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밤바다를 지킨 팔미도 등대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4 14:33:24
인천의 근대시설(2)
-인천 밤바다를 지킨 팔미도 등대-
문상범(인천고등학교 교사)
육지에 길이 있듯 바다에도 길이 있다. 육지 길의 교통표지판처럼 바닷길을 표시하고 안내하는 시설이 있어 바다를 오가는 배들이 위험물을 피해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도록 돕는다. 등대, 등부표, 부표, 입표 등 여러 종류의 항로표지로 이들은 곳곳에서 바다의 길잡이 노릇을 한다. 그 중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대표적인 것이 등대다.
등대는 탑 모양의 구조물 꼭대기에 불을 밝힐 수 있는 등화를 장치하고 어두운 밤에 항해하는 선박에게 그 위치를 가르쳐 주는 항로표지다.
# 등대의 역사
등대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됐다. 세계 최초의 등대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파로스(Pharos)등대다. 이 등대는 기원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만 입구에 있는 파로스 섬에 세워졌다. 등대의 외부 높이는 140m이며 대리석으로 두텁게 성벽처럼 쌓아올리고, 내부에는 60m의 탑을 만들고 넓은 공간을 조성했다. 탑의 꼭대기에는 화강암으로 제작된 화대가 있어 승려가 야자수로 상시 불을 지폈고 그 불빛은 100km 떨어진 해상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근대식 등대는 초기에는 석조로 탑을 건축했으며, 건축 재료와 건축기술은 육상 건축물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근대식 등대의 광원은 나무나 석탄을 태워 이용했으며, 18세기 말경까지 계속되다가 19세기에는 등대용 램프가 등장해 식물성기름을 사용해 강한 광력을 내게 됐다. 이때부터 램프시대에서 가스등기시대로 들어가면서 여러 사람이 가스등기를 고안했다. 20세기 초 전기가 발명되면서 등대의 광원으로 전기장치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전기등이 항로표지용 등기구로서 우수한 것은 광력이 크면서 일정한 광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과 운영이 편리하다는 점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우리나라에 서양식 등대가 도입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1903년 6월 1일 팔미도와 소월미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것이다. 봉화에 의존하던 항로표지시설 대신 서양식 등대를 도입한 것은 우리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로 진출하는 외국 선박의 보호를 위해 외국의 강압에 의해서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이후 인천항을 드나드는 선박의 항해가 빈번하자, 일본은 1883년 6월과 7월에 걸쳐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제31관에 “조선정부는 종래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 초표를 설치한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조선정부에 항구의 수리와 등대 초표의 설치를 요구했다. 일본은 우리나라 연안에 등대 설비가 없어 자국 함선의 운항이 어렵고 상선의 해난사고가 빈번하자 전 연안의 중요 지점에 등대 설치 위치와 설비, 등대의 종류 등에 관한 측량 및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에 여러 차례 요청했다. 미국 등 여러 나라도 자국 선박의 운항이 잦아지자 주요 항로와 항만의 수로측량을 실시하고 등대 건설을 요구했다.
일본은 1895년 3월 13일 다시 등대 건설을 촉구하고 등대 건립지 측량을 요청해 결국 1895년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 동안 우리나라 전 연안을 측량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등대 건립 예산이 없어 등대 건설 사업을 시행하지 못했다. 이에 일본이 1901년 4월 29일 외교문서로 등대건설비를 관세에서 충당할 것을 제의했고 1901년 5월 총세무사 브라운은 관세 수입 중 25만 원을 등대 건축자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 팔미도 등대 점등
▲ 팔미도 100주년 기념등대
등대 건설비가 확보되자 정부는 1902년 3월 20일 인천해관에 등대국을 신설해 등대 건설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1902년 5월 16일부터 인천항 팔미도 등대, 소월미도 등대와 북장자 등표, 백암 등표의 건설에 착수해 1903년 4월 준공했다. 준공 후 당시로는 신식인 전기회전식 6등급 등명기를 마련해 6월 1일 점등됐다. 등명기는 당시에 가장 유명한 프랑스 회사의 기술을 도입했다. 등탑에 설치된 석유등 불빛은 10km 밖에서도 식별할 수 있었다.
팔미도 등대는 해발 71m 섬 꼭대기에 세워진 높이 7.9m, 지름 2m 정도의 원통형의 구조물이다. 건축 재료는 바닷물에 부식되지 않는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콘크리트를 이용해 이렇듯 높은 건물을 쌓아 올린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비록 일본의 압력과 강요에 의해 외국인 기술자의 손으로 세워지기는 했으나 한국인 인부들이 동원됐고 대한제국 이름으로 세워진 첫 번째 우리나라 등대였다. 광복 후 교통부에서 인수하면서 정식으로 등대원을 파견했고, 1954년 9월부터 자가발전 시설을 갖추고 백열등으로 불을 밝혔다. 1962년 무선표지국을 설치한 뒤, 1967년 수은등으로, 1981년 할로겐 등으로 각각 바꾸었고, 1992년에는 태양광발전장치를 설치해 보다 나은 시설을 갖추며 인천 앞 바다를 오가는 선박의 안전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 영구보존되는 팔미도 등대
▲ 문화재인 팔미도 등대
100년의 풍파를 견뎌내며 해상 안전에 한 몫을 한 팔미도 등대는 새로 지은 신축 등대에게 임무를 맡기고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제40호)로 지정돼 영구 보존되고 있다. 현재 팔미도 등대는 2003년 12월 22일 현대적 조형미와 첨단 항로표지 기술을 갖춘 100주년 기념 상징조형물(천년의 빛)인 대형 등대로 교체됐다. 새 등대는 전망대와 등탑을 갖춘 높이 31m에 지하 1층·지상 4층의 현대식 건물에 위성항법보정시스템(GDPS) 기준국 등의 시설과 첨단장비를 갖추고 기상관측과 연안 해양관측의 업무까지 맡아보고 있다.
