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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인천의 영단(營團)주택

by 형과니 2023. 4. 27.

인천의 영단(營團)주택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4 14:30:45

 

국제도시로의 변화(7)

인천의 영단(營團)주택

손장원 재능대학 실내건축과 교수

 

 

독쟁이 부근의 국민주택

 

 우리나라 사람처럼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이를 반증하는 지표로 2004년 국민은행 통계조사에 따르면 국민들 중 76%가 아파트를 선호한다라는 발표도 있었다. 또한 아파트 보급률은 2005년을 기준으로 2인 이상 가구인 경우 52.1%이고 전체 가구를 대상하는 경우에도 41.7%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아파트 보급률을 가진 나라다. 여기에다 빌라로 대표되는 연립주택과 다가구 주택을 포함한다면 우리나라 사람 상당수는 공동주택에서 생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0026월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섰지만 자가 점유율은 50% 이하에 그쳐 기형적인 주택보급현상인 셈이다. 여기에다 우리나라의 1천 명당 주택 수는 282호로 일본의 422, 미국의 416호에 뒤지며, 1인당 주거면적이 23.0로 미국의 65.3에 턱없이 작고 공간을 작게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33.8보다도 작은 수준이다. 한마디로 주택보급률과 아파트 보급률은 높지만, 주거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지표다. 비록 1인당 평균주거면적은 선진국에 못 미치지만 최근에는 상당한 설비와 내장재를 갖춘 아파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이를 발판으로 건설사들은 분양가를 높이고 있다.

 

 

 

수봉공원 부근의 AID아파트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동주택에 살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진다. 현재의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일본인 도요다(豊田種雄)가 서울 충정로 3250-6번지에 4층으로(5층은 가건물) 1930년 건립한 유림(儒林)아파트로 이 건물의 연면적은 3471.1이며, 49.6(15)에서 115.7(35)까지 총 52가구가 세워졌다. 물론 이보다 앞선 시기에 세워진 미꾸니 아파트와 혜화아파트로 있지만, 이들은 사원 숙소로 세워진 것이라 엄밀한 의미에서 아파트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정확하게 인천에 언제 아파트가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조사가 필요하지만, 광복 후의 일로 추정된다. 인천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은 서울에 비해 많이 늦지만, 영단주택으로 대표되는 공공 공동주택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 영단주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영주택기관으로 1941년에 설립된 조선주택영단이 1945년 광복이전까지 건설한 주택이다. 이처럼 공공기관이 직접 주택을 건설해 민간에 공급하는 방식은 일제의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것이다. 즉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한반도에 군수공장을 세우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하게 됐고,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의 주택난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 됐다.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1936년부터 본격적인 주택공급정책을 추진하게 됐으나, 자금난과 물가앙등으로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됐다.

 

 

 

숭의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 내 영단주택지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416월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수단으로 조선주택영단령(朝鮮住宅營團令)을 공포하고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영리를 배제한 공공적 측면에서의 주택공급정책을 전개했다. 조선주택영단이 건설하는 주택은 중류 이하의 봉급생활자들과 서민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여기서도 일본인과 우리나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주택공급정책을 실시했다. 영단주택은 규모와 형태에 따라 갑형에서 무형까지 5개 유형의 평면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특갑형, 갑형 등 주로 큰 규모의 주택은 일본인 관리나 사원들에게 분양되고 을형은 일본인과 한국인 반반 정도, ··무형은 주로 한국인 노무자들에게 분양됐다. 영단주택의 분양은 갑형은 주로 분양을 하고 그 이하는 임대로 하되 을형만은 희망에 따라 분양도 가능했다.

 

 

 

산곡동 영단주택지

 

