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통신의 출발지, 인천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4 14:34:28
인천의 근대시설(3)
-근대 통신의 출발지, 인천-
문상범(인천고등학교 교사)
▲ 우편배달부
1980년대부터 전기통신 시설이 현대화되고 대량 확산돼 1987년에는 전국적으로 1천만 회선을 돌파하면서 ‘1가구 1전화 시대’를 달성했던 우리나라는 2007년 말 현재 시내전화 가입자 수 2천329만553명, 이동전화 가입자 수 4천299만7천562명,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수 1천470만9천829명으로 세계 초일류 IT 강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통신부문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선도할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미 1996년에 세계 최초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 디지털 이동통신을 상용화시키고 인천과 부평에서 첫 서비스를 했는데, 이는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통신의 시작은 인천을 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말 개항을 전후해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많은 근대화 부문 중에서 특히 통신은 인천과 관계가 깊다. 인천은 서울과의 관계 때문에 우편·전신·전화 등의 근대적 제도가 다른 지역보다 항상 먼저 실시됐다.
우편은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 있던 일본영사관이 우편물을 취급한 것이 최초이며, 전신은 청국(淸國)이 인천∼서울 간 전신선을 개통한 것이 시초다. 무선통신은 인천에서 활동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시설을 갖춘 군함 광제호(光濟號)와 월미도의 무선지상국 간에 연락을 한 것이 그 시초다. 전화는 1902년에 서울∼인천 간의 자석식 교환업무가 시작된 것이 처음이다.
# 근대 이전의 통신수단
근대적 통신수단이 도입되기 전에는 솟대, 용고(龍鼓), 신호연, 봉수(烽燧), 파발(擺撥), 우역(郵驛) 등이 그 역할을 했다. 솟대는 통신 역사 중 가장 원초적 형태의 하나로 인간과 하늘과의 통신을 위한 안테나로 여겼다. 용고는 북소리로 통신 역할을 했는데, 특히 전시에 많이 사용됐다. 신호연은 전투 신호를 위한 중요한 암호 전달 수단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직접 고안해 낸 것이라 해 일명 충무연이라 부르기도 한다. 봉수는 이전 통신 방식 중 가장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꽃에 정보를 담아 먼 거리까지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산악 국가인 우리나라는 남해안에서 함경도 종성까지 전국을 연결하는 완벽한 봉화통신망이 존재했다. 파발은 긴급한 군사정보와 변경(邊境)의 급보와 화급한 공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시행됐다. 운영상 경비가 많이 들고 봉수보다 전달 속도가 느리지만, 문서로 전달돼 그 보안유지가 쉽기 때문에 군사정보 전달이나 행정 전용 수단으로 활용됐다.
우역은 통신 방법 중 가장 편리한 인편을 활용한 통신수단으로 사람이 직접 걸어서 전하는 것과 말을 타고 전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신라 때부터 발전했는데, 중앙의 명령을 지방에 하달하고 지방에서 중앙으로의 보고사항을 전달하는 통신수단 이외에도 공물(貢物)을 중앙으로 이송하는 수송 기능까지 겸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수단들은 근대적 통신수단인 우편, 전신, 전화 등이 도입되며 자취를 감추었다.
# 우편
▲ 최초의 우표
근대식 우편제도는 1884년 11월 18일 서울의 우정총국과 인천분국이 개설되면서 시작됐다. 이 인천분국이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 우체국이다. 그러나 인천분국은 12월 9일 문을 닫는데, 12월 4일에 있었던 우정총국 청사 개업 축하연에서 김옥균 등 개혁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켜 3일 천하로 끝남에 따라 우정총국이 12월 9일 폐쇄됐기 때문이다. 이후 1895년 우체사가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 다시 옛날 방식의 통신 방법이 계속됐다.
한편 일본은 1882년부터 인천영사관 내에서 인천 주재 영사에게 우편에 관한 사무를 겸하게 하다가 1883년 인천이 개항되고 일본조계가 설치된 후, 일본인의 인천 이주가 본격화되자 본국과의 통신을 위해 1884년 4월 영사관 내에 우편국을 설치하고 운영에 들어간다. 인천 일본영사관 내의 우편국은 1888년 서울의 일본공사관에 출장소를 설치해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우편사무까지 관장했다. 이때까지도 조선은 자체적인 우편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일본우편국을 이용했다.
인천과 서울 간에 공식적으로 근대 우편업무가 시작된 것은 1895년 7월 22일이었다. 서울에는 통신국 내에 한성우체사를 두고, 인천에는 이운사 내에 인천우체사를 개설해 인천의 우편물과 한성의 우편물을 맞교환하는 교환 배달 방식이었다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우전인으로 불리는 직원이 우편낭을 지고 매일 오전 9시에 인천과 한성에서 각각 출발해 오후 1시쯤 중간 지점인 오류동에서 만나 우편낭을 교환했다. 하루에 한 번씩 이런 방식으로 인천과 한성 사이에 우편낭이 오고 갔는데, 인천우체사의 우전인이 한성우체사 우전인에게 우편낭을 전하고 받아오는 데에만 9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 전보
▲ 일본영사관내의 우편국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전보)은 1885년 청국에 의해 개통된 인천∼서울 간의 전신이다. 청국은 1885년 조선과 한·청전신조약을 체결하고 그들의 자본과 기술로 인천∼서울 간의 경인전신선을 완공했으며, 1885년 9월 25일에 화전국(華電局)이라는 전보국을 인천 주재 청국영사관에 설립해 전신업무를 개시했다. 10월에는 서울과 의주 간에 서로전선(西路電線)이 완공되고 또 11월에는 서울∼부산 간의 경부전선(京釜電線)이 개통돼 부산∼인천∼서울∼의주∼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 간의 전신이 가능했다.