팔미도 등대는 인천상륙작전 시 불을 밝혀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흔히 ‘켈로부대’라고 알려진 KLO의 공로가 컸다. KLO는 1948년 무렵 대북한 정보수집과 북파공작 전문 첩보부대다. 정식명칭이 ‘미 극동군 사령부 주한연락처’(Korean Liaison Office)다. 창설 당시에는 미군정보팀에서 파견된 미국인 5명과 한국인 6명이 전부였고, 책임자는 미 24군단 공작과장 런치 대위였다. 한국인으로는 최규봉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KLO는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인천을 통해 연합군이 상륙할 수 있는 시기를 선택하는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50년 8월 10일 당시 대구에서 방어전을 펴고 있던 KLO부대원에게 “부산으로 가서 백구호를 타라”는 극비명령이 하달됐다. 덕적도에 도착할 때까지 이유를 몰라 궁금해 하던 부대원은 클라크 대위에게서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다.”는 귀띔을 받았다.
하루에도 몇 m씩 높낮이가 바뀌는 인천항의 수심과 복잡한 섬 사이의 정황을 파악하기를 한 달쯤 지난 9월 10일 드디어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음총으로 무장한 KLO 부대원 25명은 그날 밤 북한군을 사살하고 등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작전 개시 전까지 5일 동안 KLO 부대원과 북한군 사이에는 등대를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계속됐다.
# KLO부대의 팔미도 등대 탈환
▲ 켈로부대 기념비
D-1일인 14일 오후 7시 “15일 0시40분을 기해 불을 켜라.”는 최후명령에 따라 등대 탈환전에 나섰다. 수십 명의 적군이 쏘아대는 따발총 공세를 뚫고 등대를 되찾는 데 성공했지만 등대는 망가져 있었다. “막상 등대를 확보했는데 나사 하나가 없어 점화되지 않는 거예요. 모든 걸 포기하고 지쳐 떨어졌는데 뭔가 잡히더군요. 나사였습니다.” 라는 최규봉 대장의 증언은 아슬아슬했던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한다. 이 때문이었는지 북한군은 등대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5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KLO 부대원들이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힌 것은 정해진 시각보다 1시간 40분 늦은 2시20분이었다. 팔미도 등대를 애타게 바라보던 7개국 261척의 연합군 함대는 이것을 신호로 인천항을 향해 돌진했다. ‘팔미도작전’ 은 6·25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은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팔미도는 행정구역상 인천시 중구 무의동 산 372로 인천항(港) 남쪽 바다 17.5㎞ 떨어진 섬이다. 면적 0.076㎢에 해안선 길이가 1.4㎞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남북 두 섬이 모래톱으로 연결된 두 개의 섬이 마치 여덟 팔 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아 팔미도라 불려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팔미’로, ‘대동여지도’에는 ‘팔산’ 등으로 나오고, 인천사람들에게는 ‘팔미귀선(八尾歸船)', 즉 낙조에 팔미도를 돌아드는 범선의 자취가 아름다워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혔던 해상 경승지였다. 현재 이 작은 섬은 군사작전 지역으로 일반에 잘 공개되지 않는다. 정기여객선 배편이 없어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인천시에서는 앞으로 팔미도를 개방해 빼어난 경관을 시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유람선 운항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하니 보다 많은 사람들이 팔미도 등대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팔미도 등대 연혁〉
·1884년 한국공무아문(전공조) 등춘국 설치
·1895년 6월~9월 일본 등대용 선박(명치환)이용 한국연안 등대 위치조사 및 측량
·1901년 한국 총세무국 관세수입 중 25만 원으로 항로표지건설에 관한 2개조항 신설
·1902년 3월 인천해관 등대국 설치
5월 소월미도, 팔미도, 북장자서, 백암등대 건설 착수
·1903년 6월 1일 팔미도 등대 초점등(석유 백열등)
·1904년 12월 항로표지선 광제환 도입
·1910년 9월 5일 광제환에 무선국 신설
· 1954년 8월 29일 발동발전기 및 축전지 설치(석유등에서 전기등으로 교체)
전기식 무신호기 설치
·1963년 12월 팔미도 무선표지국 신설
·1967년 6월 27일 통신기 설치(LHF DSB-27)
·1975년 8월 무신호기 개량(모터사이렌에서 전기혼으로 교체)
·1981년 8월 1일 등대 위탁 기상 관측 실시(관측자료 인천기상대에 제공)
·1983년 12월 27일 등대직원 숙소 개량공사(일본식건물을 한국식으로)
·1987년 10월 일반 가입전화 설치(간석전화국)
·1989년 5월 4일 숙소 난방시설 설치(화목에서 유류보일러로 교체)
·1991년 9월 13일 태양광 발전시스템 설치
·1999년 8월 23일 DGPS 기준국 설치 운영
·2003년 12월 22일 새 등대 임무 개시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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