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구 시인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16 11:17:49
‘버리고 간 노래’ 최병구 시인
김윤식/시인·인천문협회장
세상의 수많은 시인들이 낸 시집 가운데 시인의 실제 이미지와 딱히 부합되는 시집을 꼽으라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 우리 인천의 시인 최병구(崔炳九, 1924~1981)의 『버리고 간 노래』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둘은 자신들의 운명의 모습을 그대로 시 속에, 시집 제목 속에 남겨 놓은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랭보에 대해서는 고작 한 권의 시집과 몇 편 평전 따위에서 얻은 깊지 못한 지식이기는 해도 말 그대로 지옥에서 한 철을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든다. 일생을 짧게 불덩이 같이 살았던, 그리고 고독과 고통 속에 살았던 랭보의 삶이 시집 제목과 정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열정과 고독과 광기의 주인공 최병구 시인 역시 지옥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결코 긴 생애를 살았다고 할 수 없는 50대의 어느 여름날, 그는 생전에 부르던 노래들을 머리맡 원고지 갈피에 버려두고 떠났다. 『버리고 간 노래』는 고단하고 한 많았던 삶을 미련 없이 훌훌 집어던진, 바로 최병구 자신을 함축하고 상징한 시집이란 느낌이다.
인생이 다르고 시가 다르고 동과 서로 떨어져 걷던 거리, 만나던 사람이 전혀 다른데도 이 둘은 이렇게 한 구석이 묘하게 닮아 있다. 랭보나 최병구나 이승에 있는 동안 자신들 내면에 캄캄한 지옥과 활화산 같은 불길을 동시에 지니고 살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는 “어두운 시절을 도맡아 누린 시인”이라는 평론가 김양수(金良洙)의 말대로 지극히 불행했던 삶을 살았지만 우리 인천 문단을 위해서는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 그를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그 시절 그가 ‘몸으로 밀고 나갔던’ 인천 문화의 한 면과 문단의 모습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6·25 한국전쟁 이후 인천에서 최초로 문학 동인지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최병구 시인이다. 1955년 최병구의 주도로 초원동인회(草原同人會)가 발족하면서 박송(朴松), 윤부현(尹富鉉), 최창섭, 이종범 등이 발간한 동인지 『초원(草原)』이 인천 최초의 동인 잡지였다. 『초원(草原)』은 전쟁 후의 피폐한 시절임에도 최병구의 집념으로 5집까지 펴낼 수 있었다.
이 초원동인회의 활동은 이내 다른 문인들을 자극해 잇따라 이정태(李鼎泰)·랑승만(浪承萬)·손재준(孫載駿)에 의한 『사파(砂坡)』 동인이 생겼고, 김영달(金泳達)·홍명희(洪明姬) 두 사람의 2인 동인 시집으로 『소택지대(沼澤地帶』가 선보이기도 했다. 더불어 조수일(趙守逸), 김창흡(金昌洽), 심창화(沈昌化), 김창황(金昌璜), 최정삼(崔定三) 등으로 구성된 『해협(海峽)』 동인들이 소설 동인지를 발간했다.
조병화(趙炳華), 이인석(李仁石) 그리고 김양수(金良洙) 등이 서울에서 발간되는 잡지나 신문을 통해 작품 활동을 했던 반면, 최병구를 비롯한 많은 수의 문인들은 이렇게 인천에서 동인지 운동으로 작품을 발표했던 것이다.
동인지 활동뿐만이 아니라 최병구는 인천에 학생 백일장을 창안한 사람으로도 기록된다. 『인천시사』의 기록에는 그의 역할이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으나 그의 주도로 학생 백일장이 인천에서 실시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천 문단은 당시 경기도 문인협회 지부가 위치한 지역 문단으로서 활동이 늘어나고 강화되기 시작한다. 문협 지부의 사업으로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경기도 교육위원회와 지역 언론사의 협조를 얻어 10여 회에 걸쳐 개최한 경기도학생연합백일장(京畿道學生聯合白日場)이었다.