1894년 12월 1일부터 인천우편국에서 일반인들의 전보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전보는 일어, 영어, 한글 세 종류였는데 1930년 통계를 보면 전보 통수에서 일어 21만여 통, 한글과 영어가 2천500여 통으로 일어가 한글이나 영어에 비해 100배 가량 많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광복 이후 인천에서 발행되던 대중일보(1946. 1. 1) 기사에 “우리말의 전보를 인천우편국에서 취급하므로 일반은 일본말 전보를 업새고 우리말 전보로 해주기 바라고 인천국에서는 일반의 국문전보 취급에 협력해 주기 바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광복 직후여서 그랬는지 여전히 일어 전보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전화
우리나라에서 전화가 처음 개통된 해는 1898년이다. 당시 궁내부는 궁중에서 각 아문과 연락을 위해 덕수궁에 전화를 가설해 각 아문은 물론 인천에 있는 감리서와 통화를 하면서부터다. 1898년 1월 28일 인천항 감리가 전화로 “오후 3시 영국 범선 3척이 입항할 것”이라는 보고를 외아문에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전화를 다리풍, 덕률풍, 득률풍 또는 전어기, 어화통 등의 특이한 한문 이름으로 불렀는데 다리풍, 덕률풍, 득률풍은 영어 telephone의 음역이다.
1902년 3월 20일에는 처음으로 경인간 시외전화사업이 시작됐는데, 대한천일은행 본점과 지점 사이의 전화 개통으로 최초의 일반인의 시외전화 통화가 이루어진 날이다. 이때 가입자가 총 5명이라고 전해진다. 이 해 6월 1일에 인천 시내에 교환전화가 가설되고 인천우편국에서 전화 교환사무를 시작한다. 이어 1904년에는 인천정거장과 우편국 앞에 자동전화를 설치하기도 한다. 1905년에는 전화 통화사무를 인천우편국에서 시작했는데, 당시의 전화기는 에릭슨사에서 제작한 자석식 단식교환기와 벽괘형 전화기였다. 당시 전화 가입자는 서울에 약 50명, 인천에 약 20명, 영등포 및 수원에 각 1명씩이었다.
# 무선전신
무선전신은 1910년 우리 정부가 월미도에 무선전신소를 개설하고 해로순찰과 세관검사 등의 임무를 띤 군함인 광제호(光濟號)에 장치한 것이 최초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군사용 또는 기상관측 등을 하는 특수 업무용이었고 일반 공중통신용은 아니었다. 공중무선통신업무는 1923년 6월 7일 서울의 경성무선국이 발족되고 1925년에 그 기구를 확장함에 따라 인천·목포·진남포·청진 등에 각각 해안 무선국을 설치했는데 이 때 인천에 설치된 것이 인천무선전신국의 시초다.
앞으로는 정보통신산업의 경쟁력이 바로 국가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에 늦어서 외세에 의해 역사적 수모를 당했으며 인천은 바로 그 외세의 통행로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천은 인천국제공항의 개항과 더불어 항만을 재정비하고, 송도신도시에 최첨단지식정보화단지를 만들어 하늘-바다-정보의 소위 ‘트라이포트(Triport)’를 꿈꾼다. 인천이 근대 통신의 시발지임을 자각하고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한 노력이 필요할 때다.
# 백범 김구와 전화
『백범일지』에는 「대사령친전정형」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김구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전날 밤에 대군주에게서 사형을 정지하라는 칙령이 전화로 직접 내려왔다는 것이다. 『백범일지』에는 이 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쨌든지 대군주가 친히 전화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때 경성부 내에는 전화가 가설된 지 오래였으나, 경성 이외에는 장거리 전화가 인천까지가 처음이요, 인천까지의 전화 가설 공사가 완공된 지 3일째 되는 날(1896년 8월 26일)이었다는 것이다. 만일 전화가 준공되지 못 했으면 사형이 집행됐을 것이라고 했다.”
인천에 전화가 개설된 때는 1898년이며 인천감리서와 서울 궁궐과 전화가 처음 개설된 것은 1월 28일이었다. 그러므로 김구의 회고는 착오이며 인천감리서가 받은 것은 전화가 아니라 전보였다. 1896년 음력 8월 26일(양력 10월 2일)에 법부에서는 이화보는 석방하고, 김창수(김구)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유보하라는 답전을 인천 감옥으로 내려 보낸 것이다. 따라서 위의 인용문은 사실의 여부보다는 사형의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던 당시 김구의 입장에서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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