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배수지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5 11:26:08
인천의 근대시설(5)
-인천상수도의 기원, 송현배수지-
김상열 인천시립박물관 유물조사팀장
물은 생물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필수요건 중의 하나다. 따라서 인류는 전통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을 하천이나 지하수에서 얻었다. 그러나 점차 도시가 형성되고 인구가 집중되자 물이 부족하게 되고, 지하수나 하천도 오염되어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므로 상수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경주 안압지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사용했던 상수도관·하수도관으로 보이는 토기관이 출토돼 신라인들의 물에 대한 높은 인식과 기술을 추측케 한다. 그러나 화강암지대가 많은 우리나라는 음료수로 사용될 깨끗한 물을 항상 대량으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 말기까지 상수도와 관련된 유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개항 이후 개항장을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되자 상수도 설치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 상수도의 시원과 관련된 유적이 송현배수지다.
# 인천 최초의 수원지는 문학산?
개항과 근대화의 물결 속에 서울·부산·인천·목포 등의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자 자연히 물이 부족하게 됐고, 전염병이 만연함으로 해서 상수도 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인천은 개항 후 설치된 조계지 거류민들의 식수를 웃터골 우물에서 간신히 충당했으므로, 선박급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1889년 북성동 파출소 앞에 큰 우물 3개를 굴착해 하루 500t의 용수를 선박에 공급하게 됐으며, 청일전쟁 후 일본인들이 여러 곳에 우물을 파 용수를 충당했지만, 한국인 거주지역은 식수를 간신히 공급하는 정도였다. 당시 1만6천463명 정도였던 개항장의 거주민(한국인 9천900, 일인 4천200, 청인 2천300, 서양인 63명)이 러일전쟁 이후 일인이 3배인 1만2천700명으로 급증하는 등 거주민이 증가하게 되자 인천은 급수의 결핍으로 수도건설이 일찍부터 요망됐다. 1905년 2월 당시 재인일본거류민단장(在仁日本居留民團長)이었던 토미타(富田耕司)의 제창에 의해 수도 부설에 관한 간담회를 열어 가또(加藤)영사, 이시바시(石僑)박사 등 40여 명을 민단사무소에 초대해 임시급수위원을 만드는 것을 협의하고 이나다(稻田勝彦) 등을 천거해 조사를 맡겼다. 이후 조사위원회를 여러 차례 열어 이시바시 공학박사 지도하에 상수도부설에 관한 설계가 완성됐다. 개항장에서 6km 떨어진 문학산 계곡에 빗물을 저장하는 우수저수지(雨水貯水池)를 건설해 1인 1일 사용 수량을 10갤런으로 하고, 약 1만4천 인의 급수능력을 가진 수원지로 하려 했으나 용수량이 적어 무산되고 말았다.
# 우리나라 상수도의 시작
1903년 12월 9일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토워크가 대한제국정부로부터 상수도부설경영의 특허를 받았는데, 1905년 8월 이 특허권을 영국인 회사인 조선수도회사(Korea Waterworks Company)에 양도해 뚝섬수원지공사가 시작됐다. 1905년 8월 내무부 기사인 나카지마(中島)박사 지도하에 경인수도 실지답사가 행해진 결과, 한강 연안 노량진 또는 뚝섬을 수원지로 해 서울, 용산, 인천에 급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의 설계가 완성됐다. 이것이 우리나라 상수도의 시작이다.
1906년 6월 대한제국 정부는 탁지부(度支部)에 수도국을 두어 이를 관장하게 했으나, 국고가 결핍되어 자금조달이 힘들었으므로 이토오(伊藤博文)통감이 조선정부에 권고해 관세수입을 담보로 1천만 원을 일본흥업(日本興業)에서 대출받아 상수도사업을 시행했다. 나카지마와 가와우에(川上) 등 2명의 일본인 공학박사에게 펌프 및 공사의 감독을 위촉하고 사노(佐野)공학사를 주임기사로 임명해 1906년 11월에 공사를 착수해 4년간의 공사 끝에 1910년 10월 준공됐다. 수원지는 노량진 부근 6천350평의 땅으로 해 한강의 물을 수원으로 사용했으며, 상류 쪽으로 115칸 떨어진 곳에 취수탑을 설치해 한강의 물을 끌어들였다. 침전지(沈澱池)는 3개를 설치해 2일분의 급수량을 저장할 수 있도록 했고, 여과지(濾過池)는 총 4개를 침전지 아래에 설치하고, 여과된 물은 정수지에 옮겨지는데, 여과된 물은 소유수량 13시간분의 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정수를 끝낸 물은 다시 송수관을 통해 배수지(配水池)로 이동됐다.
