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구락부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5 11:28:05
인천의 근대시설(7)
-제물포구락부-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장
1883년 개항을 맞이한 인천에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자 많은 외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이들과 함께 유입된 각 나라의 문물은 인천의 근대 문화를 형성했고, 인천은 세계 각국의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로 발전했다. 특히 당시 지어졌던 건축물들은 각 나라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다문화가 공존했었던 인천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다. 이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 파괴되거나 훼손됐지만, 몇몇은 여전히 이국적이고 독특한 정취를 풍기면서 그 형태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이 인천시 중구 송학동에 위치한 제물포구락부이다.
▲ 인천항에서 본 제물포구락부 원경
# 제물포구락부의 개관
구락부(俱樂部)라는 말은 영어 ‘CLUB’의 일본식 음역어로 단체 또는 클럽을 말하거나, 사교를 위한 공간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됐다.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었고, 북한에서는 지금도 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물포구락부라 함은 제물포 클럽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단체’와 ‘공간’의 의미가 모두 함축돼 있다.
제물포구락부는 1891년 8월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처음 조직됐으며, 중구 관동 1가 8-2번지에 목조 단층건물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회원 자격의 기준이 엄격하고 입회수속이 몹시 까다로웠던 까닭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서양인들만의 구락부로 변화했다. 1901년 제물포구락부는 지금의 위치에 새로운 건물을 마련하고 이전했는데, 같은해 6월 22일 오후 개관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이 ‘코리아 리뷰’에 기록돼 있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새롭게 단장한 제물포 구락부의 개관식을 6월 22일 토요일 4시30분에 가졌다. 내빈들이 다 모이자, H.N.알렌 여사는 은제 열쇠로 문을 열고 선두에 서서 건물로 들어섰다. 모두가 건물 내부의 멋진 방과 내부 시설들을 돌아본 후, 영국 영사인 허버트 고페(Herbert Goffe)씨가 간략한 연설을 통해서 메서스(Messrs), 사바틴(Sabatin), 데쉴러(Deshler) 와 루스(Luhrs)의 유익한 공로를 언급하며, 구락부 건물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을 해 주었다. 곧 이어 그는 알렌 여사에게 구락부의 개관을 선언하도록 요청했다. 모두들 대단한 감격 속에서 이 건물을 위해 건배했다. 고페씨는 “알렌 여사와 숙녀 분들을 위하여”라며 건배를 했고, 다른 사람들도 이에 건배로 응했다. 이후, 은제 열쇠는 알렌 여사에게 이 행사의 기념품으로 선사됐다. 이 건물은 전망이 좋고, 넓은 당구장과 독서실들, 그리고 근처에 테니스장이 갖추어져 있으며, 성장하고 있는 제물포 사회의 색다른 장식이 됐다. 이 클럽이 오래도록 물결치듯 활동하기를!
‘Korea Review’, News Calendar, 1901, p.271
이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응봉산 기슭에 새롭게 문을 연 제물포구락부 건물에는 당구장, 독서실, 테니스장 등 사교활동을 할 수 있는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건물이 갖는 사교장으로서의 기능은 1914년 각국 조계가 철폐됨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 건축적인 특징과 설계자 사바찐
현재 인천시지정 유형문화재 제17호인 이 건물은 러시아의 사바찐이 설계한 벽돌조 이층 건물로 연면적은 386.8㎡이다. 이층 건물이지만 경사면에 터를 잡은 까닭에 아래층은 반 지하로 지어져 매우 낮고 비좁아서 실제로는 단층 건물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지붕 형태는 일본식 합각지붕과 맨사드지붕으로 처리했으며, 양철로 마감했다.
이 건물을 설계한 러시아 사람 사바찐(Afanasij Ivanovich Seredin Sabatin)은 1860년생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건축가였다. 1883년 인천을 통해 입국한 사바찐은 인천 해관에서 토목기사로 일하면서 인천해관 청사, 세창양행 사택, 부두 등을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했다. 또, 만국공원 조성공사,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러시아영사관 등 인천에 들어섰던 많은 근대 건축물들을 설계하거나 공사감독 업무를 수행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쌓아갔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23년간의 조선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가 인천에서 활동한 시간은 10년에 불과하지만 그는 인천에서 활동한 최초의 정규 건축가이며, 근대 도시 인천의 이국적인 외관을 조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 일제치하의 정방각, 해방 이후의 모습들
1914년 인천에 설치됐던 각국의 조계가 철폐되면서 조계에 머무르던 외국인들도 속속 귀국했다. 이와 함께 외국인들의 사교무대였던 제물포구락부도 그 기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제물포구락부가 있던 이 건물은 일본제국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에 이관돼 ‘정방각(精芳閣)’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됐다. 그 후 1934년에는 인천부청에서 인수해 일본부인회 회관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미군의 장교구락부로 사용되다가 1947년 10월부터는 대한부인회 인천지부 회관으로 사용되면서 예식장과 다방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 인천시립박물관(1953-1990)
# 인천시립박물관 시절
인천상륙작전으로 건물을 잃어버린 인천시립박물관은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4월 1일 개관 7주년을 맞이해 제물포구락부 건물에서 복관행사를 가졌다. 사실 시립박물관이 제물포구락부 건물을 사용하기로 결정된 것은 약 9개월 전인 1952년 7월경이었다. 당시 이 건물은 미군의 사병구락부로 활용되고 있었는데 시립박물관장이던 이경성의 노력으로 미군에게서 양도받을 수 있었다. 다만, 진열장 등의 집기를 구입할 예산이 부족해 개관은 이듬해로 미루기로 했고, 대신 그때까지 인천시의회와 교육청이 이 건물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시립박물관의 복관 이후 이 건물은 인천의 중요한 문화공간으로 기능했다. 시립박물관 최초의 특별전이었던 제1회 고미술전(1953.4.1~4.30)이 개최됐고, 문화영화 상영, 시화전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실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초 사교장을 목적으로 지어졌던 건물이기에 박물관으로 쓰기에는 협소한 데다 매우 낡아서 관람객들의 불편이 가중되고 있었다. 1988년 올림픽을 맞이해 박물관의 신축 이전이 추진됐는데, 1989년 12월 20일 옥련동 525번지 청량산 기슭에 새로운 박물관 건물이 완공되면서 44년간 이어져 왔던 인천시립박물관 시절은 막을 내리게 됐다.
# 문화시설로의 활용
제물포구락부 건물이 단일 용도로는 가장 오랜 시간인 44년동안 박물관으로 활용됐다는 사실은 이후 이 건물의 활용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시립박물관이 이전한 뒤 이 건물은 인천문화원과 중구문화원으로 이용되면서 다양한 문화행사가 개최됐다. 한편 건물이 갖는 이국적인 정취와 빼어난 경관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2006년 시작된 ‘구 제물포구락부 원형복원사업’을 통해 완전하지는 않으나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제물포구락부 건물은 다양한 콘텐츠를 갖추고 2007년 6월부터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제물포구락부는 각국의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소통의 장으로 기능했었다. 2009년 세계도시엑스포 및 2014년 아시안게임으로 많은 외국관광객들이 인천을 찾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 시점에서 그 시절 제물포구락부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문화공간은 어디가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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