조선주택영단이 1945년 광복이전까지 인천에 건설한 영단주택단지는 5개 지구로, 부평구 산곡동 87번지 일대, 남구 용현동 488번지 일대, 숭의동 184번지·348번지·147번지이다. 이 가운데 남구 용현동과 숭의동은 일제강점기 대화정(大和町), 부평구 산곡동은 백마정(白馬町)에 속했던 곳이다. 용현동 및 숭의동 영단주택단지는 조선시가지계획령 제33항의 규정에 따라 1939311일 총독부고시 제193호로 그 실시계획이 인가, 고시된 숭의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시행당시의 명칭은 大和町土地區劃整理事業이었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인가된 토지구획정리사업면적은 1122(34만 평)이었으며, 시행자는 인천부윤이었다. 숭의지구에 대한 환지계획은 1940520일 착수됐으나, 환지예정지 지정승인을 얻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아 중단됐다. 이후 19584월 재착수해 1959년까지 완료할 예정이었으나 주인선(朱仁線:주안역인천남부역, 1955531일 개통)철도 부설로 다시 중단됐다. 그 후 196349일 경기도지사로부터 환지예정지를 지정인가 받아 19704141255359.4(379744.5:2670필지)에 대한 환지가 확정됐다. 이렇게 조성된 숭의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 중 52757.3(15959:12개 블럭)1942년 조선주택영단에 의해 매입돼 1943년 모두 4개의 주택지가 조성됐는데, 숭의동에 3개 단지, 용현동에 1개 단지가 건설됐다.

 

 그런데 대한주택공사30년사(1992년 발행, p. 64)에는 19435월경에 당시 인천부 소유의 토지 4450(13325)을 매입했다고 기록돼 있어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산곡동(, 백마정) 영단주택지는 1940119일 총독부고시 제25호로 공포된 경인시가지계획구역 내 11개 지구에 걸친 8148(24646천 평)의 일단의 주택지경영지구 가운데 일부로 이 계획구역에는 당시의 백마정지구를 포함해 부천군 소사면, 계양면, 문학면의 각 일부분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경인시가지계획구역 중 부평 일부지역만이 일단의 공업용지조성지구로 수용, 공고됐고, 나머지 지역은 후속조치가 마련되지 않은 채 방치됐다. 이렇게 방치돼 있었던 일단의 주택지경영지구 중 조선주택영단이 산곡동 109927.8(33253)의 토지를 매입해 육군조병창(1934년 건설)의 사택과 합숙소 196호를 1945년에 완공했다. 그런데 대한주택공사30년사(1992년 발행, p. 68)에는 900여 호로 기록돼 있어 이에 대해서도 향후 자료의 보완이 필요하다.

 

 

 

용현동 영단주택단지

 

용현동 영단주택지는 숭의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한 가곽 제54, 59호의 일부와 제57, 58호의 부지에 조성됐으며, 규모는 7824.8(2367)였다. 주택지에는 폭 8m, 6m의 도로를 기준으로 경사가 거의 없는 대지에 격자형으로 배치됐다. 8m 도로는 가로로 2, 세로로 1개가 배치됐고, 6m 도로는 가로로 1, 세로로 2개가 배치돼 총 6개의 도로에 의해 형성된 4개의 대가구를 조성하고 대가구는 다시 4m 도로에 의해 2(가곽 제57) 혹은 4개의 소가구(가곽 제58)로 구획했다. 전면도로에서 직접 각 주호로 진입할 수 있도록 배치됐으며, 병형 2호연립주호의 진입은 도로에 면한 측면에 설치된 폭 2m의 도로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98호가 주택이 세워진 용현동 영단주택지는 영단주택 5개 평면 유형 중 병형(건축면적 10)과 정형(건축면적 8)의 주택을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됐다. 모두 연립주택으로 계획돼 병형 2호연립 25(50), 정형 6호연립(48)가 세워져 병형 51.02%, 정형 48.98%로 배치됐다. 당초 조성된 도로 중 폭 8m6m의 도로는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전체적인 가구의 형상에는 큰 변화가 없으나, 각 가구를 소가구로 구획했던 4m의 도로는 거주자들의 주택 증축으로 3m 정도로 좁아져 있다. 현존하는 영단주택 중 건설 당시의 평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없으며, 정원과 도로 부분에 건물을 증축해 사용하고 있다. 특히 도로와 접한 곳에 증축해 생긴 공간은 벽돌로 벽을 만들고 상부에는 슬라브를 올려 세를 놓거나 점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용현동 영단주택은 연면적이 33.0526.5에 불과한 매우 협소한 주택이라서 거주자들은 현재 대부분 마당이나 도로 부분에 건물을 증축해 사용하고 있다. 현재 이 지역에는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진행 중이다. 건립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애환과 사연이 담긴 영단주택의 정비사업을 통해 이 시대에 걸맞는 개발과 근대건축물의 역사적 존립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