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철도의 부설과 변천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4 14:31:47
인천의 근대시설(1)
-경인철도의 부설과 변천-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 당시 철도약도
오늘의 인천은 경제자유구역과 인천국제공항·인천항을 토대로 동아시아 첨단산업과 물류·금융의 중심지로 도약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경제자유구역의 성공과 인천공항의 2단계 확장·송도신항만의 건설 등 예정되어 있는 굵직한 국책사업도 내실있게 마무리 되어야 하겠지만, 도로와 철도 등 각종 운송체계가 이러한 인프라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각각의 기능을 극대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교통망 확충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근래에는 도시철도 2호선·인천대교·제3경인고속국도·제2외곽순환도로·경인고속국도 직선화·수인전철 등 신규교통망 건설과 기존 교통망의 개선에 대대적인 투자와 건설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한 국가 혹은 도시가 지닌 성장동력을 극대화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효율적인 교통망의 구축은 대단히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개항 후 근대도시로의 발전을 모색하던 시기의 인천에도 마찬가지여서, 인천항과 한반도 각지를 연결할 교통망의 구축이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통망은 도로교통 중심의 오늘날과는 달리 항만과 철도가 중심이어서 주된 관심은 인천항의 확장과 철도교통망의 건설에 모아지게 되었다. 이렇게 경인선 철도의 부설은 개항 후 인천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 경인철도 부설 배경
경인철도는 1897년 3월 29일 기공되어 1899년 9월 18일 개통된 한국 최초의 철도다. 경인철도 개통 이전 서울과 인천 사이의 교통은 우마차 등으로 12시간이 걸리던 육로교통과 인천~용산 간의 뱃길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서울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대개 인천항에 내려 유숙하고 이튿날 우마차로 서울로 향했고, 화물의 경우 선박을 이용해 용산으로 수송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개항장에는 각종 숙박시설이 호황을 누렸고 세곡선이 다니던 항로에는 화물수송을 위해 기선이 운항하기도 했다. 서울에 있던 전환국이 인천으로 옮겨온 것도 이렇게 인천과 서울 사이의 교통이 불편해 동전의 재료를 운송하기 어려운 당시의 사정 때문이었다.
▲ 제2차 기공식(1899,인천역)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인천항을 발판으로 한반도 각지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열강은 경인선 철도부설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는데, 그 결과 복잡한 국내 정치상황을 활용한 일본이 1894년 「조일잠정합동조관」에 따라 철도부설 사업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인철도 부설권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반일여론이 비등한 와중에 1896년 3월 미국인 모오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아메리카 무역상사(America Trading Co.)의 사장인 모오스는 「조일잠정합동조관」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한국의 간선철도 부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을미사변 후 조선의 대일감정이 악화되자 알렌의 도움을 얻어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 경인철도 착공과 개통
모오스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후 인천에 거주하던 타운센드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콜브란을 기사장으로 해 경인간 노선을 실측했다. 그 결과, 용산에 정차장을 설치하며 공사는 인천과 서울 양쪽에서 동시에 착공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897년 3월 27일 인천 우각현(쇠뿔고개)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자본가들의 투자유치에 실패하면서 모오스는 철도부설 자금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한 모오스는 철도부지 문제를 둘러싼 일본인 지주와의 갈등으로 탁포(坼浦)를 매립해 인천역을 설치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응봉산(자유공원) 뒤를 우회하는 노선으로 변경하는 등 건설공사에서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일본 측은 경인철도 인수조합을 조직하고 1897년 5월 8일 모오스와 「경인철도양도계약」을 체결, 모오스가 18개월 이내에 철도를 완공한 뒤 인수조합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되면서 인수조합과 모오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잦아지자 모오스의 제안으로 1899년 1월 31일 온전한 양도계약을 다시 체결해 경인철도 부설권 자체를 일본의 경인철도인수조합이 소유하고 공사도 조합이 직영하게 되었다. 당시 경인선 부설공사는 토목공사가 반 정도 완료되었고 한강철교도 축조 중에 있었다. 인수조합은 4월 4일 인천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모오스의 설계를 일부 변경해 4월 23일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거행하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재개했다. 그 결과, 1899년 9월 13일에는 인천과 노량진 사이를 운행하는 경인철도의 임시영업이 시작되었다.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준공되고 7월 8일 노량진~서울(당시 서울역은 서대문으로 현재의 이화여고 자리) 사이가 개통되어 12월 12일 서대문에서 개통식을 거행했다.
# 개통 후 경인철도 변천
▲ 개통 당시 인천역
개통 당시의 경인선은 증기기관차 4대와 객차 6량, 화차 28량으로 운영되었고 인천역~축현역~우각동역~부평역~소사역~오류역~노량진역 등 7개 역에 119명의 직원이 종사했다. 33.2㎞ 구간을 1시간30분에 달렸으며 오전, 오후 하루 2차례씩 왕복했다. 경인철도가 인천~노량진 사이게 개통되었을 당시에는 하루 2왕복 운행하던 것을 12월 1일부터 하루 3왕복으로 증차하고, 1900년 3월 16일부터는 4왕복으로 증차했는데, 경인 전구간의 개통과 동시에 5왕복으로 증차했다. 경인철도 부설 당시 설치된 우각동역이 1906년 4월 폐지되고, 1908년 12월 현재의 청과물시장 부근에 있던 축현역이 동인천역 자리로 신축·이전되는 등 개통 이후에도 선로의 개량공사가 계속되었다. 경인철도는 1903년 10월 30일 경부철도주식회사로 합병되어 경부철도주식회사 경인선으로 편입되었다. 1906년 7월 1일 경인철도는 경부철도와 함께 통감부의 「경부철도매수법」에 따라 통감부 철도관리국으로 그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1910년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따라 경인철도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운영했는데, 해방 후 미군정에 귀속되었다가 정부수립 후 국유철도로 편입되어 현재까지 그 기능을 계속하고 있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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