# 송현배수지의 제수변실
1910년 10월 30일 통수식을 하고 같은 해 12월 1일부터 급수를 시작했다. 양화진에서 인천과 용산 방면으로 통수하기로 했는데, 인천 방면의 공사가 빨리 진척되어 서울보다 일찍 급수가 개시됐다. 정수된 수돗물이 인천에 급수된 곳은 송현배수지였다. 정수된 수돗물(인구 7만 명, 1일 1인 111.8ℓ)은 송수펌프로 수원지 산꼭대기의 정수지로 밀어 올리고, 다시 자연낙하에 의해 직경 20인치의 주철관으로 30.8km 떨어진 송현배수지로 급수됐다. 그러나 수돗물은 일본인이 주로 사용했다. 부설비와 사용료를 한국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송현배수지는 부지면적 3만6천780㎡로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었으며, 배수지를 관할하는 일본식의 서양풍 1층 건물로 된 사무실 등이 있었다. 현재는 제수변실과 23단의 화강석으로 된 장대석 계단과 철제 정문이 남아 있다. 1931년 당시 1만t 정도가 급수됐는데, 요금은 월 최저 12t에 2원(당시 쌀 1되에 20전)으로 물값이 상당히 비쌌다.
제수변실은 배수관의 단수 및 유압조절기능을 하는 제수밸브를 보호하는 시설로 2003년 12월 3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일체식 무근콘크리트의 원통형 구조를 한 제수변실은 상부를 페디먼트로 장식한 출입구와 창문이 있다. 출입구 위에는 ‘만윤백량(萬潤百凉)’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이는 융희 6년(1912) 유맹(劉猛)의 작품으로 ‘백 번이 흐르면 만 번이 빛난다’라는 뜻이다. 벽체는 수직띠와 수평띠를 둘러 면을 분할했으며, 지붕부는 첨탑과 구름모양의 장식을 설치했다.
# 서민의 애환이 깃든 수도국산
송현배수지가 위치한 산명은 송림산(松林山)이다. 그러나 배수지가 설치되면서 지역민들에 의해 '수도국산(水道局山)'이라 불리게 됐다. 그러나 수도국산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 도심에 자리잡지 못한 서민들이 집중되면서 인천의 대표적 서민 주거지가 됐다. 그래서 '수도국산 달동네'라는 말도 생겨났다. 이곳은 배수지와 인접한 지역이지만 수도관 설비가 미약해 주민들은 공동수도에서 수돗물을 사서 물지게를 이용해 공급했다. 이러한 서민들의 생활상을 전시하는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2005년 개관됐다. 박물관 개관에 참여했던 나는 수도국산에 대한 동구민들의 애착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박물관 명칭을 정하는 회의에서 구순을 훌쩍 넘긴 어느 병원장께서 “수도국산이라는 지명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하시던 모습에서 수도국산에 대한 동구민들의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송현배수지는 근린공원으로 변모해 푸른 녹지와 운동시설이 설치됐다. 이번 주말, 가족과 함께 수도국산을 산책하면서, 제수변실을 한 번 살펴보고,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수도국산 서민들의 삶의 단편을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인천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물포구락부 (0) | 2023.04.29 |
---|---|
인천 기상대 (0) | 2023.04.29 |
근대화폐를 주조하던 인천전환국 (1) | 2023.04.27 |
근대 통신의 출발지, 인천 (0) | 2023.04.27 |
인천 밤바다를 지킨 팔미도 등대 (0) | 2023.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