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명배우 서일성(徐一星)

by 형과니 2023. 4. 26.

명배우 서일성(徐一星)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5-19 09:02:45

 

게리 쿠퍼처럼 키가 컸다는 인천 출신의 명배우 서일성(徐一星)

김윤식 시인·인천문협 회장

 

 

연극시장

 

 

 서일성(19061950)이라고 하면 아마도 1960년대의 명배우 신성일(申星一)에 비교할 정도의 인기를 가졌던 배우가 아니었나 싶다. 단편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기록들이 그런 면을 엿보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두 편 그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물도 있어서 그 당시 배우로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개항 이후 우리 인천 이야기 기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에서는 인천이 나은 이 유명한 배우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유명한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인천 한 세기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도 전혀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진우촌(秦雨村)이나 원우전(元雨田), 정암(鄭岩)의 이름은 보여도 그는 보이지 않다.

 

 그러면서도 인천시사에는 연극사(演劇史) 본문 기록은 없이 인물란에만 별도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추측컨대 그가 인천 출신이면서도 인천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서일성은 인천 태생으로 1925년 초창기 신극단(新劇團)<토월회(土月會)>에 참가하여 이백수(李白水), 윤심덕(尹心悳) 등과 활동했다. 1935년에는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에 참여하여 서울 동양극장(東洋劇場)을 중심으로 연극 활동에 매진했다. 1939년에는 연출가 박진(朴珍) 등과 함께 극단 <아랑(阿娘)>을 결성하고 활약했으며, 8·15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양백명(梁白明), 장진(張陣) 등과 극단 <백화(白花)>를 창단했다. 19506·25 동란 때 인천 주안(朱安)에 거주하다가 처가가 있는 서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북한군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피살당했다. 일제시대 부민관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 무대에 홀로 서도 온 무대가 꽉 차는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고 일본의 저명한 연극 평론가가 격찬하기도 했다. 출연 작품으로는 톨스토이의 부활버나드 쇼의 오로라」 「춘향전」 「박쥐의 집」 「백의민족등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인천시사의 인물란 기록 원문인데, 짧은 글을 통해서나마 그의 다채롭고 활발했던 연극 활동과 연기자로서의 카리스마를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인천 무대에 섰었다거나 다른 무슨 활동했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다. 모든 정황이 생략된 채 6·25 당시 인천 주안에 거주했다는 기록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쟁의 와중에 당한 그의 비극적인 최후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아무튼 서일성이 연극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25<토월회>를 통해서다. 서일성은 이 <토월회>에 연구생으로 입단했다고 한다. <토월회>에 관해서는 다시 전편(前篇) 원우전(元雨田)의 내용을 잠시 인용해 보자.

 

 

 

토월회 공연 안내 기사

 

 

 한국독립운동사는 토월회가 1922년 동경 유학생들에 의해 발족한 극단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19235월 경, 당시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던 박승희(朴勝喜김복진(金復鎭김기진(金基鎭이서구(李瑞求박승목(朴勝木김을한(金乙漢이제창(李濟昶) 등이 시작한 모임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실제 공연은 19237월이었다.

 

 이 토월회는 이후 멤버의 정비, 분열, 해체, 재발족 등등의 곡절 끝에 1926224일 제56회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하고 만다.”

 

 이 같은 역사를 가진 <토월회>에 서일성이 들어간 것이 1925년이니까 해산하기 바로 전 해인 셈이다. 더욱이 이때는 인천 배우 정암(鄭岩)과 무대미술가 원우전이 함께 <토월회>에서 활동하던 시기다. 이 둘은 1926<토월회>가 해산될 때 인천으로 오고 서일성은 그대로 서울에서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추측된다.

 

 서일성은 1931<연극시장(演劇市場)>의 단원으로 개막 무대에 선다. 공연은 131일에 있었는데 그는 이날 연극 공연이 끝나고 가요 레뷰 음악 무용이 어우러지는 무대에도 섰다고 한다. 이 첫 공연을 당시 기록은 관객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모여든 대성황이라고 적고 있다.

 

 이 공연을 통해 서일성은 또 1대 눈물의 여왕이라는 당대 최고 인기 여배우 이경설(李景雪)과 콤비를 이룬다. 연극에서 멋진 대역이기도 했지만 이 둘은 그 후 약간의 염문도 뿌렸던 것인지 다음과 같은 잡지 기사가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적힌 徐日星徐一星을 당시 필자가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李景雪이라는 女俳優(여배우)悲劇(비극)을 곳 잘 안다는 소문이 나기는 몃해 후이다. 그리하야 그는 자리를 옴겨 聚星座(취성좌)躍進(약진)을 하고 애리스 申銀鳳(신은봉)과 함게 昭和(소화) 5朝鮮博覽會長期興行(조선박람회장기흥행)團成社(단성사)에서 하는 동안에 그의 인기는 마음대로 올나갓다. 演劇(연극)으로 獨唱(독창)으로 눈코뜰새업시 드나드는 舞臺生活(무대생활)! 이 날나드는 꼿 발뒤를 잇는 歡呼(환호)! 그는 ()이 끗나면 팬들의 포위를 버서나기 위하야 每日(매일) ·(·)로 왕래하기까지에 이르럿다. 聚星座에서 그는 다시 演劇市場(연극시장)으로 또다시 新舞臺(신무대)로 자리를 옴겨왓다. 그리하야 그는 항상 그의 相對役(상대역)인 그의 愛人(애인) 徐日成(서일성)과 그에게 조흔 脚本(각본)을 써주는 冠岳山人(관악산인)과는 항상 갓흔 길을 거러왓다. 이리하야 동백꼿 祖國(조국)愛人, 黃菊白菊(황국백국), 피로짯상, 사랑을 직히는 아버지 化粧室(화장실)哀愁(애수) () 허다한 名劇(명극)主演(주연)이 되야 사랑과 일홈을 아울너 누리는 幸運(행운)主人公(주인공)이 되야바렷다. 뒤를 이워 東京(동경)포리돌 레코-()流行歌(유행가)劇吹(극취)專屬契約(전속계약)이 되니 朝鮮(조선)女俳優로서는 다시 더 바랄 길이 업는 榮達(영달)이다. 그는 가장 호화러워야 할 女俳優 舞臺(무대)의 꼿 노릇을 하면서도 그의 사생활은 항상 넉넉지 못하얏다.

