노력하고 있다 한다.”

 19439월 극단 <성군(星群)>이 무대에 올렸던 김광주(金光洲) 북경야화의 무대장치를 원우전이 맡았다는 매일신보의 기사로 보아 서울에서 여러 극단을 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의 행적으로는 민족 정신 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각계 500명을 초청한다는 19481226일자 서울신문 기사 가운데 준비위원회에서 초청하는 인사 명단에 원우전의 이름이 보이고, 6·25 때 부산으로 피난해서는 신협과 국립극단의 몇몇 작품의 무대장치를 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532월 국립극장 재개관 기념 공연으로 윤백남 작 야화가 원우전의 장치와 서항석 연출로 무대에 올려진다. 이 공연은 다소의 논란이 있기는 했으나 바로 신파세대(윤백남), 토월회세대(원우전), 극연세대(서항석) 등 삼대의 통합이라는 상징을 우리 연극계에 남기도 했다.

 

 1942년 제1회 조선연극문화협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산풍(山風)으로 무대미술상을 받았고, 1966415일 한국연극연구소(韓國演劇硏究所) 제정 제4회 한국연극상을 수상한다. 그의 주요 작품을 보면 토월회 시절의 춘향전」 「산송장」 「농속에 든 새등과 춘하추동」 「이순신」 「산유화등 모두 60여 편에 이른다.

 

 한국 연극 무대미술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거두 원우전. 그가 어디서 나서 자라고 어디서 공부했는지 알 수 없다. 하다못해 생몰년 하나를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천 연극 개척자인 그가 그동안 제작한 무대 장면 사진 한 장을 아쉽고 분하게도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참 늦가을처럼 마음 춥고 쓸쓸함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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