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폐를 주조하던 인천전환국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4 14:35:51
인천의 근대시설(4)
-근대화폐를 주조하던 인천전환국-
김상열(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동인천 전철역 맞은편과 자유공원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명칭은 전동(錢洞)이다. 지명에 돈 전(錢)자가 붙은 이유는 고종 29년(1892)부터 광무 4년(1900)까지 근대식화폐를 만들었던 인천전환국(仁川典환局)이 옛 인천여자고등학교의 자리(현 미추홀문화회관)에 있었기 때문이다.
▲ 1962년 발행된 개백환권
# 전통화폐와 근대화폐의 차이
상평통보와 같은 전통화폐를 일반적으로 엽전(葉錢)이라 부른다. 주화를 새겨 넣은 형틀(주전틀)은 서로 연결되도록 골을 파서 한꺼번에 여러 개의 화폐가 만들어지도록 했다. 쇠를 녹인 쇳물을 주전틀에 흘려 넣고 쇳물이 굳은 후 거푸집을 제거하면 쇳물이 들어간 길은 마치 나뭇가지와 같고 만들어진 주화는 그 가지에 달린 나뭇잎처럼 보인다 해 나뭇잎 엽(葉)자를 붙여 엽전이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전통시대에 주화를 만드는 방식은 주조식(鑄造式)이었다.
그러나, 개항이 된 후 주화를 만드는 방식은 압인식(壓印式)으로 바뀌게 된다. 주화의 도안을 금속에 새겨 압인기(壓印機)에 장착을 하고 주화의 재료가 되는 원판의 소전(素錢)을 극인 사이에 넣어 압인기를 돌려 강한 압력으로 눌러서 양면을 동시에 찍어내는 방식이다. 이렇게 압인식으로 주화를 만드는 관청이 전환국이었다.
▲ 전환국자리의 인천고등여학교
# 전환국의 변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적 조폐기관인 전환국은 고종 20년(1883) 7월 재정고문 뮐렌도르프(목인덕)의 건의에 의해 설립됐다. 그러나 제조기계와 기술인력 등이 부족해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만을 담당했다. 고종 22년 독일에서 수입한 조폐기기를 설치한 경성전환국(京城典환局)이 발족됐고, 그 이듬해에는 전환국에서 독일로부터 기술자를 초빙해 시주화(試鑄貨) 15종(금화 5종, 은화 5종, 적동화 5종)을 제조했다. 그러나 실제로 유통된 것은 1환은화, 십문동화, 오문동화 등 3종뿐이었는데, 이유는 금은 보유량의 부족, 화폐통용에 대한 사회적 여건의 결여, 그리고 화폐 주조로 얻어지는 이윤이 적은 것이 원인이었다.
고종 25년(1888)에 중단된 근대화폐의 제조는 1892년 근대화폐 조폐기기를 인천전환국으로 옮겨 다시 시작됐다. 고종은 일본에서 수입되는 주화용 원료운반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인천으로 전환국을 옮기게 했다. 당시 일본과의 신식화폐주조방법협정에 따라 인천전환국은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전환국에서는 각인(刻印)만을 찍기로 하고 소전은 일본에서 수입했다. 인천전환국에서는 1892년부터 1900년 6월까지 화폐를 주조했는데, 그 종류는 닷냥은화, 한냥은화, 이전오푼적동화, 오푼동화, 일분동화 등이었다. 그러나 은화는 명목상으로만 주조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격증하는 화폐수요량에 대처하기 위해 대일차관으로 인천전환국의 확장을 시도했다. 그러나 광무 2년(1898) 8월 건축 및 기계증설 등 인천전환국의 확장공사가 한창일 무렵 고종황제의 명에 의해 전환국은 용산으로 이전됐다. 용산전환국은 1900년 건축을 마치고 시운전을 거쳐 1901년부터 본격적인 화폐제조를 시작했다. 화폐조례에 의해 금본위제도(金本位制度)가 채택됐으나, 본위화폐인 금화는 제조되지 않았고, 보조화폐에 있어서도 은화만이 약간 제조됐을 뿐 재정조달을 목적으로 제조이익이 큰 백동화가 대량 제조됐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에 따라 일본인 재정고문이 부임해 실질적으로 조선의 재정은 물론 화폐와 금융에 관한 모든 권한을 일본이 장악하게 됐다. 일본인 재정고문은 폐제문란의 가장 큰 원인의 하나로 전환국에서 백동화를 남주한 것이라고 판단해 전환국의 폐지안을 제출했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1904년 전환국이 폐지되고 말았다. 이후 주화는 일본 오사카조폐국(大阪造幣局)에서 제조하게 됐다.
▲ 인천전환국 표지석
# 인천전환국의 현황
인천전환국은 지금의 미추홀문화회관에 설치됐다. 1892년 6만 원의 예산으로 건축공사를 시작해 11월에 준공하고, 12월에 각종 기계의 시운전을 시작했다. 건물은 3동인데 요철형으로 배정되어 중앙이 사무실 겸 화폐조사실·검인실이 있었고, 동쪽에 기계실과 기관실이, 서쪽에는 조각과 창고 및 감찰실이 있었다. 인천전환국에는 압인기 9대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2대는 경성전환국에서 사용하던 것이며, 6대는 1892년 오사카조폐국에서 도입했다. 아무리 신식기계가 비치됐어도 작업 한도가 있어 겨우 은전과 동전을 압인할 뿐 금속을 용해 또는 압연하는 장치가 없었다.
# 화폐에 나타난 외세의 간섭
인천전환국에서 제조한 닷냥은화는 경성전환국 은화와 비슷하지만, 앞면 중앙의 태극장이 왕실의 휘장인 이화장(梨花章)으로 바뀌었고, 양쪽 모두 오얏나무 가지였던 것을 우측은 오얏나무 가지를 그대로 사용하고, 좌측은 무궁화 가지로 도안이 바뀌었다. 뒷면 중앙에는 용을 도안했고 둘레에 연기(年紀)와 국호(國號)를 새겨 넣었는데,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단초가 하나 있다.
인천전환국에서 최초로 제조된 화폐에는 대조선개국오백일년(大朝鮮開國五百一年)이라는 국호와 연기가 표기됐다. ‘조선’이 아니라 ‘대조선’이라 국호를 칭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주재관으로 와있던 청나라의 위안스카이(遠世凱)는 “청나라가 대국이오, 조선은 소국이니 대조선이라는 것은 국격상 체모에 불합하다”라 간섭해 ‘대(大)’자의 제거를 요청해 개국 502년, 503년, 504년에 제조된 화폐에는 ‘대’자가 제거되어 ‘조선’으로만 발행되다가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후인 개국 503년과 504년에 주조된 오푼적동화와 이전오푼백동화에는 ‘대조선’이라는 국호가 다시 사용됐다.
이렇듯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화폐에도 한 민족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광복 이후 유통된 지폐의 도안에도 숨은 뒷이야기가 많다. 지폐의 도안은 위인과 유적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1962년 5월 16일에는 저축통장을 들고 있는 모자상이 도안된 ‘개 백환권(改百환券)’이 발행됐다. 이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위한 국민 저축심 앙양을 위해 발행된 것이다.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순 한글로만 표기된 것이 특징이기도 한 ‘개 백환권’은 그 해 6월 10일 통화개혁으로 24일만에 유통이 금지됨으로써 최단기간 유통된 화폐로 기록되기도 했다. 2009년 상반기 발행을 앞두고 고액권화폐의 발행과 관련해 김구와 신사임당이 새로운 도안으로 채택됐다. 새로이 발행될 화폐를 통해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면 한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35) “인천의 근대시설(5)”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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