이는 인천을 중심으로 해서 문협경기지부의 관할 구역인 수원을 한수 이남의 중심지로 삼고, 의정부를 한수 이북의 중심지로 삼아 그 3개 지역에서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연합 백일장이었다. 이 연합 백일장을 처음 시작한 것은 김양수 지부장 때이며 이 행사를 위해 활약한 문인들은 한상억(韓相億), 조수일, 최병구, 조한길(趙漢吉), 손설향(孫雪鄕), 장현기(張玹基), 이정태(李鼎泰) 등이었다.
▲ 최병구 신문광고
경기지부의 이와 같은 연합 백일장 행사에서 입상 혹은 입선한 학생들 중에는 후에 성장해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활동하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이러한 백일장이 성황을 이룬 영향으로 해서 각 고등학교에서도 교내 백일장과 '문학의 밤' 행사 등을 빈번하게 개최하여 하나의 붐을 이루다시피 했다.”
인천에 묻혀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오던 최병구는 없는 살림에도 손설향과 함께 『인천문학』을 간행한다. 이 『인천문학』이 당시 서울 지향의 문화 풍토 속에 문학 인천의 자존심을 지키고 인천의 문화 풍토에 자양분이 되고자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멋들어진 파이프와 검은 모자, 가늘게, 소리 없이 짓던 먼 미소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왜 잡지를 만들었던 것일까. 그 답은 오늘까지도 알지 못하지만, 다만 우리가 그 잡지의 발간을 다시 이으려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문학적 위의(威儀), 그 시퍼런 엄연(嚴然), 그리고 반항적 기질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그러면서 그의 잡지를 『인천문학』이라고 명명한 또 그 오만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고 감히 밝힌다.
최병구 시인이 1970년대 단신 창간했던 이 문학잡지는 고작 6집을 끝으로 중단이 되었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자금 문제였다. 오늘날에도 잡지 발행이라면 필경 집을 남에게 넘길 만한 위험하고 힘든 사업일 터인데, 황차 그 시절에 잡지 발간이라면 돈키호테가 아니라 완전히 얼이 나간 그런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인천문학』을 6집까지 발간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또한, 그 시절 인천 사람들은, 신포동 사람들은 스스로 이런 문화 돈키호테가 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니, 오히려 많고 흔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병구였다.”
이 글은 1980년대 초반 몇몇 문인과 함께 『인천문학』을 속간하던 때를 회상하며 어느 잡지에 그 감회를 적은 것이다. 굳이 한 번 더 이야기하자면 『인천문학』의 창간은 가난도 꺾지 못한 생전의 최병구 시인의 칼칼한 문학 정신, 반항정신 때문이었음을 밝혀 쓴 내용이다.
천하 죄인이
휴지같이 걸어갈 제 신호등이 켜지기도 전 길을 점령하는 인파 대열
그 뒤를 따르며 나는 서둘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람들 맨 나중에 처져서
버리고 간 사람들의 눈물을 씹고
버리고 간 노래를 들으며
형용사 없는 인간(人間) 사상(事象)을 줍고 가렵니다.
-「버리고 간 노래」부분
최병구 시인은 1981년 병마와 싸우다 타계했다. 그 자신 한 줌 재로 돌아가면서 세상에 남긴 것은 혈육으로 여식 하나와 인천시 중구 도원동 산비탈의 한 간 누옥(陋屋), 단 한 권 출간했던 시집 『원죄 근처』(1959년, 범문각), 그리고 유고 시집 『버리고 간 노래』(1881년, 선민출판사)뿐이다. 남길 것 없이 다 버리고 갔다.
세상 명리(名利)에 초연했고 돈과 밥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 있던 당당한 자존심과 자긍심의 시인. 그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차라리 수행(修行)을 했고, 고행(苦行)을 했고, 반항을 했던 시인으로 우리 인천문단에 기억된다. 인천의 알뚤 랭보, 최병구 시인이 정녕 오늘 우리 곁에 있지 않다.
'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대미술의 개척자, 원우전 (2) | 2023.04.26 |
---|---|
은둔화가 박응창 (1) | 2023.04.26 |
영화배우 장동휘 (0) | 2023.04.25 |
인천음악인 김흥산 (0) | 2023.04.25 |
문인 함효영 (0) | 2023.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