 

 「나에게는 가 잇스니가 다시는 돈도 사랑도 필요치 안소이다

 19334월의 삼천리現下 半島 劇界(현하 반도 극계), 본 대로 生覺(생각) 난 대로기사를 통해 서일성의 극단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近日(근일)에 의하면 新舞台(신무대) (協同·협동)人氣(인기) 徐一星 諸氏(서일성 제씨)新舞台(협동)에서 탈퇴하야- 신극단 建設座(건설좌)을 조직하얏스며-”

 이 내용은 인천시사에는 나와 있지 않은 대목으로, 이 무렵 서일성이 <연극시장>의 후신인 <신무대(협동)>의 멤버로 있다가 다시 탈퇴하여 신극단 <건설좌>를 조직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기록이 19342월에 발간된 잡지 별건곤에 실린 조선 극단의 지붕 밑이라는 비평류의 글이다. 그의 활동을 보여 준다기보다는 그가 여러 배우들 중에 가장 먼저 호명(呼名)되는 당대 주목 받는 배우임을 암시한다.

 

 좌우간 명배우란 무에나 척척이래야 되는 법야. 서일성, 강홍식, 신은봉, 전옥, 최선, 라품심, 량노건, 박창환…… 누구누구 할 것 업시……

 

 서일성은 이어 1933<황금좌> 1935<예원좌> 등지에서 연기 생활을 한다. 특히 <예원좌>에는 좌장으로 거액 스카우트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로써 당시 유명 남자 배우 황철과 쌍벽을 이루는 최고 대우 배우가 되었던 것이다.

 

 극단 豪華船(호화선)이 창립될 때에는 徐一星 朴昌煥(박창환) 朴孤松(박고송) 군 등이 있었고, 한 살 두 살 나히를 먹는 동안 豪華船을 거쳐 나간 男女優를 치드라도 무려 수백 명에 달하리라구 믿는다. 나가구 들어가는 데에도 이유는 일일히 다 붙는다.

 

 朴孤松군이 나갈 때는 연극 이외에 딴 사업을 한다고 멀리 北支(북지)로 갔었구 徐一星군은 劇團 阿娘(아랑) 創立(창립) 當時(당시) 黃澈(황철)군과 손을 잡게 되고, 朴昌煥군은 高協(고협)이 창립될 때 沈影(심영)군과 손을 잡게 됐다. 새 극단이 하나씩 생길 때마다, 반듯이 豪華船에서는 꼭꼭 한 사람씩에 연기자를 보낸 듯한 감이 없지 않어 있다.”

 

 이 글은 극단 <호화선(豪華船)>의 대표 장진(張陣)19413월호 삼천리잡지에 실은 회고기(回顧記)를 발췌한 것이다. 1934년 발족 당시 서일성이 창립 멤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극단 <아랑(阿娘)>이 출범한 때가 1939년이니까 서일성은 1934년부터 <호화선>5년간 몸을 담았던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천시사에 적혀 있는 “1935년에는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에 참여운운하는 것은 착오가 아닌가 싶다.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아랑>의 결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내용을 볼 수 있다.

 

 아랑은 동양극장의 경영주가 변경될 때 그 전 동양극장에 관계하든 중진배우 황철(黃澈), 서일성(徐一星), 양백명(梁白明), 차홍녀(車紅女)와 기업 측으로는 전 동양극장 지배인이던 최상적(崔象德), 연출가 박진(朴珍), 장치에 원우전 제씨들이 주로 결성이 되어서 現今(현금)30여 명의 동지들이 손을 잡고 공동 경영을 하다싶이 의좋고 예원(藝苑)의 살림살리를 하면서 기술 연마에 노력하고 있다 한다.”

 

 이후에도 서일성은 여러 극단 무대에 연출과 연기자로서 활약한다. 광복 직후에는 함세덕, 황철 등과 함께 <낙랑극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朝鮮文化建設中央協議會) 조선연극건설본부(朝鮮演劇建設本部) 집행위원과 조선연극동맹(朝鮮演劇同盟)에 중앙집행위원으로도 참여한다.

 

 미남에다가 게리 쿠퍼처럼 체구가 컸지만 유연했고 뛰어난 발성으로 모범 만능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당시 최고의 배우 서일성. 인천에서의 활약은 없었다 해도 인천이 낳은 대배우, 명배우였음은 틀림이 없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인용문 가운데 처음 나오는 한자는 애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괄호안에 한글을 병기했습니다. - 편집자

'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혜숙(卜惠淑)  (1) 2023.04.26
연극인 정암(鄭巖)  (1) 2023.04.26
무대미술의 개척자, 원우전  (2) 2023.04.26
은둔화가 박응창  (1) 2023.04.26
최병구 시인  (0)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